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우리는 왜 말이 통하지 않는가

[이런 장면⑤] '괜찮아'의 행간과 '피똥'

등록 2019.12.05 15:09수정 2019.12.05 15:44
1
원고료로 응원
 

소통 불가능 ⓒ 픽사베이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휴지가 없을 때 그 곤혹감은 말로 못한다. 온갖 방법을 강구하다 화장지의 소중함을 깨닫듯 부재는 존재의 가치를 드러낸다. 

언어의 진가는 이민이든 여행이든 타국 생활을 할 때 비로소 보인다. 의사 전달의 기본 수단인 언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니 삶의 수준이 훅 떨어진다. 최근 대장균 검출로 캘리포니아산 로메인을 전격 회수한다는 보도를 읽지 못한 캐나다 이민자가 그것을 먹고 속칭 '피똥'을 쌌다는 소릴 들었다. 이미 구입한 경우 즉각 환불하라는 당국 주의를 알아 듣지 못해서다.

정책, 법률, 공문, 뉴스, 약관 등 권리 장전을 위한 필수 매뉴얼 뿐 아니라 제품 설명에서 광고 '찌라시'까지 사방이 언어로 이뤄져 있다. 정보 파악 능력에 따라 기회의 양이 결정되니 이방인이 누리는 사회적 권리와 혜택은 딱 언어능력 만큼이다. 외국어로 동봉된 사회 매뉴얼로 일상을 조립하려니 휴지 없이 화장실에 들어간 기분이다. 서툰 언어능력으론 똘똘한 시민이 되기도, 현명한 소비자가 되기도 어려우니 언어가 곧 권력이다. 사회의 권리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으니 이들은 '언어소수자'라. 소수자에게 사회참여는 높은 산이다.

그렇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모든 계급이 사회가 제공하는 매뉴얼을 동등한 수준으로 숙지할까.

한 지인이 커피를 마시겠냐 묻길래 "괜찮다"며 거절했던 일이 있다. 그런데 그가 기어코 커피를 사왔다. 괜찮은데 왜 사왔냐 물었더니 괜찮대서 사왔단다. '생각 없다'는 의미가 '좋다'는 의미로 바뀐거다. 무난하다. 그럴듯 하다. 보통 이상이다. 상관없다. 낫다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괜찮다'는 앞뒤 문맥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은 '괜찮아'의 행간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good을 좋다는 의미로만 달달 외운 이방인이 승낙을 목적으로 I'm good(거절)라 말하는 언어적 상황과 다르지 않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왜 말이 통하지 않았는가.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는 불화를 "하얗다고 말하는 사람과 검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하얗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 하지만 같은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또는 상대방이 하양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라 규정했다. 


"괜찮아"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이가 뉴스를 읽는다면 어떨까. 세계의 창이라는 뉴스의 재료 역시 언어다. 읽는 이의 어휘력에 따라 뉴스의 의미는 '괜찮아'의 사례처럼 엉뚱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의도로 세계를 읽은 사람들끼리 같은 사안을 논해봤자 불화만 커진다. 가짜뉴스라 불리는 허위조작정보 역시 심각한 문제이긴 하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언어소수자'들을 이방인으로 낙인찍고 은근히 무시하며 배제해 왔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괜찮아"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이가 최고 권력을 쥐었을 때 소수자부터 이방인 신분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방치는 불통사회를 견고하게 만든다.

태극기 부대의 집회나 전광훈씨의 목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누군가의 아버지거나 어머니다. 세계는 4차 산업, 에너지 전환을 외치며 빠르게 전환되는데 아버지의 언어는 냉전시대 습득한 게 전부라면? 그에겐 탈원전을 외치는 진보세력도 '빨갱이'다.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개인의 구체적 개별성은 복잡한 사회 문제를 그대로 압축한다.

언어에 서툰 이들에게 사회는 해석 불가능한 매뉴얼 투성이다. '대장균 로메인' 경고를 읽을 줄 아는 이는 제 몸을 지키지만, 읽지 못한 이는 '피똥'을 면치 못한다. 문제는 '언어소수자'는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메인)가 무엇인지 인식 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물건을 천진하게 입에 넣는 갓난아이와 자기권리를 박탈 할 이에게 투표권을 행사하는 어른은 다른가.

'괜찮아'의 행간을 읽어 '피똥'을 면하게 하려면 사회는 어떤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가. '괜찮아'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이들의 권력은 어떻게 회수해야 하는가. 통하는 사회를 위한 숙제가 총선 앞에 놓여 있다.
 
#언어 소수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3. 3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