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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등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영향받아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4회] 이들의 거사에, 그리고 동학도와 농어민을 혁명군으로 이끄는 이념적 지침이 되었다

등록 2019.12.15 17:06수정 2019.12.1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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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동상 책을 읽고 있는 다산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평생에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 박태상

김개남과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는 조선후기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 수준의 지도자가 아니라 사상과 철학을 갖춘 경세적 혁명가였다.

정신적으로는 다산 정약용의 개혁사상에 영향받은 바 컸다. 특히 다산의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이들의 거사에, 그리고 동학도와 농어민을 혁명군으로 이끄는 이념적 지침이 되었다.
 
다산은 책의 서문에서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를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면서 저작의 목적을 "우리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뜻"이라고 썼다.
 
우리나라 실학의 집대성자로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는 다산이 그의 노작을 말하면서 내세웠던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중에서도 제일 먼저 꼽을 만큼 다산의 방대한 저술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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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다산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흠흠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더불어 다산의 '일표이서' 중 하나이다. ⓒ 김병현

 
『경세유표』는 국가 전체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쓴 것으로 우리나라의 현실적 사정을 염두에 두며 구체적으로 설계한 이상적 국가형태를 담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인습에 인습을 더해온 당시의 현실 정치구조는 어느 것 하나 병들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한두 가지 개선책 정도로는 어느 한 병통도 개선되기 어려워 보였다.(…) '충신과 지사가 팔짱을 낀 채 방관하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저술하게 된 『경세유표』는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안으로서 실학의 국가개혁론으로는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근대 역사를 총체적으로 집약해둔 원천적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주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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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을 쏟아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가까운 책을 지었다 다산은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을 쏟아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가까운 책을 지었다 ⓒ 다산연구소

 
일제강점기 정약용의 사상을 연구한 독립운동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최익한은 『동아일보』에 「여유당 전서를 독함」을 1938년 12월 9일부터 1939년 6월 14일까지 연재하고, 해방 후 북한(1946년)에서 이를 바탕으로 『실학파와 정다산』으로 엮어냈다.

초기 다산 연구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저술이다. 최익한은 『강진읍지(康津邑誌)』의「명승초의전(名僧草衣傳)」을 인용하여 동학 수뇌부가 거사를 앞두고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을 이용하였다고 밝힌다.

 ……초의(草衣)는 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교(道交)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제작하여 그의 문생 이청(李晴)과 친승(親僧)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를 당한 남상교(南尙敎), 남종삼(南鍾三) 부자와 홍봉주(洪鳳周) 일파에게 전해졌으며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尹世煥), 윤세현(尹世顯), 김병태(金炳泰), 강운백(姜雲伯) 등과 해남의 주정호(朱挺浩), 김도일(金道一)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起兵)한 전녹두(全綠豆) 김개남(金介男) 일파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는데 전쟁 끝에 관군은 다산 비결이 녹두 일파의 '비적(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ㆍ백련사ㆍ대둔사 등 사찰을 검색한 일까지 있었다. (주석 3)

중국의 모택동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모든 혁명이야말로 '종이(紙上) 위에서' 이루어진다. 풀브라이트가 『지상혁명론(紙上革命論)』에서 말한 "일체의 혁명이 이론서 위에서 출발했다"라는 주창은 반격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속한다.
 
대부분의 근대혁명은 총칼 등 무기로 진행되었지만 혁명의 씨앗은 '혁명서'라는 종이에서부터 출발한다. 여러 나라의 주요 혁명이 그랬다. 세계사를 바꾼 대혁명의 배경에는 반드시 혁명의 당위성을 제시하는 이론서나 이를 촉발시키는, 여러 가지 형태의 혁명을 부추기는 글이 있었다. 체계적인 논설일 때도 있고, 팜플랫의 쉬운 내용, 혹은 연극대본일 경우도 있었다.  
 

동학혁명 상상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세계적인 혁명을 부채질(?)한 대표적인 혁명서(革命書)를 찾아본다.

프랑스혁명은 보마르세의 『피가로의 결혼』과 존 록크의 『시민정부론』, 미국혁명은 토마스 페인의 『상식』과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러시아혁명은 마르크스ㆍ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중국혁명은 손문의 『삼민주의』와 모택동의 『상강평론』, 『공산당선언』, 한국의 4월혁명은 장준하의 『사상계』가 큰 역할을 하였다.

1894년의 동학혁명은 조선 사회의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일본을 포함한 서구열강의 침투를 지켜보면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비롯해 실학관련 저술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예리한 시각으로 시대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저술을 남겼다.


주석
2> 정약용 지음, 이익성 옮김, 『경세유표』, 뒷표지, 한길사, 1997.
3> 최익한 지음, 송찬섭 엮음, 『실학파와 정다산』, 500쪽, 서해문집, 2011.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정약용 #경세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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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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