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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큰 정독도서관, 이름에 담긴 씁쓸한 의미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정독도서관 ②

등록 2019.12.26 14:17수정 2019.12.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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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정독도서관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김옥균과 서재필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책'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크다. 책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서구 문물과 일본 근대화 상황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고, '개화파'로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독도서관 일대는 개화파의 '요람'이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는 개화파를 길러낸 박규수의 집터다. 박규수는 연안 박지원의 손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그로부터 개화사상을 접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만국공법>(萬國公法) 같은 '불온서적'을 접하며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떴다. 

'책'과 인연을 자랑하는 정독도서관 터
 

능지처참 후 효수된 김옥균 일본에서 10년 동안 망명했던 김옥균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온전히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김옥균의 무덤은 세 군데다. 도쿄 아오야마(靑山) 묘지 외국인 묘역과 도쿄 진조지(眞淨寺),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무덤이다. 모두 그의 머리카락과 의복을 모신 무덤이다. ⓒ Wikipedia

 
개화파의 스승인 박규수는 어떻게 서구 문물을 접했을까? 평양 관찰사 시절 그는 제너럴 셔먼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면서 서양 무기의 위력을 절감했다.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하면서 해외 사정에 눈 뜬 그는 개명 지식인이 되었다.

박규수는 연암이 중국에서 가져온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저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고, 어느 나라건 가운데로 돌리면 중국이 된다. 정해진 중국(中國)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박규수 집에 있던 백송(白松)은 지금도 헌법재판소 뒷마당에 남아 있다.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집은 박규수 집과 담을 맞대고 있었다. 서광범은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중간쯤에 살았다. 박영효 형제는 박규수의 친족이었다. 김옥균과 서재필은 정독도서관 자리에 살았다. 김옥균 집 앞에 김홍집이 살았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 일대가 개화파의 '산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급진 개화파의 핵심인 김옥균은 1872년 22세 때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그해 김옥균은 성균관에서 도서 출납을 담당하는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의 첫 관직이 국립대학도서관의 '사서'였던 셈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김옥균은 우리 역사에 드문 '사서 출신 혁명가'가 아닐까. '사서' 출신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폐지를 주장한 것도 묘하긴 하다.

1894년 홍종우에게 암살된 후 국내로 송환된 김옥균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후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글과 함께 거리에 버려졌다. 역적으로 죽은 김옥균은 한일 강제병합 시기인 1910년 7월 18일 정2품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종3품 규장각 직각(直閣)에 추증됐다는 설도 있다. 

대제학이든 직각이든 죽은 후 그가 폐지를 주장한 왕실 도서관장 관직을 제수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때로부터 93년 후 그가 살던 집터는 '도서관'이 되었다.

'개화'(開化)란 <주역> 계사(繫辭)에 나오는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고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는 뜻이다. 1880년대초 개화파가 쓰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졌다. '개화'의 주역이 살던 곳이 '만물의 뜻을 담은' 도서관이 된 것은 '개화파'에게 뒤늦게나마 위로가 될까. 

헐버트와 성삼문의 흔적
 

성삼문 집터 표석 1418년 태어나 1456년 죽은 성삼문 집터 표석이다. 단종 복위를 꾀한 그는 수양대군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했다. 정독도서관 입구에는 ‘성삼문 집터’ 표석과 함께 ‘화기도감터’ 표석과 ‘중등교육 발상지’ 표석이 나란히 서있다. ⓒ 백창민

 
갑신정변 가담자의 재산과 집은 모두 국가에 몰수되고 그들의 집은 헐렸다.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이곳에 살던 김옥균과 서재필은 정권의 '실세'로 권세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중학교'는 이곳에 자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립중학교 시절 단층 짜리 학교 건물은 서양식으로 지은 서재필의 빈 집을 고쳐 쓴 것이라고 한다. 

수업 연한 4년이었던 관립중학교는 1900년 10월 3일 화동 1번지에 개교했다. 1906년 9월 1일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21년 4월 1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헤이그의 네 번째 밀사'였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가 '육영공원'에 이어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 곳이 관립중학교다. 1886년 문을 연 육영공원은 최초의 근대 관립학교다(최초의 근대학교는 1883년 개교한 '원산학사'다). 

헐버트는 우리 근대사에서 '도서관'과 깊은 인연을 자랑하는 외국인이다. 그가 학생을 가르치던 관립중학교 터는 정독도서관으로 바뀌었고, 그가 살던 대관정은 일제 강점기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의 두 번째 터가 되었다. 헐버트는 <The History of Korea>라는 한국통사를 영문으로 출간했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서울에서 가장 크고 자료를 많이 갖춘 사설 도서관'의 도움을 받았다(관련 기사 : '미스터션샤인' 그 병원이 도서관으로 바뀐 사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한 집현전 학사 성삼문의 집터도 이곳이다. 1438년 과거에 합격한 성삼문은 세종의 한글 창제를 위해 요동에 있던 황찬을 열 번 넘게 찾아가 만났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자, 성삼문은 세조로부터 받은 봉록을 하나도 쓰지 않고 곳간에 쌓아두었다.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가 그는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금을 향한 한결같은 '단심'(丹心)을 지닌 성삼문이 살던 곳이 '홍현'(紅峴)이라 불리는 것도 예사로워 보이진 않는다.

조선 세종 때 연구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역할을 겸했던 집현전의 역할을 생각하면, 정독도서관 터가 지닌 책과의 인연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독도서관 바로 앞인 화동 138-33번지 한옥에서 1920년 1월 14일 동아일보사가 출범한 내력까지 고려하면, '땅에도 팔자가 있다'는 말이 우스개처럼 들리지 않는다. 1926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가 광화문으로 사옥을 옮긴 후에는 중외일보사가 사옥으로 사용했다. 

정독도서관 터는 우리 시대 '문자'로 쓰이는 훈민정음을 만든 주역 중 한 사람의 집터였다. '개화파'를 탄생시킨 이곳은 오랜 세월 '학교'로 이어지며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학교 건물을 그대로 살려 도서관으로 변모한 이곳은 이제 서울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되었다.

서울교육박물관과 홍현
 

홍현 표지석과 서울교육박물관 서울교육박물관 앞에는 ‘홍현’ 표지석이 서 있다.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은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교육관’으로 쓰였다. 정독도서관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백창민

 
정독도서관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2호다. 정독도서관 입구에는 '서울교육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옥균 집터가 이 자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실제 김옥균 집터 표석도 서울교육박물관 뒤편에 있다.

서울교육박물관은 우리나라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서울 교육의 역사, 제도, 과정, 내용, 기관, 활동을 유물과 사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1995년 6월 15일 '서울교육사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가 2011년 지금의 이름으로 명칭을 바꿨다. 서울 교육에 대한 1만 5천 점 이상의 자료를 시대순으로 살펴볼 수 있어서 정독도서관 들르는 길에 함께 둘러보면 좋을 곳이다.

서울교육박물관 앞에는 '홍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의 흙이 붉어 '홍현'이라 불렸다.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은 1927년 지은 건물로 추정된다. 정독도서관 건물군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최준식 교수의 회상에 따르면 경기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생들이 며칠씩 숙박하며, 리더십 교육을 받는 '교육관'으로 쓰였다고 한다.

정독도서관 뒤편 북촌 한옥마을 일대는 조선의 재상 맹사성이 살아 맹고개, '맹현'(孟峴)이라 불린 곳이다. 맹사성 집터에는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정독도서관은 학교 건물로 쓰인 건물 세 동, 식당 건물, 서울교육박물관 같은 몇 개의 건물군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도서관 건물 두 동과 식당, 서울교육박물관 4개다.

경기중학교 건물로 쓰이다가 지금은 정독도서관 열람실로 쓰이는 제일 뒷 건물과 음악실로 쓰인 직원식당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쓰인 도서관 건물 앞 두 동과 도서관 식당 건물은 1938년경에 지은 건물인데 반해, 중학교로 쓰인 세 번째 교사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 지은 건물이다. 

'경기고등학교 시절'의 정독도서관
 

개관 시점의 정독도서관 70년 넘게 화동에 자리했던 경기고등학교는 1976년 2월 20일 삼성동으로 이전했다. 학교 건물과 교정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경기고등학교는 1977년 1월 4일 정독도서관으로 재탄생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정독도서관은 학교 건물 중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다. 당시에는 최첨단인 스팀 난방을 도입한 건물이었다. 도서관 앞뜰은 원래 경기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운동장으로 쓰였다. 앞뜰에 있는 조형물 중 눈에 띄는 건 '겸재인왕제색도비'와 '분수대'일 것이다. 경기중·고등학교 동문이 아닌 사람들은 이 조형물이 경기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둘 다 도서관으로 바뀐 이후 세웠다.

'겸재인왕제색도비'는 겸재가 그린 인왕제색도가 이 지점에서 보는 풍경과 동일해서 세운 조형물이다. 문화부 의뢰로 1992년 7월 15일 세운 김영중의 작품이다. 김영중은 세종문화회관 외벽에 새긴 '비천상', 독립기념관의 '불굴의 한국인상'을 작업한 조각가다. 한국 1세대 조각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김영중은 종로도서관 이범승 흉상을 작업한 작가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 입구는 현관을 돌출시킨 '포치'(porch)로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는 구조다. 건물 입구에 새긴 '정독도서관'이라는 글씨는 박정희의 친필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박정희가 쓴 정독도서관 휘호가 남아 있다. 흔히 쓰는 '圖書館' 대신 '圖書舘'이라고 쓴 점이 눈에 띈다.

정독도서관 건물은 좌우대칭 구조에 현관을 중심으로 건물 중앙을 강조한 형태다. 외관도 권위적 인상을 주지만 내부 구조 역시 그렇다. 건물 입구로 들어가면 중앙 계단이 있다. 경기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교장과 교사가 중앙계단을 이용하고, 학생은 건물 좌우에 있는 계단을 이용했다고 한다. 기다란 일자형 평면으로 이후 한국 학교 건물의 '원형'처럼 반복된 건물이 아닐까 싶다.

해방 이후 'KS'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경기고등학교 출신의 서울대 진학률은 높았다. 1970년에는 졸업생의 81.8%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진학 명문'으로서의 명성은 일제 강점기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성제일고보)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1회를 수석으로 입학한 유진오도 경성제일고보 출신이다. 

경성제일고보는 1924년부터 1941년까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가장 많은 합격생을 배출한 학교였다. 굵은 흰테를 하나 두른 백선 모자와 다이아몬드 배지는 당시 명문 경성제일고보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학교 측은 학생의 진학 준비를 위해 교장실 옆에 '도서실'을 따로 마련하여 밤 11시까지 스팀 난방을 제공했다고 한다. 고교 평준화 시행 전까지 이 학교는 최초이자 최고 학교로서의 명성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부터 1956년까지 미군 통신부대가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사용했다. 두 번째 건물은 경기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과학관'으로 불렸다. 실험실이 이 건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중학교 교사로 쓰인 세 번째 건물 뒤편에 남아 있는 '건물'은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미술관'으로 쓰였다.

중학교 건물, 그러니까 정독도서관 열람실 건물 오른쪽에는 '수영장'이 있었다고 한다. 도서관으로 개관한 후에도 한동안 수영장은 유지되었다. 야외 수영장을 갖춘 드문 도서관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단층 짜리 '서고' 건물이 있다.

도서관 식당으로 쓰이는 건물은 '강당'이었다. 식당 앞 건물은 음악 수업을 위한 '음악당'으로 쓰였다. 음악당 안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고 한다. '직원 전용 식당'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이 학교 출신의 천재 건축가 이천승의 작품이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이 그의 대표작이다.

정독도서관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한옥은 '백인제 가옥'으로 1913년 한상룡이 지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 불리는 한상룡은 대표적인 친일파다. 은행가로 활동한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 재계의 1인자로 꼽혔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경영이 연기한 강인국의 모델이 한상룡이었다. 한상룡이 살던 백인제 가옥은 영화 <암살>의 촬영지로도 쓰였다.

백인제 가옥은 일제 강점기 지은 근대 한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옥이다. 유리와 벽돌 같은 근대 건축재료가 쓰이고, 전통 한옥에서는 외부로 트인 대청과 툇마루에 문을 달아 실내 공간으로 만들었다. 한상룡이 접객을 위해 지은 집으로, 데라우치, 하세가와 같은 조선총독, 야마가타 정무총감, 석유왕 록펠러 2세가 방문했다.

한상룡, 최선익을 거쳐 이 집의 마지막 소유주가 백인제여서 '백인제 가옥'이라고 불린다. 백인제는 최고의 외과의사로 꼽힌 사람으로, 그가 세운 백인제 병원이 인제대학교 백병원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백인제가 동생 백붕제와 함께 '정치보위부'로 쓰인 국립도서관에 억류됐다가 북으로 끌려갔다는 내용은 '국립도서관' 편에서 다뤘다(관련 기사 : 이승만에게 찍혔다고... 국립도서관에 얽힌 황당한 사연).

정독도서관 '우물돌'이 전하는 교훈
 

박제순 집터 우물돌 박제순은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그의 집터 흔적을 알려주는 우물돌이 정독도서관에 남아 있다. 박제순 집터 우물돌은 도서관 첫 번째 건물과 두 번째 건물 사이에 있다. 박제순 집터는 옛 경기고등학교 본관 자리였다고 전한다. ⓒ 백창민

 
정독도서관에는 '우물돌'이 있다. 도서관 첫 번째 건물과 두 번째 건물 사이에 남아 있는 우물돌은 이 곳이 박제순의 집터였음을 알려준다. 

18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박제순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894년 충청도 관찰사 재직 때는 갑오농민군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1895년 외부협판, 1902년 주청 전권공사를 거쳐 1905년 외부대신이 되었다. 외교 분야 실무자로 시작해서 외교 정책을 책임지는 최고 관료가 된 것이다.

박제순은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을사늑약 체결 때 박제순은 '외부대신'이었다. 외부대신은 지금으로 치면 외무부 장관이다. 한 나라의 외교를 책임지는 대신이 외교권을 포기하는 조약에 찬성하는 게 가능할까 싶은데, 박제순은 가능했던 모양이다. 1910년 6월에는 내각총리 서리로 일제에 경찰권을 넘겼고, 1910년 8월 경술국치 때는 내부대신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조약에 찬성했다. 

그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었는지 '대일본제국'의 외부대신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4년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토착 왜구'와 '검은 머리 미국인' 논란이 이는 걸 보면, '국적'은 애국과 매국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박제순도 박제순이지만 이런 자를 외부대신에 임명한 고종도 책임을 피할 순 없다. 어쨌거나 박제순은 친일 매국노 중 핵심이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자작이 된 박제순은 나라를 팔아 먹고도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그의 후손은 재산과 작위를 이어받았다.

외교를 책임진 관료가 다른 나라 국익을 위해 일하는 게 대한제국 시대에만 일어나는 일일까? 박근혜 정부 시절, 외교부가 대통령의 '하명'을 받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 재판이 사실상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종용'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외교부가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주려 한 점에서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국익'을 앞세워 강제징용 피해자인 '국민'을 외면한 '만행'이었다. '외교부'가 아니라 '왜교부'라는 탄식이 이로부터 나왔다. 

그에 앞서 박근혜는 일본과 '위안부 협정'을 체결해 큰 반발을 산 바 있다. 아버지 박정희의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이어 딸 박근혜의 2015년 '위안부 협정'이라니. 국민을 외면한 정부와 관료의 작태는 대한제국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시민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지 않으면 정부와 관료의 '매국' 행위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박정희 시대와 도서관
 

정독도서관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시대지만 도서관은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고도 성장 시대에도 도서관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 ⓒ 백창민

 
정독도서관이 탄생한 1977년은 박정희가 통치하던 시대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 도서관은 얼마나 늘었을까?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동안 공공도서관은 100개가량 늘었다. 1962년 21개였던 전국의 공공도서관은 1979년 119개가 되었다. 해마다 5.4개씩 늘어난 셈이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 시절에는 1953년부터 1958년까지 17개의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시기였던 1950년부터 1953년까지를 제외하더라도 한 해 2.8개 도서관이 개관한 셈이다. 전쟁의 여파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제1공화국 시대는 도서관의 '암흑기'였다. 

박정희 시대 도서관은 이승만 자유당 정부 시절과 비교할 때 늘어나긴 했다. 경제적으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평가받는 시대지만, 문화적 측면 특히 도서관 분야까지 그 기적이 가시적으로 확대되진 않았다.

경제학자 조순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30년 고도 성장기를 '압축 성장'(condensed growth)이라고 표현했다. 경제 분야에서 고도 성장이 이뤄졌음에도 도서관이 그에 걸맞게 성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도서관 분야까지 성장의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가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1963년 도서관법이 발효되며 법적으로 도서관이 제도화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하지만 탑골공원에 있던 종로도서관의 철거, 소공동 국립중앙도서관의 남산 이전, 강남대개발 과정에서 도서관 부지 제외에서 알 수 있듯, 박정희와 제3공화국이 도서관에 '정책적 관심'을 가졌다고 평가하긴 어렵다. '조국 근대화'를 부르짖은 박정희 시대에도 도서관은 근대화의 '변방'에 머물렀다.

이승만에서 박정희,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까지 이어지는 30년 넘는 기간 동안 이 나라에 '도서관 정책'이라는 것이 있긴 했나 싶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정책의 정책'이 아니었을까. 이승만과 박정희, 뒤를 이은 전두환까지, 이 나라 독재자의 '도서관 외면'은 일관성 있게 이어졌다.

정독도서관에서 바르게 읽어야 할 것은
 

정독도서관 1977년 문을 열어 올해로 개관 42주년을 맞았다. 역사는 종로도서관과 남산도서관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서울에서 가장 장서가 많은 도서관이다. 50만 점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고, 1,862석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다. ⓒ 백창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도서관은 종로도서관이고, 서울시 대표도서관은 서울도서관이다.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공도서관은 정독도서관이다. 정독도서관은 건립한 지 100년 가까운 남산도서관과 종로도서관에 비해 역사가 42년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는 절반에 미치지 않지만 정독도서관은 종로와 남산도서관보다 훨씬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며, 서울에서 장서가 가장 많은 도서관이 된 것이다.

정독도서관의 장서량은 전국적으로도 손꼽을 수준이다. 대전 한밭도서관, 부산시립시민도서관, 경기평생교육학습관,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장서를 자랑한다. 절판된 책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고, 고가의 책도 구입하고 있다. 동네 도서관에 없는 책, 헌책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정독도서관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와 서울 도서관 이용자의 든든한 벗이라 할 만하다.

건물과 운동장을 그대로 살려 도서관을 개관하는 조건으로 경기고등학교 이전을 추진할 정도로 강남 개발은 중차대한 국정 과제였다. 강남 개발을 위해 박정희 정권은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서울 최대의 도서관인 정독도서관은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탄생했다.

놀랍지 않은가. 한 도서관의 탄생 과정에 멀리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가의 흔적이 이어져 있고, 가까이는 남북의 군사적 긴장이라는 대외 상황과 강남 대개발, 강남8학군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명문고 이전이라는 굵직한 정책이 잇닿아 있다는 사실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급속한 성장을 '압축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를 수십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이뤘다는 것이다. 시인 김진경은 혁명 같은 변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 대해 이런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삼십 년에 삼백 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압축 혁명의 시대 도서관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도서관에는 '혁명'이 아닌 '압축'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성장은 압축할 수 있지만 성숙은 압축할 수 없다'라고 하지만, 압축 혁명의 변방과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도서관은 방치되고 외면당했다.  

정작 우리가 '바르게 읽어야'(正讀) 할 것은 정독도서관 탄생에 얽힌 시대상일지 모른다.

[서울특별시교육청 정독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길 48 (화동)
- 이용시간 : 인문사회자연과학실(평일 09:00 - 20:00, 주말 09:00 - 17:00), 어문학 족보실 /다국어 연속간행물실 / 디지털자료실 / 청소년관(평일 09:00 - 20:00 11월-2월은 09:00 - 19:00, 주말 09:00 - 17:00) 어린이실(평일 09:00 - 18:00, 주말 09:00 - 17:00), 자율학습실(평일 07:00 - 23:00, 11월-2월 08:00 - 23:00, 주말 07:00 - 22:00 11월-2월 08:00 - 22:00)
- 휴관일 : 매월 첫째 셋째 수요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무료
- 홈페이지 : http://jdlib.sen.go.kr/
- 전화 :  02-2011-5799
- 운영기관 : 서울시교육청
덧붙이는 글 ‘정독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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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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