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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주도자 전봉준이냐 김개남이냐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3회] 동학혁명 100주년에 즈음하여 1995년 3월 그의 생가터에 '김개남장군비'가 세워졌다

등록 2019.12.14 15:38수정 2019.12.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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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한 연구자는 동학혁명의 주도자가 "전봉준이냐 김개남이냐"를 분석한다.

- 김개남 주도로 보이는 점

1. 재력이 있어 활동 반경이 넓고 일가 친척을 많이 끌어들인 점.
2. 전봉준보다 두 살 위의 의형이라 주도적 입장이었다는 점.
3. 부친 구출 위해 찾아온 전봉준을 이용, 통문을 써주며 혁명으로 이끌어간 점.
4. 전주감영의 전 영장 김시풍(金時豊) 족속을 활용, 감영의 현직 영장 이하 장교까지 끌어들여 참수당하게 한 점.
5. 김개남의 주도로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지금실 김개남의 마을에서 녹두장군이라 호칭한 점.
6. 동학에 23세에 가입, 대접주가 먼저되어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ㆍ김덕명ㆍ김락철ㆍ최경선ㆍ동학교인들을 끌어들이고 동학교리 4대 강령으로 동학을 만든 점.
7. 조병갑이 곡식을 수탈하여 쌓아 놓은 백산에 동학군의 본영을 정하여 구축한 점.
8. 혁명을 남쪽에서부터 열어간다고 개남이라 호를 지은 점.
9. 전주성을 김개남이 먼저 점령한 점.
10. 체포되어 압송시 백성들이 너무 많이 따라붙어 위기를 느낀 관군이 한양으로 압송하지 못하고 전주 초록바위에서 효수한 점.
11. 한양에서 효수된 전봉준의 머리도 가족에게 보냈는데 전봉준과 쌍벽을 이룬 김개남은 더욱 거물이라 농민의 재발이 두려워 전주에서 효수된 머리도 돌려주지 않은 점.
12. 남원에서 집강을 제일 뚜렷하게 잘한 점.
13. 개남장의 자택에서 해월 최시형 교주가 1주일간 체류하였고 개남장의 집에는 천도교에도 없는 귀중한 최시형ㆍ손병희 두 교주의 영정을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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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가는 전봉준의 모습 ⓒ .

 
- 전봉준 주도로 보이는 점

1. 전봉준 부친의 상소문 사건으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이 시발된 점.
2. 이 사건으로 고부농민들이 농민봉기에 참가를 많이 한 점.
3. 사발통문에 전봉준 장군을 선봉장이라 앞에 쓴 것.
4. 혁명 당시 전봉준을 대장이라 호칭한 점.
5. 전주성에 개선장군같이 동학농민군의 호위 속에 입성하여 신화당 전라감사 집무실에서 동학농민군을 지휘하고 이때 백성들이 빈농출신이 전라감사 자리에 앉았다고 녹두장군이라고 지칭한 점.
6. 전주화약 주도
7. 남ㆍ북접 삼례대회 주최.
8. 북진 때 남ㆍ북접 통솔자로 동도대장이 된 점. (주석 1)


동학혁명 100주년에 즈음하여 1995년 3월 그의 생가터에 '김개남장군비'가 세워졌다. 다음은 비문의 중간 부분이다.

김개남 장군 비문

1894년 3월 '광제창생ㆍ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려 일어나니 그 횃불이 삼천리강산에 타올랐으며, 의기는 하늘에 뻗쳤고, 함성은 산하를 울렸다. 장군은 전봉준ㆍ손화중과 함께 3대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백산 황토제 황룡강에서 무도한 자들이 보내는 군대를 여지없이 무찌르고 이어 호남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장군은 청과 일본의 군대가 개입하는 절박한 정세에서만 부득이 관군과 화해하고 남원에 웅거, 전라좌도를 호령했다.
 
장군은 그 해 6월부터 10월까지 남원에서 무도한 벼슬아치와 양반토호를 징치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어주었다. 벼슬아치들은 벌벌 떨고 민중들은 춤을 추었도다. 이때 장군은 조선을 남쪽에서부터 개벽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개남(開南)으로 바꾸니, 그의 신념은 차돌 같고 그의 용기는 하늘에 뻗쳤다.
 
일본 침략자들이 다시 동학농민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자 전봉준 장군은 공주로, 김개남 장군은 청주로 짓처 올라가니 민중은 삼만 대군의 저 눈빛을 보고 함성을 질렀도다. 두 장군은 침략자들의 대포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뿌리고 발길을 돌리니, 우리 민족은 다시 깊은 수렁에 빠졌구나. 장군은 종성리(산내면 종성리)에서 무도한 자들에게 잡혀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하니 때는 1894년 12월 3일이었다.
 
이 어이할꼬? 이날 하늘도 찡그리고 강산도 울었으리, 장군의 유체는 효시되고, 또 참혹하게 버려진 바 거두는 사람도 없었다. 겨우 아내와 아들이 살아남아 숨을 죽이며 옛 일을 아련히 전해 주었다.


주석
1> 김기전, 『다시 쓰는 동학농민혁명사』, 189~190쪽, 광명, 2004.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전봉준 #김개남장군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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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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