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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

[서평] 권김현영 지음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등록 2019.12.21 11:53수정 2019.12.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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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내가 아는 몇몇 선생님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한다.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다. 연구라는 활동을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게 이해하기에 내게 '연구'는 실험실이나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정적인 행위로 다가왔다. 활동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구'도 하는 '활동가'라는 뜻일까. 하지만 나에게 이론을 만드는 연구와 사회운동을 뜻하는 활동은 철저히 분리된 분야였다. 연구자들은 대학원에 활동가들은 단체의 사무실에 있는 존재였다. 물론 교수가 시위에서 발언을 할 수도 있고 활동가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각자의 정해진 자리와 주된 정체성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의 저자 권김현영 역시도 스스로를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라고 소개한다. 나는 스무 살 때 저자를 대학의 여성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사석에서 저자를 만나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연구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아니고 그게 편해서 그렇다.

어쨌든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저자는 계속 '선생님' 혹은 '강사님'으로서 여러 강단에 서왔고 연구자로서 학술행사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토론회, 집회와 시위 현장, 재판장의 방청석에도 함께 했다. 그리고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공동저자로 참여해 책을 출판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연구자-활동가'의 경계가 없는 저자의 행보가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구활동가'라는 단어가 이상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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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겉표지. ⓒ 휴머니스트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의 서문에서 권김현영은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페미니스트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사람, 알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 올바름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첨언을 하자면 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이러한 '페미니스트'의 일은 고된 노동이다. 보편적이라 간주되는 사회의 인식과 이들의 경험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에 쓴 것처럼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 년 안팎의 일'이다. 그전까지 가정폭력은 '아내 교육', 직장 내 성희롱은 '친밀감의 표시'로 여겨져 왔다. 즉 여성의 경험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언어가 아예 없었다.

때문에 소수자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언어를 알고 가지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주장과 생각을 질문하고 비판하며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일은 단순히 연구 혹은 활동, 둘 중 하나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가 불가능하다. 새로운 인식을 통해 소수자의 경험이 드러나고 정확히 해석되는 순간 이미 운동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회운동이란 이미 존재하는 '폭력', '차별', '혐오'를 공동체가 인정하도록 만드는 치열한 설득의 과정이다. 그 순간에 변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많은 경우 남성들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한다'가 아니라 '성차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의 재구성, 경험의 새로운 해석은 치열한 연구를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그 자체로 사회를 움직이는 활동이기도 하다. '연구활동가'는 결코 모순적인 표현이 아닌 셈이다. 책에 실린 저자의 다음 문장이 이른 탁월하게 드러낸다.

"비판적 태도란 예속되지 않으려는 의지 그 자체이자 자유로서의 앎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분석의 매 순간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식이 무엇이며, 이것을 지식으로 만드는 권력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알고자 하는 용기'는 페미니즘 지식에서 필수적이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를 읽어야 할 이유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는 90년대 반성폭력 운동과 'OO녀'의 태동부터 메갈리아에 이르기까지, 가히 역사를 기록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광범위한 시간 속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룬다. 시간대뿐이랴. 청소년 참정권과 성소수자 차별, 사이버 성폭력 등 한 권에 담기 어려운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책이 다루는 분야 역시도 폭넓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만 쓰면 행여 책이 산만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작업, 비판적 분석을 일관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통념이 가진 맹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가린 부정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이를 명확하게 파악할 해석을 덧댄다. 그래서 다루는 역사·주제·분야가 다양한 것은 오히려 장점이 된다. 한 권의 책이 이토록 폭넓은 영감과 통찰을 전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을 만나기 전, 한동안 글쓰기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유독 소수자에게 세차고 황량한 세상과 개인을 압도하여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폭력 속에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무력한 일처럼 느껴졌다. 마감에 쫓겨 억지로 글을 쓰면 '생활비나 벌자고 하는 일이지'라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또한 한편에서는 여성주의의 효용은 이미 다했으며 페미니즘의 시대는 끝났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드러낸 현실을 코앞에 밀어도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토론과 설득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암담함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이 전하는 용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는 내게 다른 답을 주었다. 이 책은 모범적이고 탁월한 페미니즘 도서이자 동시에 아직까지 글쓰기에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 그 자체다.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사회를 직면하고, 그렇게 얻어낸 앎을 종이로 옮기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사회운동이며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목처럼 이 책을 모두 읽고 제대로 이해한 독자라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글이 무언가를 해낸 것이다.

나는 여전히 세상이 지긋지긋하여 더 볼 것도 없다고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이상과 목표는 내다버리고 무기력한 반항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는 그런 내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사유하고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맑은 정신으로 치열하고 탁월하게 바라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독려한다. 나는 내가 전달받은 그러한 용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사족.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는 책의 제목이자 동시에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글에서 저자는 비판적 사고와 통찰의 대상에서 스스로가 제외될 수 없음을, 치열한 성찰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만들 능력을 가질 수 없음을 확실히 한다. 그 글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책을 꼭 사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은이),
휴머니스트, 2019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권김현영 #페미니즘 #여성주의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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