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06 08:47최종 업데이트 19.12.06 09:43
  • 본문듣기
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 산내에서 불법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편집자말]
땅거미가 지며 주변이 어스름한 시각, 까까머리 중학생 5명이 신례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 중 한 초가집을 기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아."


이들은 물러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돌아왔다. "정순종씨 계시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정순종 아내 양춘영이 "누구세요"라며 목을 뺐다. 낯선 학생들이 있길래, 그녀는 "무슨 일이 있는 가요"라며 찾아 온 용건을 물었다.

"정순종이 어디 있어?" 양춘영은 기가 막혔다. 학생들은 기껏해야 17~18세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대뜸 자기 남편을 찾으며 하대를 하지 않는가.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학교를 늦게 입학했어도 스무 살 안쪽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다른 중학생의 이어지는 말은 그녀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이X이 빨리 대답 안 하고 뭐해!" 불쾌감을 넘어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들의 폭언은 이어졌다. "너 이X, 산 사람들한테 밥 해줬지?" 그녀가 기가 막혀 말문을 잃은 순간, 학생들이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왜 이래요?" 항의가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그녀의 배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의식은 까무룩 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서 안이었다. 제주도 서귀포군 남원면 위미지서였다. 이때부터의 취조는 경찰이 도맡아서 했는데, 요점은 남편이 어디 있는가와 산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는지였다. 결국 앞서 학생들이 폭언을 행사하며 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취조와 고문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 역시 성격이 강직해 답변을 대충 돌려서 하지 않았다. 남편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산 사람들에게 밥은 고사하고 구경도 못 해봤으니 대답할 것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돌아오는 것은 매와 욕설이었다. 경찰들은 장작개비를 그녀의 오금에 끼워놓고 허벅지를 군홧발로 밟았다. "으악" 하며 혼절하자, 찬물을 쏟아 부었다.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장작개비로 온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기를 12일째, 그녀는 완전히 초주검이 되어 정신줄을 놓았다. 경찰들은 덜컥 겁도 나기도 하고 귀찮은 일이 발생할까봐 앞서의 학생들에게 뒤처리를 시켰다.

"이봐 학생들, 이 X 갖다 버려!"
"네."

학생들은 그녀의 팔다리 한 짝씩을 들고 근처 보리밭으로 같다. "에이, 아무런 성과도 없었네"라며 뒤돌아 선 학생들은 학생연맹소속이었다. 이른바 '학연'.

죽창으로 공개학살

학생연맹 소속 학생들이 양춘영을 강제 연행해 가기 며칠 전이었다. 경찰들이 제주도 서귀포군 남원면 신례리에 와서 산 사람들과 협조한 사람들을 찾는다며 집뒤짐 했다. 무슨 정보를 갖고 왔는지 모르지만 타켓은 정순종 집이었다. 결국 정순종의 아버지 정기흡과 동생 정화종이 희생양이 되었다.

이들에게 대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폭행하며 두 부자를 마을 냇가로 끌고 갔다. 정기흡 부자는 냇가 나무에 묶였다. 냇가에는 이미 마을 주민들이 동원되어 있었다. 지서장이 "폭도새끼들한테 협조한 놈들은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겠어"라며 "시작해"라고 지시했다.

경찰이 죽창을 들고 있는 청년들에게 눈짓을 했다. 죽창을 들고 있는 청년들은 눈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죽창은 대나무 끝을 뾰족하게 자른 것도 있지만, 대나무 끝에 칼을 메단 것도 있었다. 청년들은 주저 없이 죽창을 두 부자를 향해 내질렀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눈을 돌리고, 아낙네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정기흡 부자의 모습은 참혹했다. "시체를 가져가는 놈들이 있으면 빨갱이로 알 테니 알아서 해!" 경찰들은 뒤돌아섰다.

양춘영은 졸지에 시아버지와 시숙의 처참한 학살광경을 목격하고 혼절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부축하기만 했지 시신들을 수습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결국 정기흡 부자의 시신은 6개월 후에나 가서 은밀히 수습됐다. 그것도 새벽 2시에 몰래 해야 했다. 정기흡 장남은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 시신을 수습해 인근 목장에 가매장하고 한참 후일에야 이장을 할 수 있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
 

제주 4.3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집단묘역 ⓒ 박만순

 
양춘영의 남편 정순종이 4.3 이후 산 사람들 대열에 합류했거나 무슨 협조를 한 것도 아니었다. 경찰들이 제주도 중산간 마을 청·장년들을 보이는 즉시 학살하자 피신했을 뿐이다. 제주군경은 4.3이 발발하자 해안가에서 5km 이상의 마을은 중산간마을로 규정하고 무조건 해안가로 소개(疏開)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해안가로 이사한다고 해서 생활할 주거공간이 확보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경작할 밭이 없기에 이사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군경은 이런 실정은 외면한 채, 소개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규정하고, 그 사람의 집을 불태워 버리고, 청·장년들은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순종이 마을 사람에게 빚을 갚으려고 출타한 사이에 아내가 지서에 끌려가자, 그는 한라산으로 올라갈 것을 결심했다. 마을에 있다가는 언제 화를 입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찰들의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선무작전에 정순종은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주정공장에 구금된 그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이들은 모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9년 봄이었다. 1년여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순종은 대덕군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경찰들의 살기를 피해다니기에 급급했던 그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최후였다.

음식물 찌꺼기 얻어다 먹어

12일간에 걸친 경찰들의 고문 끝에 보리밭에 버려진 양춘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과 학생연맹 소속 학생들은 그녀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보리밭에 버렸다. 그런데 보리밭을 지나가던 마을사람 눈에 그녀가 눈에 띄었다.

"문현이 엄마 정신 차려봐." 그녀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마을 아낙은 옆집 아줌마를 데리고 와 양춘영을 집으로 업고 왔다. 물을 먹이고 온 몸을 한참 주무르자 정신이 되살아났다. 그제서야 마을 아낙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니 양춘영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옷은 걸레처럼 찢겨나간 것이 보였다. "사람을 어떻게 이리 만들었을까"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시아버지와 시숙은 마을 냇가에서 학살되고 남편은 행방불명된 상황에서 그녀는 참담했지만 기운을 내야했다.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천포에 있는 전분공장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얻어다 먹었다. 양춘영은 주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얻어 오거나 싼 값에 사왔다. 나무 이파리를 뜯어 오기도 하고, 밀기울을 사오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의 어린 아들 정문현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영양실조였다.

당시는 마을에 품팔이 할 일거리도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빨갱이 가족'에게 일거리를 주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 시대였다. 집도 불에 타 없어져 남의 집 담 옆에 임시 움막을 쳤다. 사실 움막이랄 것도 없었다. 담 옆에 나무를 세워놓고 갈대를 씌웠다. 문은 가마니를 걸쳐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임시움막이 날아갔다.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줄줄 새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사실 거지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마냥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양춘영은 나무그릇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떼다가 행상 길에 나섰다. 그녀는 걸어서 서귀포 곳곳의 마을을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한 번 나가면 4박5일 일정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면 아들 정문현은 혼자 지내야 했다.

그는 머리가 굵어지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서 나무 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다. 성산포나 모슬포 시장에 가서 나무를 팔고, 가가호호 방문해서 팔기도 했다. 쥐꼬리만한 돈으로 곡식과 고구마를 사와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군경유족회와 화합 이끌어
  

증언자 정문현 ⓒ 박만순


정문현(75세.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이 2001년 대전에서 있었던 '대전산내사건 합동위령제'에 참가한 후에 유족회 활동 요청이 쇄도했다. 처음에는 남제주군 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6년을 활동한 후에 그는 다시 서귀포시 유족회 회장을 맡아 6년간 활동을 했다. 2013년에는 4·3 도유족회장을 맡았다. 유족회 역사상 처음으로 경선을 치른 선거였다. 그는 2016년까지 도유족회 회장을 하면서 많은 일을 치렀다. 그 중 가장 특이한 것은 군경유족회와의 화합을 이끌어낸 것이다.

2013년 8월 2일 경우회와 '화해상생 선언'을 했고, 이듬해인 2014년 10월 28일 제주에서 있었던 전국체전 때는 경우회 유족회장과 함께 전국체전 개막 최종 성화봉송 주자가 되었다. 둘이 성화를 들고 나란히 운동장 트랙을 돌 때 관중석의 참가자들은 환호와 동시에 박수세례를 보냈다.

그때부터 제주 4·3유족회와 군경유족회는 공동으로 평화순례를 진행했다. 제3땅굴, 판문점, 철원을 갔고, 대전산내현장, 서대문형무소, 인천형무소 터를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 내에서 이렇게 화해분위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수구세력들이 집요하게 제주 4·3 정신을 폄훼했다. 예비역 영관급 장교들이 4.3평화공원 앞에서 '폭도 화형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50년간 남편을 기다린 아내

양춘영은 한국전쟁 이후에 점집을 수시로 다녔다. 남편이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점집에서는 "자네 남편은 살아 있어"라고 점궤를 내놓았다. 그녀는 남편이 꼭 살아 있을 것으로 믿고 50년을 기다렸다.

24세에 지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보리밭에 버려진 양춘영, 그녀는 이제 96세가 되었다. 지금은 제주도의 한 요양원에 몸을 의탁한 상태다. 시아버지와 시숙, 남편이 국가에 의해 학살당한 후 그녀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100세를 앞둔 그녀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을 보상할 수 있을까.
 

12일간 고문을 받은 양춘영 ⓒ 박만순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