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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주윤발, 30년 후 조슈아 웡

[박창진의 홍콩 리포트] 17~19일 격화된 홍콩 시위 현장 한가운데서

등록 2019.11.20 11:49수정 2019.11.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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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의 피해자인 박창진 대한항공 승무원이 17~19일 홍콩을 찾았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 시위가 홍콩이공대학을 중심으로 한창 격화됐던 때입니다. 19일 오후 7시 30분(현지시간), 박 승무원이 홍콩에서 보내온 글, 사진, 영상을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최근 박창진씨는 정의당 국민의노동조합특별위원장에 임명됐습니다. 그는 "당내 직책을 맡은 상황에서 저의 행보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에도, 개인적으로나마 홍콩 시위에 연대의 의사를 표명하도록 양해해준 정의당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편집자말]
 

박창진의 홍콩 리포트17일 밤, 나는 격렬한 학생들의 저항과 경찰의 위협적인 진압 가운데 서 있었다. 홍콩이공대로 통하는 모든 길은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 중인 홍콩이공대와 침사추이 시내 사이의 도로를 곡예 하듯 돌고 돌아 겨우 빠져나왔다. 몇 번이나 근접 거리로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영상 제공 박창진, 편집 소중한) ⓒ 오마이뉴스

 
1996년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나의 기억 속에 홍콩은 1997년 중국 반환 이전 영광의 시간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현재 첵랍콕 공항이 생기기 전이었던 당시, 홍콩의 국제공항은 카이탁 공항이었다. 그곳으로 항공기가 막 착륙을 준비할 때의 풍광을 잊을 수 없다.

수 십층의 빼곡한 아파트 사이를 비행기가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착륙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시아에서 가장 북적였던 공항 중 하나였던 카이탁은 실제로 주변 지형과 고층 건물들 때문에 착륙하기 어려운 곳으로 악명(?) 높았다.

한국인 입장에서 1980~1990년대 홍콩은 문화의 풍류가 흐르고 발전한 경제를 향유하는 곳이었다. 마치 현재의 한류 팬들이 그들이 보고 들은 드라마와 가요 속 실제 현장을 찾아 한국에 오듯 말이다. 그때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홍콩은 주윤발, 임청하, 장만옥, 장국영 등으로 가득했는지 모른다.

직업 특성상 수없이 홍콩을 방문했던 것 같다. 늦은 시간 호텔에 도착해 짐을 푼 후 홍콩 거리를 자주 거닐었었다. 휘황찬란한 홍콩의 밤과 불빛들이 어쩌면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 홍콩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기도 했다.

홍콩이공대학으로 들어가다... 저항과 진압의 한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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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참가자에 무기 겨눈 홍콩 경찰18일 홍콩이공대학에서 시위진압에 투입된 경찰이 도주하려는 시위대를 향해 진압용 무기를 겨누고 있다. ⓒ 홍콩 AP=연합뉴스

 
지난 17일, 침사추이의 한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과거의 홍콩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거리의 보도블록이 뜯겨 나가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지난 며칠 동안의 상흔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참했다.

호텔에서 약 5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홍콩이공대학(홍콩폴리테크닉대학)으로 향했다. 평소 호텔 건너 광장과 공원을 지나갈 수 있었던 홍콩이공대는 정문으로 가는 길부터 경찰 특공대에 의해 막혀 있었다. 결국 뒤로 돌아 원래는 고속도로인 입구 위 육교로 향했다. 이미 곳곳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다. 벽에도 스프레이 페인트로 쓴 '홍콩광복 시대혁명' 등의 문구가 가득했다.

8차선 넘는 톨게이트는 창문이 뜯겨 나가고 불에 타 있었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는 시위대가 경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각종 물건으로 지나갈 수 없었다. 마치 전쟁터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계단을 통해 평소에는 절대 지날 수 없는 도로를 통해 홍콩이공대학으로 향했다.

한 청년이 육교 천장까지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 앞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자 바리케이드 틈 사이로 몇몇 청년들이 기어 나왔다. 그는 기어 나온 청년들을 향해 자기 몸만 한 크기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건넨 건 음식과 물이었다. 음식을 받은 청년들은 다시 바리케이드를 넘어갔다. 이미 그들에게는 준전시 상황이었다.

온갖 쓰레기와 벽돌, 그리고 경찰이 설치해놓은 위험물을 넘어 겨우 홍콩이공대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은 교문 앞에서 계속 경고음을 울리며 물대포를 학생들을 향해 뿜어대고 있었다.

신입생이던 1990년 한국 대학가가 떠올랐다. 1990년과 1991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도 대학가 시위가 정점으로 치달았던 것 같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 한쪽에선 보도블록을 뜯어 그것을 나르고, 다른 한쪽에선 학생회관 계단 가득 화염병을 쌓아두고 있었다. 언제 있을지 모를 경찰의 대학 내 진입에 대비하고 있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가 이 순간 오버랩됐다.

한 소녀가 마스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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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거리에서 시위대 한 명이 경찰에 끌려가고 있다. ⓒ 박창진

 
어느 순간 홍콩 경찰이 쏜 최루탄 연기가 퍼졌다. 매캐한 냄새가 눈을 찌르고 코를 자극해 나도 모르게 연신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소녀가 일회용 마스크를 내게 건네줬다. 이미 홍콩 사람들은 생사를 함께하는 동료 혹은 동지가 돼가고 있었다.

17일 밤, 나는 격렬한 학생들의 저항과 경찰의 위협적인 진압 가운데 서 있었다. 홍콩이공대로 통하는 모든 길은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 그들은 마치 1980년 광주의 진압군들처럼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발소리만 나도 어김없이 쇳덩이가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그쪽을 향해 위협을 가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그들에게 홍콩시민들은 잠재적 범죄자가 돼 있었다.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 중인 홍콩이공대와 침사추이 시내 사이의 도로를 곡예 하듯 돌고 돌아 겨우 빠져나왔다. 몇 번이나 근접 거리로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이튿날(18일), 다수의 시위대가 체포되거나 고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요일(17일)에만 진행될 줄 알았던 시위가 월요일(18일)에 더 긴박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는 기운을 느꼈다. 이른 오후인 2~3시 이미 침사추이의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호텔 직원들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오후 4~5시가 되자 삼삼오오 마스크를 쓴 청년들이 침사추이 시내 곳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보도블록이나 상가 내 물건, 거리 표지판 등을 뽑아 경찰을 막을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었다. 오후 7시 정도가 되자 겹겹이 쌓인 벽돌과 물건들로 거리는 더 이상 차가 지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고립된 학생들을 탈출시키려는 시민들의 안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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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거리 곳곳에서 우산으로 친 바리케이드를 볼 수 있다. ⓒ 박창진

 
해 질 무렵, 셀 수 없는 인파가 모이기 시작했다. 홍콩이공대에 고립된 학생들의 탈출을 위해서였다.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학생들의 무사 탈출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경찰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경찰이 그 어떤 협상도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운 결과다.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시위대를 구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그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맨 앞의 시민들이 우산으로 물대포와 최루탄 연기를 막다가 뒤로 물러나면 그 뒤의 시민들이 각자 가져온 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눈과 코를 씻겨줬다. 우산이 부족하면 뒤에서 우산을 차례차례 건네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었다.

시위대 가운데로 갑자기 오토바이 몇 대가 나타났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앳된 나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위대가 만든 틈을 통해 탈출한 몇몇 홍콩이공대 학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혼란이 그들에게 공동체 본연의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19일), 몇몇 탈출한 이들을 제외한 학생 다수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뉴스로 전해 들었다. 마음이 아릴 수밖에 없었다.

홍콩 그리고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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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록이 뜯겨져 있는 홍콩 거리 모습 ⓒ 박창진

 
귀국 전(19일), 홍콩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얀 호 라이와 학생운동가 조슈아 웡을 만났다. 얀 호 라이는 "홍콩 시민들은 5개 요구 실현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송환법 철회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자들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가 그것이다. 그는 "이 최소한의 요구 조건들이 홍콩에 자유, 정의, 법치를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 입법회에서 만난 조슈아 웡은 보다 강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지난 5개월 간 시민 수천 명이 잡혀갔고, 그중에는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며 "그런 인권 유린의 상태에 더 이상 각국 정부는 눈감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신과 많은 홍콩인들은 영화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을 보며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의식과 투쟁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며 2005년 홍콩에서 벌어졌던 한국 농민들의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에 대해 촉촉한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그때 많은 홍콩인이 한국 농민들의 간절한 시위와 삼보일배에서 투지와 투쟁의 고귀함을 보았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아울러 "더 이상 한국의 각 정당과 정부가 인권 유린과 탄압의 상황에 눈감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고 단호하게 부탁했다.

침사추이를 떠나기 전, 한 한국 식당 창가에 붙어 있던 포스터 속 문구가 계속 눈에 아른거린다. "올해는 홍콩 한인 70년 기념의 해"라고 적혀 있는 그 포스터 속 문구처럼 지나간 70년 동안 우리와 홍콩은 깊은 유대 속에서 함께해온 동지였다.

그러나 이 극명한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친구의 불의의 상황에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권과 인권의 보장은 인류 보편의 가치다. 더 이상 이 보편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홍콩 상황에 눈감지 말아야 한다. 국제사회는 홍콩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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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민주화 운동가 조슈아 웡(오른쪽)을 만난 박창진 정의당 국민의노동조합특별위원장 ⓒ 박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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