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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영업비밀'의 실체, 그런데

[낮은 자를 위한 지혜, 유현석공익소송기금⑦] 삼성전자 안전진단 보고서 비공개처분 취소소송

등록 2019.12.02 08:25수정 2020.02.0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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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가진 자의 무기가 아니라 낮은 자를 위한 지혜가 되어야 한다."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 약자들의 벗으로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고 유현석 변호사님의 생전 말씀입니다. 유 변호사님은 70년대 남민전 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2009년 5월 유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연재를 통해 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소송이 우리 사회에 남긴 변화를 되짚고자 합니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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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9일 경기도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사업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환경부 공무원, 경기소방재난본부 등으로 구성된 합동 감식반이 현장감식을 벌이고 있다. 이 사업장에서는 불산 가스가 누출돼 1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하는 등 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삼성전자 화성공장, 총체적인 안전보건관리 부실 드러나'

2013년 3월 고용노동부가 낸 보도자료의 제목이다.

그해 1월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불산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산업 현장에서 '불산'은 주로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쓰인다. 미세한 반도체 공정에서는 꼭 필요한 물질이다. 또한 맹독성 물질이다. 피부나 호흡기를 통해 노출될 경우 인체에 치명적이다.

불산 누출이 일어난 곳은 CCSS(Central Chemical Supply System, 화학물질 중앙 공급 장치)룸. 반도체 생산라인에 화학물질을 공급하는 거대한 탱크와 배관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불산을 공급하는 배관에 작은 균열이 생겨 불산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즉시 불산 공급부터 중단해야 했지만, 현장에 있던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다. 배관 속 압력을 빼지 않은 채 새어 나오는 불산가스를 막으려다 현장 노동자들은 더 위태로워졌다. 결국 34세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말았다. 불산이 새어나온 이유는 낡은 배관 탓이겠지만, 노동자가 사망한 원인은 위험 작업을 '외주화'한 탓이었다.

고용노동부가 후속 조치에 나섰다. 사고가 발생한 화성공장에 대해 특별감독을 실시한 후, 위와 같은 보도자료를 냈다. 무려 2004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노동부는 삼성전자의 모든 반도체 공장(화성·기흥·온양)에 대한 '안전보건 진단 명령'을 내렸다.

삼성과 고용노동부 "삼성의 영업비밀에 관한 사항"
  
법원은 2014년 5월부터 여러 차례 특별감독과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 공장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고용노동부, 안전보건공단, 삼성전자 등의 답변은 "삼성의 영업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보고서는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직업병 피해를 다투는 산재소송에서 이처럼 법원의 자료 제출 요구가 거부되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 이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해당 보고서들에 대한 정보공개 소송을 기획했다. 그 보고서들이 정말 삼성의 영업비밀로서 공개되면 안 되는지 법적으로 다투어보자는 것이었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과 그 공장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연구해온 전문가들로 공동 청구인단을 꾸렸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 도움을 청하자 서선영, 김동현, 김두나 변호사가 흔쾌히 나서 주었다. 서울대 로스쿨 내 소모임인 '산소통(산업재해 노동자들과 소통하는 학생들의 모임)' 학생들도 소송 준비를 도왔다. 소송 비용은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운영하는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의 도움을 받았다.

고용노동부 "보고서 공개시 삼성 이미지 저하"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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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소중히 아끼는 삼성이 되길..." 환경운동연합,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킨이(반올림), 경기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2013년 1월 30일 오전 경기도 동탄 삼성반도체 화성공장 정문앞에서 '불산누출 사고 은폐 규탄과 진상규명 및 대책수립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는 가운데, 한 참석자가 "사람을 소중히 아끼는 삼성이 되길..."이 적힌 마스크를 쓰고 있다. ⓒ 권우성

 
"보고서가 공개되면 삼성의 기업 이미지가 저하되고 국제적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

2015년 7월 시작된 정보공개 소송에서 피고 고용노동부가 실제 했던 주장이다. 고용노동부는 "보고서 전체가 회사의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며 보고서의 일부 내용도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보고서가 공개되면 그에 부담을 느낀 회사들이 향후 노동부의 감독 업무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지만, 삼성전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 같았다. 재판 때마다 삼성전자 직원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방청석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했고, 재판이 끝나면 법정 밖에서 고용노동부 대리인과 또 무언가를 열심히 상의했다.

또한 고용노동부는 '산업기술보호법'을 끌어왔다. 국내 산업기술의 무분별한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법이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는 생뚱맞게도 이 법을 삼성의 영업비밀을 확장시키는 근거로 삼았다. 요컨대 삼성전자는 이 법이 정한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사업장으로서 그 법에 따라 철저한 보안 체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그 공장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이 보고서는 삼성의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우리는 소송에서 이 보고서가 작성된 경위를 강조했다. 2007년 삼성 백혈병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부터 직업병 피해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삼성 반도체 공장 전반에 관한 정부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9조(안전보건 진단 등)와 제51조(감독상의 조치)에 따른 고용노동부의 감독권을 행사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권한이 2013년에 터진 불산 누출 사고를 계기로 비로소 행사되었다. 요컨대 이 보고서들은 오랜 시간 노동자들의 생명·건강 문제로 논란을 빚어온 공장에 대해 국가가 처음으로 그 관리 실태 전반을 점검한 결과였다. 기본적으로 삼성의 영업비밀이 될 수 없는 자료였다.

더욱이 우리 정보공개법은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는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있었다(3조). 설령 기업의 영업비밀 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도 "법인 등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어야 비공개될 수 있고(9조 1항 7호), 또 그렇더라도 "사업 활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위해(危害)로부터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공개되어야 했다(9조 1항 7호 단서).

서울고등법원 "보고서 공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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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산누출로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발생한 경기도 화성시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 정문에서 2013년 1월 30일 오후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 권우성

 
2017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은 이 보고서들이 "근로자 및 지역주민의 생명·신체의 안전 내지 건강과 관련된 정보"로서 삼성전자 재해근로자, 지역주민, 직업병 예방 시민운동가인 원고들은 그 "구체적 내용에 관하여 알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을 이익을 가진다"고 했다.

아울러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적하며 "영업비밀과 관련 있는 정보는 원칙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다"고 하거나 "영업비밀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근로자 또는 지역주민의 건강·안전이라는 공익이 더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독반 이름'과 같은 일부 내용만 제외하고 보고서 대부분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서울고등법원 2017. 10. 13. 선고 2017누41988 판결).

고용노동부는 이 판결에 승복했고 판결 선고 한 달 뒤에 총 1000쪽에 가까운 문서들을 보내왔다. 그렇게 삼성전자가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영업비밀'의 실체가 드러났다. 특히 가장 많은 직업병 피해자가 알려진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 대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에는 그 공장에서 확인된 매우 구체적이고 심각한 문제점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이었다.

"작업자가 발암물질인 비소에 노출될 수 있는 공정에 그러한 경고 표시가 없음."

"화학물질 관리 내용을 관찰해 보면 상당한 문제점이 전반적으로 관찰됨. 이러한 문제점이 최근 수년 동안 여러 차례 지적되었음에도 충분히 개선되지 않고 있음."

"외부점검, 안전진단을 통하여 문제점을 발굴하겠다는 자세보다는 문제가 없다고 하거나 문제점 축소를 지향하는 왜곡된 문화가 상당히 강함."

산업기술보호법 개악,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알 권리'

직업병 관련 소송에서 이 보고서에 대한 증거조사를 처음 요청한 때가 2014년 5월이었다. 직업병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이 이 보고서의 내용, 즉 자신이 일했던 공장에 대한 정부의 점검 결과를 확인하는데 3년 6개월이 걸린 셈이다. 고용노동부가 보고서 제출을 계속 거부하여 소송이 지연되던 중 사망하고 만 피해자도 있었다.

이처럼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은 그 공장의 작업환경에 대한 알권리 투쟁도 함께 해야 했다. 정부의 조력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부는 삼성의 막무가내식 '영업비밀' 주장을 대변하기 바빴다. 투쟁은 이어졌고 다행히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이 판결이 있고 4개월 후(2018년 2월), 대전고등법원도 삼성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대전고등법원 2018. 2. 1. 선고 2017누10874 판결). 그리고 그 다음달(2018년 3월), 고용노동부도 '안전보건자료 정보공개 지침'을 개정하며 앞으로 이러한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올해 8월 이 모든 성과들을 한방에 뒤집어 버리는 일을 우리 국회가 해냈다. 산업기술보호법을 개정하며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9조의 2)는 규정을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앞서 법원에서 공개 여부가 다투어진 그 보고서들에 대해 실제 삼성은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라고 주장했었다. 그럼에도 법원이 그 보고서들을 공개하라고 판결하자 이제는 법이 바뀌어 버렸다.

이 법안이 국회 상임위에서 대안으로 발의되고 통과되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본회의에서도 단 한 명의 반대표가 없었다. 일 안 하기로 소문난 20대 국회가 이런 일은 또 신속하게 뚝딱 해냈다. 삼성 직업병 문제와 관련해 반올림과 뜻을 같이했던 국회의원들도 모두 이 법에 찬성했다. 해당 의원실에 전화를 걸어 왜 찬성했냐고 묻자,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그런 문제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페이스북으로 이 사태를 전하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그리고 디테일이 없으면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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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지난 8월 산업기술보호법을 개정하며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9조의 2)는 규정을 추가했다. 사진은 지난 8월 2일 국회 본회의 모습이다. ⓒ 남소연

 

[기획 / 낮은 자를 위한 지혜, 유현석공익소송기금]
① 브래지어 강제로 벗으라는 경찰들, 속셈은 따로 있었다 http://omn.kr/1j3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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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여기선 뒈져도 아무도 모른다'... 억울함 안고 사망한 중령 http://omn.kr/1l9ap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 반올림 활동가)입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정보공개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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