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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회장 독식하면 아파트는 그의 왕국

[아파트 회장 분투기 19] 입주민들 돈으로 놀러다닐 심산

등록 2019.12.03 08:59수정 2019.12.0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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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10년 이상 회장 자리를 독식하면 아파트는 그의 왕국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주민들도 무관심하니, 다시 말해서 감시의 눈도 없으니 불법과 비리가 생기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다. ⓒ pixabay

 
그렇게 강고해 보였던 적폐세력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걸 눈으로 확인한 건 2017년 1월 20일 정기회의였다. '몸통'의 오른팔인 관리소장이 유죄 판결을 앞두고 있었고 왼팔이었던 행동대장 감사도 유죄 판결로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열린 이 날의 정기회의에서 이들은 손발이 안 맞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였다.

그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수원시 공동주택관리 보조금 지원사업의 건'이었다. 이들은 이 안건을 통과시켜 수원시 보조금을 받아 우리 아파트의 아스팔트 전체를 새로 깔고 싶어했다. 수원시의 보조가 있지만, 우리 아파트의 관리비가 최소 2억 원 이상이 들어가는 큰 공사였기 때문에 나는 이 안건을 부결시키고 싶었다.

물론 지은 지 30년이 다 되고 지하 주차장이 없는 우리 아파트의 아스팔트가 낡고 파인 곳이 꽤 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공사를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보수만 해도 되는데, 저들은 전면 공사를 원했고, 더구나 공사를 진행하면 공사비 산정과 업체 선정을 둘러싸고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 공사를 반대하는 사람은 회장인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전원이 그 공사를 '간절히' 원했다.

'개인행동'을 한 행동대장 감사

드디어 회의가 열렸다. 나는 체념 상태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처음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10명이었다. 평범한 안건을 처리하는 동안 2명이 일이 있다며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8명으로 마지막 안건인 아스팔트 공사 건을 다루었지만, 의결정족수가 7명이었기 때문에 저들이 모두 찬성하면 의결은 문제없었다.

안건토론이 있었다. 회장인 나는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으니 빨리 표결에 부치자며 언성을 높였다. 어쩔 수 없이 표결에 들어갔다. 반대하는 동대표는 손들라고 하니 나만 손을 들었다. 그런데 찬성엔 6명만 손을 드는 게 아닌가? 행동대장 감사가 기권을 표한 것이다. "난, 기권할래. 통과시키면 뭐해, 남기업이가 못하게 막는데"라며.


행동대장 감사가 갑자기 '개인행동'을 한 것이다. 사실 이런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선 사전에 입을 맞추고 행동 방침을 정하고 회의장에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속하게 "표결 결과 반대 1, 찬성 6, 기권 1로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면서 의사봉을 기분 좋게 두들겼다. 몸통은 흥분했다. 다시 의결하자고 핏대를 올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바로 회의 종료를 선언해 버렸다.

그러나 집요한 몸통은 여기서 멈출 위인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자 아스팔트 공사 안건 재상정을 담은 '임시회의 개최 요구서'를 자기를 맹종하는 동대표들의 서명을 받아 회장인 나에게 보내왔다. 관리규약은 동대표 1/3이 임시회의를 요청하면 회장은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안건을 재상정해서 아스팔트 공사를 통과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안건 재상정을 거부하는 문서를 그에게 보냈다.

"의결된 사항의 안건 재상정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재상정하려면 의결 당시와 현재 상황에 중대한 변화가 있거나, 회의에 참여한 동대표들이 회의 당시 안건 파악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객관적 사실이 존재했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외의 안건 재상정은 불가능하며, 그렇게 해야만 입주자대표회가 의결한 사항의 안정성과 신뢰성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안건만 제외한 채 임시회의를 개최했지만, 그들은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들의 '관심 안건'이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그들에게 모든 것을 문서로 답했고, 그것을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했다.

자생단체 '산악회' 지원 거부로 망연자실하다

그러던 중 저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아파트의 관리비를 자기들이 먹고 마시는 데 쓰고 싶었던 저들은 2017년 5월 '산악회'를 조직해서 아파트 내 '자생단체 지원금' 요청을 회의 안건으로 상정했다. 자생단체인 산악회의 회원 목록을 보니 적폐세력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입주민들의 돈으로 산에 놀러 갈 심산이었다. 지원금 요청서 내역에는 심지어 '시산제 100만 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무조건 부결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나 혼자였기 때문에 안건으로 올리면 통과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관리규약에는 자생단체가 요청하면 지원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회장 초기부터 나를 도왔던, 관리규약에 능통했던 한 입주민에게 지원하지 않을 근거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 자생단체의 재정지원이 가능하다는 조항 마지막에 "다만, 개인의 취미 생활을 목적으로 구성된 모임은 제외한다"는 단서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쾌재를 불렀다. 나는 회의에서 이 단서를 읽어주며 산악회는 취미활동 단체이니 지원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아 버렸다. 골프모임 자생단체가 재정지원 대상이 안 되는 것처럼 산악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저들은 아연실색했다. 규약에 그런 단서가 있는 줄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렇게까지 준비할 줄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이 일로 저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듯이 보였다. 그동안 남기업을 쫓아내기 위해서 불법적 해임투표를 3번씩이나 해도, 1년 반 동안 회의 때 이리 승냥이처럼 마구 물어뜯어도 사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핵심 요원 둘을 전과자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수원시에 감사를 청구해서 자기들이 저지른 불법의 상당 부분을 공개적으로 밝혀내고, 회의 때마다 반박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이대며 자기들이 원하는 걸 좌절시키니 말이다.

두 번째 회장 출마를 결심하다

회장으로서 온갖 수난을 당할 때 나의 목표는 회장을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임기를 마치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앞으로 회의가 몇 번 남았는지 셀 정도였다. 마지막 정기회의 날짜인 2017년 9월 20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1년 반 정도 되니, 또 저들이 급격히 무너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장을 한 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간 나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봤던 아내는 그 힘든 걸 왜 또 하려느냐며 말렸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회장을 다시 하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이렇게 끝내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았다. 2년 동안 내가 한 것은 고작 저들이 하려던 것 중 불법이 명백한 몇 가지를 못하게 막은 것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저들은 무조건 반대했다. 아파트라는 작은 단위를 변화시켜보는 경험, 말로만 듣던 '마을'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맘이 점점 커졌다.

나를 괴롭혔던 동대표들이 중임 제한에 걸린 것도 중대한 이유였다. 한 사람이 10년 이상 회장 자리를 독식하면 아파트는 그의 왕국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주민들도 무관심하니, 다시 말해서 감시의 눈도 없으니 불법과 비리가 생기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정부는 아예 법으로 동대표를 두 번만 할 수 있도록 제한해 놓았는데, 그들이 거기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회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회장인 나에게 우호적이면서 상식적인 동대표들을 섭외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어머니를 모셔야 할 상황이어서 동대표 선거를 치르기 전에 같은 아파트에 집을 구해서 미리 이사해 놓아야만 했다. 만약 당선된 후에 이사하면 동대표와 회장직은 자동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을 구하기도, 괜찮은 동대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 #아파트 비리 #아파트 민주주의 #마을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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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환수하는 토지공개념과 기본소득, 그리고 통일을 염두에 둔 대안 국가모델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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