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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 5적' 누구인가?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70회]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과 미국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광주 5적'이라 부른다"

등록 2019.12.02 17:53수정 2019.12.0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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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와 5·18을 통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전두환(좌). 1980년 전두환씨의 대장 전역식(우). 12·12와 5·18을 통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전두환(좌). 1980년 전두환씨의 대장 전역식(우). ⓒ 국가기록영상관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정권에서 금제(禁制)의 대상이었다.

광주에서는 유가족ㆍ부상자ㆍ생존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이 처절하게 요구되었지만, 시대적 폭압성으로 좀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5공시기 체제 순응적인 야당이나 언론도 이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못하였다.

1987년 6월항쟁은 광주문제가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극심한 피해자 중의 하나인 김대중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고, 여소야대의 노태우 정권에서 제1야당으로 자리잡으면서 국회에 '광주특위'가 구성되었다.

5ㆍ18당시 31사단장으로 신군부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예편되었던 정웅이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웅 의원은 1988년 7월 5일 국회에서 "광주항쟁은 12ㆍ12사태를 통해 정권의 실세를 장악한 전두환 등 일부 정치군인이 대통령직을 탈취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음모"라고 주장하고, "발포명령은 당시 전남북계엄분소장과 정호용 공수특전사령관이 내린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 폭로는 즉시 '발포명령자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국회에 구성된 5공특위의 활동이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주도로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의 발목잡기로 지지부진할 즈음, 재야와 학생운동그룹이 6월에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위한 범국민 진상조사위원회'(범조위)를 구성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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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 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연합뉴스

 
'범조위'가 발표한 '광주학살책임자' 관련 내용이다.

광주학살 책임자


1. 범국민 진상조사위원회 1, 2, 3조사단 1차 결과에 의한 학살 책임자로서 이후 조사 및 처벌 대상.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전직 대통령) - 광주학살의 총책임자.
노태우 (당시 수경사령관, 현 대통령) - 광주학살의 주범.
정호용 (당시 공수특전사령관, 현 민정당 국회의원) - 광주학살 현장 지휘자.
신우식 (당시 공수특전단 제7여단장) - 광주학살 현장 지휘자.
최웅 (당시 공수특전단 제11여단장, 현 대사) - 광주학살 현장 지휘자.
최세창 (당시 공수특전단 제3여단장, 현 합참의장) - 광주학살 현장 지휘자.
소준열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 - 광주학살 현장 지휘자.
위컴 (당시 한미연합사령관) - 광주학살 지원 공범자.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대사) - 광주학살 지원 공범자.

2. 범국민 진상조사위원회의 1차 조사에 근거하여 학살책임에 대한 죄상의 철저한 규명과 처벌을 이루어내기 위해,

1) 광주학살의 직접 책임자인 전두환, 노태우, 최웅, 최세창, 소준열의 8인에 대한 출국 정지가 단행되어야 한다.
2) 위 8인의 죄상이 명백해지는 즉시 현 공직에서 퇴진하여야 한다.
3) 80년 당시 군지휘체계에 대한 모든 자료를 즉시 공개하여야 한다.
4) 미국의 광주학살 개입부분에 대한 진상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80년 당시 미국 국무성 대사관의 모든 관계 자료가 즉각 공개되어야 한다.
5) 광주학살의 지원 공범자인 위컴과 글라이스틴을 즉각 한국으로 소환 수사하여야 한다. (주석 3)


이에 따르면 광주시민학살의 총책임자는 전두환이고, 주범은 노태우, 현장 지휘자는 정호용ㆍ신우식ㆍ최웅ㆍ최세창ㆍ소준열이고, 지원 공범자는 위컴(당시 한미연합사령관)과 글라이스틴(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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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당시 '화려한 휴가'라는 학살작전을 총지시한 것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육사 11기, 전 대통령)이고 수도경비(방위)사령관 노태우(육사 11기, 현 대통령)는 학살의 병력동원 책임자였다.

노태우는 80년 5월 20일 20사단 사단장 박준병에게 "진지를 동국대로 옮기고 사태에 대비하라"고 지시한 후, 21일 용산역을 거쳐 광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등 학살만행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공수부대 병력을 동원한 특전사령관 정호용(육사 11기, 현 민정당 국회의원)은 전두환ㆍ노태우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후 광주학살 때는 전두환에게 정공법(전차를 앞세워 진압하는 방식)을 건의하고 5월 26일에는 광주에서 제20사단, 제3여단, 제7여단, 제11여단장을 소집, 27일 새벽 4시 학살작전을 직접 지시하였다.

또한 제20사단장 박준병(육사 12기)은 광주에서 직접 시민학살을 담당한 자로 그 공로로 노태우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후, 지금은 민정당 사무총장이 되어 있다.

"진상조사특위명칭에 의거, 민중항쟁으로 쓰려면 진상조사를 할 필요도 없다." "작전 책임없다"(정호용)느니, "광주사태 당시 붉은 기가 나부낀 사실 등을 분명히 조사해 당당히 밝힌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박준병)이라는 등의 망언을 하고 있는 이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과 미국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광주 5적'이라 부른다. (주석 4)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 ⓒ 5.18 기념재단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1994년 5월 13일 결성한 '5ㆍ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는 광주학살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ㆍ노태우를 비롯 35명을 고발했다. 이들은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계엄군 중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이다.

광주진압관련 대대장급 지휘관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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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 5적’ 누구인가? 광주진압관련 대대장급 지휘관 ⓒ 김삼웅

 

주석
3> 「광주민중항쟁진상규명운동」,『흐름』, 1988년 9월 창간호, 46~47쪽.
4> 앞의 책, 48~49쪽.
5> 황석영 외, 앞의 책, 48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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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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