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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의 미래 휴양지'... 중국 황제·인도 총독도 반한 이곳

우리가 몰랐던 금강산, 호주인 역사학자가 가르쳐주다

등록 2019.11.19 10:43수정 2019.11.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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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금강산 관광 현지지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관광지구를 현지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금강산관광지구 사진. ⓒ 연합뉴스

"금강산은 해동(신라)의 동쪽에 위치한 진강(금강의 중국식 발음)이라 불리는 산이다. 비록 전체가 금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위아래 온 사방과, 산자락으로 접어들면 흐르는 강물 속 모래 한가운데가 온통 금빛이다. 그 산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온 천지가 금빛으로 반짝인다." 

8세기 당나라 승려 청꾸안(澄觀·738~839)은 금강산에 대해 이와 같이 묘사했다. 금강산은 오늘날에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호주의 여성 사학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독특한 여행기 <길 위에서 만난 북한 근현대사>(원제 To the Diamond Mountains·서미석 옮김·현실문화·2015)에 따르면, 그녀가 본 금강산의 암벽 색깔은 연푸른색과 짙은 구릿빛이 감도는 금색이 뒤섞여 오묘한 자취를 뽐냈다. 

영국 출신의 스즈키(일본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며 얻은 성으로 보임)는 자신을 매혹시킨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동서고금의 모든 기록을 동원해 설명한다. 저자는 지난 2009년께 중국 하얼빈에서 여정을 시작해 장춘과 센양·단둥을 거쳐 북한 신의주로 들어갔다.

이후 평양·개성·휴전선·원산·금강산을 차례로 돌아본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부산으로 갔다. 이 책은 이러한 여정에 대해 인문학적, 문학적, 예술적 통찰력과 지식을 총동원해 흥미롭게 묘사하는데, 그 중심엔 저자가 푹 빠진 '금강산'이 자리 잡고 있다. 책의 원제도 오죽하면 '금강산을 향하여'이다.       

해당 책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의 중국 역사서엔 이 우주에 여덟 개의 금강산이 있다고 쓰고 있다. "일곱 개는 멀리 바다 한가운데에 누워 있지만 하나가 한반도의 동해안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승불교 <화엄경>에도 "바다 한가운데에 금강산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 옛날 옛적부터 모든 보살들은 그곳에 멈추어 살게 되었다. (중략) 그들은 그곳에 머물며 경전을 설파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런 기록들은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금강이라는 이름이 불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불교가 도래하기 전에 있었던 토속 신앙에서도 금강산은 특별한 곳이었다. 저자 스즈키는 "금강산은 원래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고, 너무 멀리 금강산 꼭대기까지 발을 잘못 들여놓은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형상을 바꾸는 변덕스러운 정령들과 마주쳤다"며 "정령들은 이 인간 침입자들이 자신의 숨겨진 욕망에 직면하고 깊숙한 공포와 마주하게 만든다"고 꿈꾸듯 묘사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권근(1352~1409)은 시 <금강산>에서 다음과 같이 금강산의 절경을 묘사했다.

하얗게 우뚝 선 천만 봉우리
바다 구름 걷히자 옥 연꽃 드러나네
늠실대는 신령스러운 빛 창해를 닮은 듯
굼틀대는 맑은 기운 조화를 모은 듯 
우뚝한 산부리는 조도를 굽어보고
맑고 그윽한 골짜기엔 신선의 자취 감추었네
동쪽을 유람하다 곧 정상에 올라 
우주를 굽어보며 가슴 한 번 씻어 보자 


권근은 금강산에서 가까운 곳에 태어났지만 1396년 중국 사신으로 파견되기까지 한 번도 금강산에 가보지 않았다. 그가 도착하자 명나라 황제는 그에게 금강산을 시제로 주면서 시를 지으라고 요구했다. 명 황제에게도 동쪽 끝 조선 해안에 위치한 금강산은 관심 가는 주제였던 것 같다. 

스즈키에 따르면, 14세기 중국의 외교는 밀실에서 급하게 이뤄지는 오늘날의 회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황제가 제시하는 주제로 시를 잘 짓는 것은 주요한 외교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당황한 권근은 황제에게 금강산에 가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토록 오랫동안 품어온 깊은 갈망을 풀고야 말겠다"고 황제 앞에서 다짐했다. 이것이 위 시 <금강산>이 탄생한 배경이다.   

금강산을 예찬했던 이방인들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우리보다 우리에 대해 잘 아는 '이방인'이다. 그는 금강산을 찾아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이전 세기의 순례객들을 소개한다. 14세기 인도에서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극동의 고려 해안가에 있는 금강산까지 걸어온 인도의 승려 디야나바드라, 후에 인도총독이 된 영국인으로, 1890년에 금강산을 찾아 경외감에 사로잡힌 조지 커즌 경, 1930년대 금강산의 절에 머무르려고 머리를 삭발하고 남장을 하고 찾아온 미국인 여성 헬렌 채핀, 독일의 베네딕토회 수사로 1925년 금강산을 찾은 박식한 노르베르트 베버, 1910년 을사병합조약이 체결되기 불과 몇 달 전 금강산을 찾아온 화가·작가·여행가인 에밀리 조지아나 캠프, '호랑이가 출몰하는 숲, 근사한 사찰, 빨아들일 것 같은 협곡'에 대한 묘사로 금강산의 명성을 영어권 세계에 퍼뜨리는 데 일조한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가 그들이다. 

이외에도 스즈키는 "꿈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광으로 내 모든 정신을 사로잡고, 꿈의 끝자락에서 훨씬 더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금강산의 경이로움과 위기에 대해 묘사하는 유학자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온 이주자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소개했다. 

책에 따르면, 20세기 전반기까지 금강산엔 30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다. 특히 4대 사찰인 유점사, 표훈사, 신계사, 가장 큰 장안사 같은 사찰들은 고대 한반도·중국·인도·토화라국(현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 발흐에서 번성했던 국가)과 그 너머 세계 전역에서 온 보물들로 가득 찬 장엄한 불교 건축물들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표훈사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미국 측의 기록은 6.25 기간 동안 북한이 장안사를 포로수용소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북한 사람들은 스즈키에게 "장안사가 파괴된 것은 미군의 폭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금강산의 4대 사찰 가운데 신계사가 지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2004~2007년에 걸쳐 남북 공동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중국 혁명을 취재하며 혁명가 김산을 만나 <아리랑>(1941)을 함께 집필한 미국의 언론인 님 웨일즈는 금강산을 "동아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산이자 513년경부터 불교에 바쳐진 산"이라고 묘사했다. 화가 베르타 럼은 산속을 거닐다 내를 건너 어떻게 "너무도 빼어나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은 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사찰 경내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해 썼다. 

그가 말한 사찰은 바로 영원한 평화를 의미하는 '장안사'다. 그는 "대웅전은 이제껏 동양에서 본 중 가장 특이하다. 도대체 어느 누가 그렇게 대단한 조각과 색채를 구상할 수 있었는지, 설령 구상했다 해도 어떻게 그걸 그 자리에 구현해낼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잘난 체하던" 인도총독 커즌 경조차도 장안사를 보고 "진귀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사찰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커즌 경은 오만한 제국주의자였지만 금강산을 둘러본 소감을 어떤 이방인보다 열렬히 표현했다.

오늘날의 장안사는 몇 개의 주춧돌 터만 남아 있다. 남한 불교계는 신계사에 이어 장안사 복원도 희망하고 있다. 다행히 1925년 장안사를 촬영한 베버 수도사의 필름 영상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앞서 책을 통해 일제조차도 금강산의 매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관광지로 개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즈키는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 맑은 호수, 수정 같은 시냇물, 그림 같은 산들과 고지대의 꽃들로 뒤덮인 골짜기, 자연의 기묘한 손길이 빚은 환상적인 봉우리로 잘 알려진 금강산은 곧 '극동의 미래 휴양지'로 선전될 것이었다"라고 썼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금강산을 '콩고잔'이라고 불렀다. 일제는 '수탈' 목적으로 한반도에 철도를 건설했지만, 1924년 부설한 '금강산전기철도'는 관광객 유치가 목적이었다. 일제는 경성~내금강 장안사까지 야간 직행열차를 운영하며 금강산 관광객 유치에 주력했다.

금강산을 통한 '관광대국' 꿈은 이뤄질까

지난 11월 18일은 금강산관광 21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전날인 17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북미 비핵화 협상뿐 아니라 금강산 관련 의제도 포함됐다는 전망이다. 기존의 금강산관광은 나이 든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망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주로 찾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고, 젊은층이나 외국인은 별로 찾지 않아서 남한 투자자들에게 큰 매력이 없다고 평가절하되곤 했다.

하지만 금세기 이전 수많은 외국인이 금강산을 찾았고, 그 아름다움과 명성이 대단했다는 것을 한 외국인 여성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보물의 가치를 한국인은 정작 잘 몰랐던 것은 아닐까.          

북한이 금강산 개발을 통해 유치하고자 하는 이들은 남한 관광객이라기보단 서구와 중국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뛰어난 자연 풍광과 휴식을 관광의 주요목적으로 삼지만, 서구인들은 사회·문화적 경험도 중요시한다고 알려졌다. 그들에겐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뿐 아니라 북한만의 독특한 사회환경, 주민생활과 가치관도 관심거리다. 또 시진핑 주석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약속했다는 '중국관광객 500만'은 오늘날 전 세계를 다니며 아낌없이 과시적 소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아래에서 북한이 원산갈마관광지구에 이어 또다시 대규모 관광지를 독자 개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김 위원장은 '너저분한 남한 시설들을 철거하라'고 지시하면서도 '남한 사람들이 오면 언제나 환영한다'고 슬며시 여지를 뒀다. 북한이 눈독들이는 유럽과 미국·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금강산개발은 남한 기업에도 유리한 투자처가 될 수 있다.  

현재로선 금강산관광 역시 핵 문제와 연동돼 있다는 점에서 난관이 있다. 또 북한을 여러 차례 여행한 저자는 다른 나라에서처럼 혼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점을 최대 고충으로 꼽았다. 북한이 외국인 여행자에게 붙이는 가이드는 기본적으로 안내를 위한 것이지만, 평양 시내 뒷골목 등 외국인에게 개방할 수 없는 곳이 많고, 북 주민과 외국인의 돌발적인 접촉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이 관광산업을 통한 외화벌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외국인이 북한을 많이 찾을수록 주민들은 그들을 먼발치에서 보며 '왜 우리는 자유롭지 않은가', '왜 우리는 억압당하는가', '왜 우리는 저들처럼 풍요롭지 못한가'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북한을 경험한 외국인들도 강력한 주민통제와 독특한 사회체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며 체제 전환을 촉구할 것이다.

남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금강산 시설 주변의 높다란 펜스, 개성공단의 존재로 인해 북한의 일반 주민에겐 여행허가증이 잘 발급되지 않는 개성시는 북한이 실시해온 강력한 주민통제를 반영하고 있다. 외국인이 갈 수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엄격히 구분돼 있고, 비밀이 많은 나라는 관광산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이 완화돼야 김 위원장이 바라는 관광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 #개성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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