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기울게 한 풍류의 놀이터, 경주 포석정

옛날의 흥은 없지만 호젓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

등록 2019.12.07 18:22수정 2019.12.0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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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 경주에 남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 배남효

  
경주시내에서 언양 방향으로 가는 구도로를 가면 좌측으로 남산이 펼쳐지고, 조금 따라가다 보면  포석정이 나온다. 남산 자락의 숲과 물이 좋아 별궁(別宮)처럼 만들어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야유회를 가서 놀았던 곳이다. 지금은 허름하게 낡아서 역사의 덧없는 자취처럼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 시인 최광유(崔匡裕)가 지은 포석정 진락사(鮑石亭 奏樂詞)라는 시를 보면, 그 당시의 포석정이 상당히 멋있는 명소임을 엿볼 수 있다.
 
기원사 실제사 화려한 두 절 동서로 있고
그 가운데 자리잡고 포석정이 있네
소나무 잣나무 서로 어울려 무성한데
넝쿨은 온통 하늘을 덮었다
머리를 돌려 보는 곳마다 진달래꽃 피어나
짙붉은 웃음이 골짜기에 가득 차고
실안개는 구름처럼 자욱이 빗겨 있구나


祇園實際己兮/ 二寺東西/ 松栢相倚/ 蘿洞中
回首一望兮塢花滿/ 細霧輕雲兮/ 竝朦朧
 
최광유는 경문왕(861-875년) 시대에 당나라로 가서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포석정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포석정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정경인데, 융성했던 신라시대의 화려한 향연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시에 나오는 기원사와 실제사라는 두 절은 지금은 흔적도 없는데, 당시 불교가 왕성했던 만큼 좋은 절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포석정 출입문 포석정으로 들어가는 문이 기와지붕으로 아담하게 되어 있다. ⓒ 배남효

 
현재의 포석정은 화려했던 옛자취는 찾기가 어렵고, 시 외곽의 공원처럼 한적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다. 남산의 서쪽 자락에 터를 잡아 앞에는 넓게 주차장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이 방문하기 편리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포석정을 들어가는 문은 자그마하고 낡은 기와문인데, 옆에는 포석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기와지붕으로 보기 좋게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포석정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적어 놓고 있다.
 
'포석정은 신라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水路)의 길이는 약 22미터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띠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 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 4년(927) 왕이 후백제 견훤(甄萱)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포석정 소나무 포석정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뜰에 키큰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 배남효

 
포석정의 입구인 작은 문을 들어서면 아담하게 펼쳐진 마당에,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원래부터 남산자락에는 남쪽으로 쭉 이어지면서 소나무가 많은데, 포석정 마당에도 소나무가 많아서 유서깊은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정면으로 들어가면 조금 높게 만든 뜰에 커다란 고목이 몇그루 서 있는데, 바로 그 나무 아래에 포석정이 길쭉하게 둥근 모양으로 위치해 있다. 포석정의 물길을 이루는 돌들은 이미 많이 낡아서 초라하게 보이는데, 물길을 구불구불 둥글게 만든 모습에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있다.
 

포석정 큰 나무 아래 포석정의 돌길이 둥글게 위치하고 있다. ⓒ 배남효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으니 물길의 바닥은 바싹 마른 채로 흙이 깔리고, 군데군데 이끼마저 퍼렇게 낀 채 세월이 오래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돌로 만든 물길에 물을 흘리고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의 풍류 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잔을 띄워서 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데, 술잔이 자기 앞에 오면 시를 읊어야 하고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셔야 했다. 아마 지금도 풍류깨나 하는 주당들이 유상곡수연을 하고 싶기도 할텐데, 계곡의 개울에서 비슷하게 해보았으나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포석정은 물길을 좌우로 꺽어지거나 굽이치게 하고, 또 뱅뱅 돌기도 하게 하는 등 아주 오묘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술잔의 모양이나 크기에 따라, 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술잔이 흐르는 시간도 달라져 놀이하는 재미를 더욱 돋구었다. 또 술잔은 포석정의 물길을 따라 구불구불, 느릿느릿, 빠르게, 빙글빙글 돌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흘러가 술마시는 풍류를 한껏 높였다는 것이다.
   

포석정 돌길 돌길이 구불구불 둥글게 이어져 술이 흘러 내려간다. ⓒ 배남효

 
이 역사적 비극이 곁들여져 포석정은 더욱 유명한 명소가 되었는데, 후세 문인들이 이 사연을 담은 시들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선비인 남명 조식(1501~1572년)은 포석정이라는 시를 노래하면서, 신라를 망치게 한 포석정과 군신들을 탓하고 있다.
 
계림이 누렇게 단풍으로 물들었는데
견훤이 신라를 멸망시킨 것은 아니련만
포석정이 스스로 적군을 불러들여
그르쳐 놓은 것을 군신인들 어찌하랴

楓葉鷄林己改柯/ 甄萱不是滅新羅
鮑亭自招宮兵伐/ 到此君臣無計何
 

포석정 돌길 돌길을 둥글게 하면서 높이도 차이를 두어 술이 흐르도록 했다. ⓒ 배남효

 
또 조선시대 문인 최수흥(崔壽興, 1626~1690년)도 포석정 회고라는 시를 남겨, 신라의 옛일을 떠올리며 그 회한을 노래하고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이 잔을 나른 못
맑은 물이 돌에 부딪히며 흘러온다.
천년 옛터가 여기에 있으니
좋은 시절 3월이 돌아왔네.
과객은 전성기를 생각하나
백성은 경애왕을 이야기하네
슬픈 마음에 오릉을 뒤로 하니
허물어진 누대와 연못이로구나

曲水傳觴池/ 淸流激石來/ 千年遺跡在/ 佳節暮春廻/
過客思全盛/ 居民說景哀/ 傷心五陵北/ 蕪沒舊池臺
 
 

포석정 화려한 옛영화는 찾을 수 없고 낡은 돌길만 남아 있다 ⓒ 배남효

 
포석정 뒤로는 나무를 많이 심어 정원같이 조성되어 있어, 혼자서 산책을 하면서 호젓하게 즐길 수 있다. 평소에 방문객이 많지 않아 조용히 산책하면서 신라의 옛영화를 떠올리며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어 좋다.

돌이켜보면 그 옛날 이 한가한 곳에서 시끌벅적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남은 흔적이라고는 낡은 화강암 물길뿐이니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앉아 포석정을 바라보노라니 귓가에는 풍악 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유상곡수의 화려한 연회도, 경애왕의 비명 참사도 지나간 역사의 덧없는 사연일 뿐, 이제는 다 낡아 초라해진 포석정은 무심하게 방문객을 맞이할 뿐이다.
#포석정 #신라 #경주 #남산 #유상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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