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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주변에 줄줄이 호텔... 왜 그런 일이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국립중앙도서관 ①

등록 2019.11.29 08:35수정 2019.11.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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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문을 연 1925년에 설립된 걸까? 아니면 1945년 개관한 '국립도서관' 시절에 설립된 걸까?

종로도서관, 남산도서관, 부산시립시민도서관은 모두 일제 강점기 문을 연 날로부터 도서관 역사를 헤아린다. 일제 식민통치를 경험한 타이완의 국립타이완도서관(National Taiwan Library) 역시 도서관 개관 시점을 타이완총독부도서관이 문을 연 1914년부터 꼽고 있다.


반면 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을 자신의 역사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45년 10월 15일을 '개관일'로 삼고 있다. 이 날은 국립도서관이 문을 연 날이며 미군정 시절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설립일'은 언제인가?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과 김인정 여사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방문단 일행이 촬영한 사진.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조선총독부도서관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이다. 오기야마 관장 옆에 있는 사람은 1931년 평양에 ‘인정도서관’을 세운 김인정 여사다. 조선총독부도서관 기관지인 <문헌보국> 제1호에 실린 사진. ⓒ 국립중앙도서관

 
흥미로운 것은 1970년대 초반까지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지금과 다른 관점을 취했다는 점이다. 1973년 발간된 <국립중앙도서관사>는 조선총독부도서관 관장인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를 '1대 관장'으로 표기했다. 해방 후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을 역임한 이재욱은 '2대 관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사>가 발간된 시점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을 국립중앙도서관의 역사로 포함시켰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발간된 <국립중앙도서관 60년사>부터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시대를 거의 다루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역사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이 1945년부터 '60년' 된 도서관이라는 것을 자체 발간물로부터 분명히 명시했다. 이런 입장은 2016년 발간한 <국립중앙도서관 70년사>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사'(前史) 또는 '모태'로 들여다볼 여지는 많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책, 시설, 사람을 그대로 이어받아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간판과 관장만 바뀐 것일 수 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은 '식민'이라는 부끄러운 과거와 도서관이라는 '근대' 제도 이식이 중첩된 시기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의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면 이를 명확히 밝히고, 그 반성 위에서 일제 잔재를 어떻게 청산하고 새로운 국립도서관 시대를 열었는지 밝히는 게 좋지 않을까?


<국립중앙도서관 60년사>와 <국립중앙도서관 70년사>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을 간단히 다룬 건 그래서 아쉽다.

국립중앙도서관 주변에 '호텔'이 줄줄이 들어선 사연
 

조선호텔 ‘철도호텔’이라 불리기도 한 조선호텔은 1914년 10월 10일 영업을 시작했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했다. 그는 경복궁에 건립한 조선총독부를 설계한 사람이기도 하다. 조선호텔은 ‘수직열차’라 불린 엘리베이터가 최초로 설치된 건물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총독부도서관은 해방 후 '국립도서관'으로 이어졌다. 국립도서관이 있던 곳은 환구단 근처 '석고단'이 있던 자리다. 일제가 석고단 자리에 총독부도서관을 세운 이유는 '조선총독부도서관' 편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관련 기사 : 나치보다 일제의 '분서'가 더 악독한 이유). 여기서는 국립도서관 주변에 난데없이 '호텔'이 줄줄이 지어진 사연을 살펴보자.

1914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울 목적으로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을 철거했다. 환구단을 철거한 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세웠다. 

1938년 3월에는 조선호텔과 조선총독부도서관 옆에 지상 8층, 지하 1층 규모 '반도호텔'이 들어섰다. 반도호텔은 111개 객실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상용 호텔이었다. 

반도호텔을 세운 사람은 노구치 시다가후(野口遵)다. 당시 노구치는 함경남도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질소비료공장(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을 운영했다. 질소비료공장을 경영하던 노구치가 반도호텔을 세운 사연으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호텔을 방문한 노구치는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호텔에서 쫓겨났다. 문전박대를 당한 노구치는 앙심을 품고, 조선호텔 바로 뒤 부지 2천여 평을 매입해서 더 큰 호텔을 지었다고 한다. 반도호텔은 건립 당시인 1938년부터 195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건물이었다.

반도호텔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하지 중장의 숙소와 집무실로 쓰였다. 1948년부터는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로 활용됐다. 한국전쟁 때는 미 8군 서울지구사령부로 쓰이다가 전쟁이 끝난 후 관광호텔이 되었다.

한편 조선호텔은 해방 후 미군정 사령부와 이승만, 서재필 박사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때 미 1군단의 중앙 정양처로 쓰이다가 1952년 8월부터 1961년 3월 30일까지 미 8군이 사용했다. 미 8군으로부터 조선호텔을 반환받은 민주당 정부는 조선호텔을 국무총리 관저로 활용하려 했다. 이 계획은 5.16 쿠데타로 인해 실행되지 않았다.

조선호텔은 1961년 11월 1일 교통부 직영 호텔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63년 8월 1일부터는 반도호텔과 함께 국제관광공사(지금의 한국관광공사) 관할로 바뀌며 '반도조선호텔'로 불렸다.

호텔의 새 주인이 된 국제관광공사는 옛 조선호텔을 철거하고, 아메리칸항공과 합작해서 새 호텔을 짓기 시작했다. 1967년 10월 3일 건립 공사를 시작, 1970년 3월 17일 지상 18층, 지하 1층 규모의 호텔을 개관했다. 윌리엄 태블러(William B. Tabler)가 설계한 이 호텔은 500개 넘는 객실을 갖췄다.

새롭게 문을 연 조선호텔은 1971년 남북 적십자회담 장소였다. 반도호텔과 함께 국빈을 맞는 '영빈관'으로도 쓰였다. 조선호텔은 1979년 아메리칸항공의 지분을 인수한 웨스틴호텔에 의해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2년 호텔 민영화 방침에 따라 삼성그룹에 매각되었다가 신세계그룹 소유가 되었다.

롯데호텔은 왜 38층이 되었을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1974년 12월 27일 대통령 경호실 창설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차지철의 모습이다. 경호실장이 된 뒤 장관급으로 경호실장을 격상시키고 현역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두었다. 비상시에는 경호실이 수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 차지철의 ‘월권’은 결국 10.26으로 이어졌다. ⓒ 정부기록사진집

 
한편 롯데그룹은 반도호텔을 인수해서 1978년 38층 규모의 '롯데호텔'을 새로 지어 개관했다. 롯데호텔이 '38층'이라는 애매한 층수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애초에 롯데그룹은 50층 가까운 층수로 호텔을 설계했다. 일본 최고층 호텔보다 더 높거나 비슷한 호텔을 짓자는 의도였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높은 호텔은 도쿄 게이오프라자호텔로 47층 170미터 높이였다. 

롯데호텔 건설에 제동을 건 사람은 1974년 청와대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이다. 그는 '대통령 경호'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호텔 건설에 제동을 걸었다. 1973년 5월 건립 계획이 완성된 롯데호텔은 차지철의 '간섭'으로 1975년 5월에야 착공할 수 있었다. 결국 롯데호텔은 처음 설계보다 낮은 '38층'으로 완공됐다.

완공 후에도 롯데호텔 38층 북쪽 창문은 가림막으로 막혀 있었다. 청와대를 향한 저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가림막이 철거되긴 했으나 무소불위의 '차지철 경호실 시대'를 말해주는 일화다.

롯데호텔을 짓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반도호텔 옆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전하도록 지시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던 땅을 롯데그룹에 넘겨주고, 롯데가 그 부지까지 포함해 개발하도록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롯데백화점 주차장'이 들어선 건 이 때문이다. 1907년 개업해서 서울 최고의 중국 요릿집이었던 '아서원' 부지도 롯데가 사들여 롯데타운 부지로 흡수했다. 아서원은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했던 장소다.

1970년대까지 소공동 주변은 중국 화교가 집단 거주하는 '차이나타운'이었다. 이 일대가 본격적으로 재개발된 것은 1966년 10월 31일 미국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방한 때문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린든 존슨 대통령 환영 행사에는 30만 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이 모였다. 환영 행사가 TV로 중계되면서 시청 건너편 소공동 일대 슬럼가가 상당 시간 방송을 탔다.

공중파를 통해 도심의 슬럼가가 노출되자,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빈민가'가 부끄럽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소공동 슬럼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크게 일자, 1971년 8월 28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소공동 재개발 사업을 발표했다. 소공동 차이나타운 재개발의 신호탄이었다.

건립도 쫓겨난 이유도 '정치적'이었던 국립중앙도서관
 

린든 존슨 대통령 방한 환영 시민대회 1966년 10월 31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 그의 방한은 뜻밖의 파장을 일으켰다. 소공동 슬럼가가 방송을 타면서 화교가 밀집한 ‘차이나타운’의 재개발로 이어졌다. ⓒ 서울역사박물관

 
최초 계획은 소공동을 터전으로 살던 화교와 협의하여 화교회관을 비롯한 고층건물 지대로 개발할 예정이었다. 계획과 달리 이 일대를 한국화약이 사들이면서 화교가 내쫓기고 '한화타운'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8년 한화그룹은 일본 기업 마루베니(丸紅)와 합작해서 플라자호텔을 지었다. 그 뒤로 한화빌딩, 한화금융네트워크가 차례로 들어섰다. 이것이 서울에 '차이나타운'이 사라지고 '한화타운'이 들어선 사연이다.

웨스틴조선호텔이 있는 환구단 자리는 '소공주댁'이 있던 곳이다.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과 함께 살던 곳이라 소공주댁이라 불렸다. '소공동'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임진왜란 때 소공주댁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왜군이 주둔했다. 한양을 탈환한 후에는 이여송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사용했다. 선조가 명나라 장수를 만나러 자주 드나들면서 소공주댁은 '남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남별궁은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사신이 묵으면서 '영빈관'처럼 쓰였다.

명과 청나라 사신이 영빈관으로 묵던 이곳에 고종은 환구단을 짓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대국의 사신이 묵던 곳을 독립제국의 선포 공간으로 삼아 황제에 즉위한 것이다. '사대'의 공간을 '독립'의 공간으로 선포한, 다분히 상징적인 조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외국 군대와 사신이 묵던 땅의 내력이 '팔자'처럼 이어진 탓일까. 지금도 이 주변은 웨스틴조선호텔, 롯데호텔, 프레지던트호텔, 더플라자호텔까지 외국인이 많이 묵는 호텔이 줄지어 서 있다.

주변 호텔이 재벌에게 '분배'되고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은 첫 번째 부지였던 소공동을 떠났다. 대한제국의 상징을 가리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소공동에 세워진 국립중앙도서관은 '정경유착'라는 새로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으로 간 까닭은?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시민 위안의 밤 남산 회현자락에 지어진 야외음악당은 1만 5천 명이 관람 가능한 대형 야외공연장이었다. 조개껍질 모양의 무대(96평)를 갖췄고, 멀리서도 연주가 잘 들릴 수 있도록 음향설계를 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은 1974년 남산 회현자락으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도심 소공동에서 접근이 불편한 남산으로 이전한 데에는 황당한 사연이 있다. 박정희는 을지로 롯데타운 건설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의 부지를 롯데그룹에 넘겼다. 서울 도심 개발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의 이전을 고려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전 자체보다 그 결정 과정이 '졸속'이었다는 점이다. 소공동 부지를 롯데타운에 내주면서 국립중앙도서관은 이전할 땅을 마련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 이전 위치가 남산 어린이회관 건물로 '졸속' 결정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73년 10월 롯데에 소공동 부지를 8억 원에 매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해인 1974년 6월까지 이전 부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전할 부지를 먼저 마련하고, 기존 부지를 매각하는 수순이 맞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정권의 압력으로 도서관 부지부터 먼저 내놓고, 9개월 가까이 이전할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남산 어린이회관은 처음부터 도서관 전용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다. 접근성뿐 아니라 장서 보존을 포함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건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어린이회관 건물은 언론을 통해 '안전' 문제까지 거론됐던 모양이다. '어린이회관'으로 안전하지 않은 건물이 '도서관'으로는 안전했을까.

사실 국립중앙도서관은 장서가 늘고 건물이 비좁아지면서 1960년대부터 이전 논의가 일었다. 1969년 국립중앙도서관은 문예중흥 계획에 따라 130만 권을 수용할 수 있는 1만 2천 평의 설계안을 제시했다. 이 설계안은 20억 원의 재원 마련 문제로 중단되었다. 여의도에 6천 평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한 또 다른 안은 추진조차 되지 않았다.

동숭동 서울대학교 부지가 매각되면서 그 자리로 국립중앙도서관을 옮기자는 의견이 일었으나 당국이 묵살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립중앙도서관이 이전한 곳이 남산 어린이회관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새롭게 이전한 어린이회관 앞마당(지금의 백범광장)에는 '남산 야외음악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병의가 설계한 남산 야외음악당은 1962년 9월 5일 공사를 시작, 1963년 6월 완공됐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 사무실과 악기 창고, 현대식 무대를 갖춘 시설이었다. 1만 5천 명의 관객이 연주와 공연을 즐길 수 있고, 100미터 밖에서도 연주가 잘 들리도록 음향을 설계했다.

음향 설계가 '잘 된' 탓이었을까. '야외'음악당에서 울려 퍼지는 공연 음향은 국립중앙도서관뿐 아니라 남산도서관의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비판이 일곤 했다. 남산 야외음악당은 1980년 4월 철거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은 6년 넘게 야외음악당과 '동거' 해야 했다.

남산 시절의 국립중앙도서관
 

개관 한달 전 남산 어린이회관 모습 남산 어린이회관은 1970년 7월 25일 개관했다. 어린이회관은 종합전시실, 과학오락전시실과 실험실, 도서실, 천체과학관, 수영장, 체육관 같은 시설을 갖췄다. 사진 왼편에 남산식물원과 남산도서관, 분수대가 차례로 보인다. 공사중인 남산 어린이회관 오른쪽으로 남산 야외음악당이 자리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66년 박정희는 남산에 '종합민족문화센터'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과 도서관, 현대미술관, 종합박물관, 세종대왕 기념관을 포함한 매머드급 문화 시설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예산을 포함한 여러 문제로 국립극장과 국립국악원 국악사 양성소(지금의 별오름극장)만 짓고, 도서관을 포함한 나머지 시설은 '백지화'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종합민족문화센터 안에 신축되지 않고 어린이회관으로 이전했다. 소공동이라는 도심에서 남산으로 밀려나면서, 신축도 아닌 어린이회관 건물로 '쫓겨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이전한 남산 어린이회관에 대해 살펴보자. 1970년 7월 25일 문을 연 남산 어린이회관은 종합 전시실, 과학 오락 전시실, 실험실, 도서실, 천체과학관, 수영장, 체육관 같은 시설을 갖췄다. 영부인 육영수 주도로 지은 어린이회관은 지하 1층, 지상 18층 건물로, 개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다. 최상층에는 1시간에 360도 회전하는 원형 회전식당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남산 어린이회관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과 국기원을 작업한 건축가 무애 이광노가 설계한 건물이다.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며, 미리 제작한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를 외벽에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마감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무애 이광노는 김중업, 김수근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 2세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다. 남산 어린이회관은 건축 의도와 상관없이 '도서관'으로 용도 변경되었으나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주대학교 도서관을 작품으로 남겼다.

동양 최대 규모로 문을 연 남산 어린이회관은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73년 5월 5일 능동에 문을 연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연건평 2만여 제곱미터의 '새 건물'을 지어서 말이다. 어린이가 이용하기 불편하고 교통편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어린이와 그 부모가 접근하기 어렵고 불편한 그 공간이 도서관 이용자에게는 편리했을까. 

어린이회관의 능동 이전이 결정된 후 국립중앙도서관은 약 5개월의 보수 공사를 거쳐, 1974년 12월 남산 어린이회관 건물로 이전했다. 전용 건물도 아닌 어린이회관 건물로 졸속 이전한 국립중앙도서관의 신세를 처량하다고 해야 할지, 비참하다고 해야 할지. 국립중앙도서관의 남산 이전은 1967년 탑골공원에서 종로도서관을 '철거'한 사건과 함께, 박정희 정권이 도서관을 어떻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관련 기사 : 종로도서관 친일파 동상, 그냥 두고보면 안 되는 이유).

남산 국립중앙도서관 터에 자리했던 '조선신궁'
 

남산 위에서 내려다 본 조선신궁 1926년 촬영한 사진으로 상중하 3단으로 이뤄진 조선신궁의 ‘상단’ 모습이다. 조선신궁 너머로 경성역, 애오개, 만리재, 한강까지의 풍경이 담겨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이 두 번째로 옮겨간 남산 회현 자락은 사연 많은 터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자리했던 곳이다.

일제는 식민통치 기간 내내 한반도 곳곳에 '신사'(神社)를 지었다. 일제가 '1면 1신사' 원칙을 고수했다고 하니, 방방곡곡 신사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곳곳에 신사를 지으면서 일제는 조선 신사의 정점에 자리할 곳으로 '조선신궁'을 짓고자 했다.

일제는 조선신궁 후보지로 경성, 경남, 부여를 검토하다가 경성으로 결정했다. 경성에서는 삼청동, 경복궁, 사직단, 장충단, 왜성대, 한양공원, 효창원 같은 7개 지역이 후보지였다. 비용과 효과를 고려한 후 일제는 남산 한양공원에 20만 평 부지로 신궁을 건립하기로 했다. 조선신궁은 1918년 공사를 시작해서 1925년 완공됐다.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일제는 1920년 남산에 있던 목멱신사, 즉 '국사당'(國師堂)을 인왕산으로 몰아냈다. 남산이 '목멱산'으로 불린 것은 목멱신사가 있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국사당은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가 나라의 안녕을 비는 수호신당으로 세운 곳이다.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국사당은 조선인에게는 성역이었다. 

일제는 국사당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이곳을 지나던 한양도성 남산 성벽 역시 770미터가량 허물었다. 이때 남대문에서 조선신궁에 이르는 자동차 길을 함께 냈는데 지금의 '소월로'다.

일제가 남산에 지은 조선신궁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明治) 천황을 주신으로 삼는 신사다. 일제가 조선에 지은 신사 중 최정점에 있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일본 황실의 조상신과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곳으로 성역화하면서 정신적, 종교적 차원까지 조선을 지배하고자 했다.

남산 조선신궁은 12만 7800여 평으로 상단.중단.하단 세 공간으로 완공됐다. 상중하 세 공간은 384개 계단으로 이어졌다. 본전이 있던 상단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옛 남산식물원 자리다. 중단은 백범공원 자리, 그리고 하단은 김유신 동상이 있는 광장 일대였다. 남산 시절 국립중앙도서관이 자리한 곳은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공간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후 일제는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1936년 연간 100만 명이었던 참배자 수는 1940년 215만 명, 1942년 265만 명으로 급증했다. 남산 국립중앙도서관이 자리한 공간은 이런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1937년 7월 27일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발동했다. 10월 1일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공포해서 행사 때마다 암송토록 했다. 1938년 12월 23일부터는 일본 천황의 사진을 각급 학교에 배포해 학생들이 경배하도록 했다. 1939년 11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돌에 새긴 '황국신민서사지주'까지 조선신궁 앞에 세웠다.

'조선신궁'은 어떻게 되었을까?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쓰인 남산 어린이회관 무애 이광노가 설계한 남산 어린이회관은 당시 첨단 소재와 최신 공법을 사용해 완공한 건물이다.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를 외벽에 쌓아 커튼월로 마감했다. 층마다 돌출된 처마는 한국 전통건축의 곡선미를 살린 요소다. ⓒ 백창민

 
해방 후 '조선신궁'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과 함께 한반도 곳곳에 있던 신사는 대부분 불타거나 파괴됐다. 어찌 된 일인지 조선신궁만은 조선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일본인에 의해 해체, 정리되는 과정을 거쳤다.

조선신궁은 1945년 8월 16일 신령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승신식(昇神式)을 거친 후 10월 6일까지 해체 작업이 진행됐다. 신궁에 있던 신물은 일본으로 보내고, 남은 시설은 소각했다. 남산 조선신궁 입구에 있던 도리이(鳥居)는 1947년 무렵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이 건설한 식민도시는 '신사'와 '유곽'(遊廓)이라는 2가지 특징을 지닌다. 신사는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유곽은 사창가와 각종 윤락시설로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일제는 장충단 근처 쌍림동, 지금의 제일병원 근처에 공창(公娼) 시설인 신마치(新町) 유곽을 만들었다.

'장충단'은 개항 이후 순국한 사람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남소영 터에 세운 '국립묘지'다. 일제는 대한제국 국립묘지인 장충단 바로 앞에 신마치 유곽을 세웠다. 신마치 유곽에서 시작된 한국의 성(性)산업은 세계 최대 규모로 꼽힐 만큼 '성장'했다. 달갑지 않은 식민지 잔재인 셈이다.

해방 이후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자리에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81척에 달했던 이승만 동상은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8월 철거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높이 30-50미터의 분수대를 설치했다. 1969년 완성된 남산 분수대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분수대였다.

동물원(1970년)과 식물원(1971년)도 지었다. 식물원은 남산도서관 뒤편에 자리했다. 조선 시대에는 역적의 집터를 허물고, 연못을 파거나 가축우리를 만들었다. 조선신궁과 이승만 동상이 있던 자리에 분수대와 동물원, 식물원을 조성한 것이다.

국권을 강탈한 일제와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이승만을 역적, 즉 '국가의 적'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조선신궁에 동물원을 만든 것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일제에 대한 보복 조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조선신궁 본당이 있던 남산 회현 자락은 한때 도서관, 어린이회관, 식물원, 동물원, 분수대, 야외음악당, 어린이놀이터 같은 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식물원과 동물원은 2006년 10월에 철거했고, 분수대도 지금은 가동을 중단했다.

그 많던 시설이 이전하거나 폐쇄되고, 지금은 남산도서관과 옛 국립중앙도서관(어린이회관) 건물, 안중근의사기념관만 남았다.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일대는 서울시가 발굴조사를 끝낸 후 2020년 한양도성 현장 유적박물관을 세울 예정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74년 12월부터 1988년 5월까지 13년 5개월 동안 조선신궁 터였던 남산 회현자락에 머물렀다.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반포동으로 이전한 후 남산 어린이회관 건물은 '서울시과학교육원'으로 바뀌었다. 1999년 1월부터는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으로 쓰이고 있다.

국립'서초'도서관인가, 국립'중앙'도서관인가
 

1988년 개관 무렵에 촬영한 국립중앙도서관 서초구 반포동에 완공된 국립중앙도서관. 지금과 달리 도서관 전면에 “국립중앙도서관”이라는 도서관 이름을 부착하지 않았다. 도서관 앞에 ‘국민 독서교육의 전당’이라는 조형석이 놓여 있다. 이 조형석은 전두환의 글씨를 새긴 조형물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개발 전 영동, 지금의 강남은 서울 근교의 '농촌'이었다.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단무지, 도곡동은 도라지를 많이 재배했고, 압구정동은 과수원, 서초동은 꽃동네였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을 개발하면서 서울시청을 비롯한 112개 정부기관을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려 했다. 계획대로 모든 기관이 옮기진 않았지만 상당수 공공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서울법원 종합청사와 검찰청사가 이전한 서초역 주변은 원래 서울시청이 옮기려 했던 부지다.

1979년 서울시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할 신청사 부지로 서초역 일대 2만 5천 평을 매입했다. 서울시청이 강남으로 이전하지 못한 이유는 대통령의 결재가 나지 않아서라고 한다. 강남 이전이 무산되면서 서울시는 이 땅을 법원과 검찰 청사 부지로 내줬다. 그 대신 정동에 있던 법원과 검찰청사 부지를 넘겨받았다. 정동 옛 법원 건물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으로 쓰이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새롭게 이전한 반포동 부지는 지하철 서초역과 고속버스터미널역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교통이 편리한 곳이 아니다. 도서관 전용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는 점에서는 다행일지 모르나 접근성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그나마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있어서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 이용하기 낫다는 점을 위안 삼아야 할까.

반포대교부터 예술의전당까지 이어지는 길은 '반포대로'다. 반포대로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성모병원, 대법원과 대검찰청, 학술원, 조달청, 예술의전당 같은 공공기관이 밀집한 곳이라 '강남의 세종로'라고 불린다.

'금싸라기' 강남 땅에 도서관이 서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하냐고 생각할 분도 있겠다. 반포대로에서 가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국립중앙도서관과 예술의전당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위치는 앞서 언급했고, 예술의전당은 어디에 있을까? 반포대로 끝자락, 왕복 8차선인 남부순환도로 건너편에 있다. 군사 정권이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문헌학자 김시덕씨는 <갈등도시>에서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부지가 신흥 종교 박태선의 전도관(천부교)이 매입했던 땅임을 언급했다. 이곳이 '신앙촌'으로 개발되었다면 국립중앙도서관은 어디에 건립되었을까. 그 장소가 어디인지 특정할 수는 없으나 그 입지의 특성은 알 수 있다. '접근성'이 좋은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초구 반포동에 1988년 신축 개관한 국립중앙도서관은 지은 지 10여 년 만에 균열이 발생하며 '붕괴' 위험이 있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전용 건물을 지어 신축한 지 10여 년 만에 '부실공사'로 안전 문제가 불거졌다니, 이 나라의 도서관은 정책부터 국가도서관 건물에 이르기까지 '부실 투성이'였던 셈이다.

서울성모병원 뒤편에 자리한 서리풀공원의 '서리풀'은 서초(瑞草)의 우리말이다. 반포대로에는 '누에다리'가 걸려 있다. 누에다리는 예전에 이 지역이 '뽕밭'이었음을 상징한다. 서리풀공원에서 누에다리를 건너면 몽마르뜨 공원과 서래마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갈 수 있다. 국립'중앙'인지 국립'서초'인지는 이용자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말이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국립중앙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국립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도서관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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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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