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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관에 들어온 수상한 세입자의 정체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 ①

등록 2020.01.23 15:35수정 2020.01.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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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어린이도서관'은 얼마나 있을까?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에는 102개 어린이도서관이 있다. 2018년 현재 전국 1096개 공공도서관의 9.2%가 어린이도서관인 셈이다.

어린이도서관이 이렇게 늘어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도서관이 태부족하던 시절, 어린이를 위한 전문 도서관은 꿈도 꾸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어린이도서관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개관식 1979년 5월 4일 시립아동병원 자리에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지금의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사진에 보이는 2층 짜리 건물이 지금의 어린이도서관 ‘문화관’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은 어느 곳일까? <개똥이네 집>에 '어린이와 도서관'을 연재한 울산 매곡도서관 최진욱 사서에 의하면, 1924년 12월 20일 명진소년회가 경성부 연건동에 개관한 '아동도서관'이다. 1924년 10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명진소년회에 도서관 부지를 제공한 이는 종로4정목에 사는 '전형필'(全鎣弼)이다.

우리 문화재를 되찾고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과 이름이 같지만 간송인지는 확실치 않다. 1906년생인 간송은 '종로4정목'인 종로4가 112번지에서 태어났다. 간송은 1926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스물세 살 때인 1929년경 간송은 재산을 물려받아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간송이 물려받은 재산은 논만 800만 평이 넘었다.

어릴 때부터 책에 관심이 많았던 간송은 휘문고보 시절인 1922년 '옥정연재'(玉井硏齋)라는 서재를 따로 만들었다. 1932년 무렵에는 고서화와 옛책 수집을 위해 인사동에 있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했다. 명진소년회 아동도서관이 문을 연 1924년은 간송의 나이 열여덟 무렵이다. 재산을 물려받기 전인 이때 그가 아동도서관 부지를 제공한 걸까.

명진소년회가 문을 연 아동도서관은 규모가 적지 않았다. 1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좌석에 500여 권의 책을 갖췄다. 일제 강점기 선구적으로 문을 연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은 어느 시점부터 명맥이 끊겼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어린이도서관 중 가장 오래된 곳은 어디일까?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이 바로 그곳이다.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은 원래 '시립아동병원'(지금의 서울시립어린이병원)이었다. 1978년 5월 시립아동병원이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서울시는 건물 활용을 검토했다. 검토 끝에 서울시는 아동병원 건물을 어린이 전문 도서관으로 재단장하기로 했다. 세계 아동의 해인 1979년 5월 4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어린이도서관의 '수상한' 이웃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는 김현옥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재임 당시 김현옥은 ’불도저’로 불리며 서울 곳곳을 공사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터지자 김현옥은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1971년 10월 7일 김현옥은 내무부장관이 되면서 중앙정부에 복귀했다. ⓒ 국가기록원

 
1983년 7월 서울시는 어린이도서관 증축 명목으로 예산을 지출했다. 당시 어린이도서관 입구에는 2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서울시 예산으로 3층으로 증축한 이 건물은 예산 명목과 달리, 어린이도서관으로 쓰이지 않았다.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은 건물을 증축한 다음 청와대 지시로 묘한 '세입자'를 받았다. 도서관 건물 하나에 자리 잡았지만 도통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세입자였다. 이 세입자는 훗날 '사직동팀'으로 알려진 비밀경찰 조직이었다. 사직동팀은 어린이도서관 건물 하나를 꿰차고, 장장 18년 동안 '안가'로 사용했다.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출범을 앞두고 보수언론은 공수처를 '사직동팀'에 비유했다. 이 과정에서 사직동팀에 대한 추억이 '소환'되기도 했다. 어린이도서관을 안가로 사용한 '사직동팀'은 어떤 조직일까? 

사직동팀의 역사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내무부장관 김현옥은 치안국장 정석모에게 '미국의 연방수사국(FBI) 같은 조직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서울시장 시절 '불도저'라고 불린 김현옥이지만, 김현옥 개인의 판단이 아닌 박정희 정권 수뇌부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지시에 따라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치안국'은 수사지도과 아래 '특별수사대'(특수대)를 만들었다. 치안국 특별수사대는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기업인에 대한 특수 수사를 담당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치안국 특수대는 법적 근거 없이 '내무부 훈령'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초법적' 존재로 군림했다.

미국 '연방수사국'도 정치인과 고위 관료에 대한 개인 파일을 확보하고 있지만, 미국 대통령도 연방수사국 자료를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 열람하고 싶을 땐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열람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기록뿐 아니라 열람한 자료는 백악관 문서보관소에 넘기도록 하고 있다.

일본에는 총리 직속으로 '내각정보조사실'이 있다. 경찰과 자위대, 외무성에서 파견된 인원이 주로 해외 정보를 조사해서 총리에게 보고한다.

초법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사직동팀은 미국 연방수사국이나 일본 내각정보조사실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이다. 출발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지향한다고 했으나 독일 나치의 게슈타포(Gestapo) 같은 '비밀경찰'로 커버린 조직이 사직동팀 아니었을까.

비밀경찰의 뿌리, 일제의 '특별고등경찰'
 

김종필 총리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악수하는 정석모 치안국장 정석모는 1971년 12월 16일부터 1973년 1월 16일까지 치안국장을 지냈다. 비밀경찰 조직 ‘사직동팀’은 정석모 치안국장 시절 출범했다. 정석모는 강원도지사, 충남도지사, 내무부차관을 거쳐 197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선 의원이었던 정석모의 지역구에 2000년 그의 아들이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현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정석모의 아들이다. ⓒ 국가기록원

 
우리 역사에서 '비밀경찰'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일제는 1911년 '특별고등경찰제'를 도입해서 1945년 패전 때까지 운영했다. 3.1 운동 후에는 전국의 경찰서에 '고등경찰계'를 두었다.

'특고' 또는 '고등경찰'이라 불린 이들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고문을 자행했다. 조선의 언론·출판물을 통제하고, 사상 및 정치 활동을 사찰했다. 윤동주와 그의 친구 송몽규도 일본 유학 시절 '특고'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해방 후 경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 훨씬 빨리 출범했다. 1945년 10월 21일 출범한 경찰은 일제 경찰 조직과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미군정은 경감급 이상 100%, 경위급 75%를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해방 후 경무국 수사국장이었다. 양심적인 경찰로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친일 및 부패 경찰 청산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최능진은 오히려 파면을 당했다.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고문하던 경찰의 '정보 활동'은 좌익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칼을 찬 순사, 경찰은 '개나리'라고 불렸다. 경찰 앞에서는 다들 "나리, 나리" 하지만 뒤에서는 "개자식"이라고 욕을 해댔기 때문이다. '개나리' 경찰은 한국전쟁 후 '산골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경찰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던지,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이 이렇게 탄식할 정도였다.

"경찰이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이 한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찰의 반공·방첩 활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승만 정부 때 경찰은 불법선거를 진두지휘하며, 관료와 함께 정권 유지의 양대 축 역할을 했다. 4.19 혁명 때도 시민을 향해 발포한 것은 '군'이 아닌 '경찰'이었다.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에 비밀경찰 조직이 '부활'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일제가 특별고등경찰을 도입한 것처럼, 박정희는 유신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비밀경찰을 부활시켰다. 박정희는 '비밀경찰'뿐 아니라 '전투경찰'도 되살렸다. 이승만 때 만들었다가 폐지한 전투경찰은 1970년 12월 24일 '전투경찰대설치법'을 통해 부활했다.

대간첩 작전용으로 부활한 전투경찰은 집회와 시위를 막고 진압하는 데 동원됐다. 전투경찰은 '간첩'보다 '시민'과 전투하는 용도로 쓰이며, 체제 유지를 위해 기능했다. 군인을 차출해서 만든 전투경찰은 '경찰'이 아닌 '군인' 신분이다. 한홍구 교수의 지적처럼, 대한민국은 계엄 아닌 상황에서 군인을 전투경찰이라는 이름으로 치안에 투입한 유일한 나라였다.

1974년 박정희는 내무부 치안국을 '치안본부'로 승격시켰다. 유신 체제는 온 나라를 병영화하며 '병영국가'로 치닫았다. 동시에 남한은 '경찰국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병영의 사령관과 경찰 총수는 박정희였다.

'사직동팀'을 비롯한 비밀경찰 조직 외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를 통해 온 나라를 감시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사설 정보대'까지 따로 운영했다. 박정희 직할 정보대의 책임자는 이규광이었다. 이규광은 10.26 직전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처삼촌이다. 대한민국은 '1984년' 이전에 이미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치안국 특별수사대로 출발한 사직동팀
 

김치열 내무부장관 1976년 특수수사대가 논란을 일으키자 내무부장관 김치열은 특수수사대를 2개 조직으로 나눴다. 김치열은 내무부장관에 이어 법무부장관으로 재임했다. 법무부장관 시절 그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후임 인사로도 거론됐다. 1970년에는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머릿돌에 김치열의 이름이 새겨진 이유는 그가 내무부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 건물을 ‘발주’했기 때문이다. ⓒ 국가기록원

 
1976년 4월 치안본부 특별수사대의 막강한 권력 행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경찰을 지휘하던 김치열 내무부장관은 특별수사대 조직을 청와대 특명 사건을 맡는 '특수1대'와 경찰 자체의 기획 수사를 맡는 '특수2대'로 나눴다. 조직을 나눈 후 특수1대와 특수2대는 치안본부를 떠나 태평로와 신길동에 각각 사무실을 구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치열은 1975년 여덟 명을 사형시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검찰총장이었다. 김치열 내무부장관 시절인 1976년, 치안본부는 공사를 하나 발주했다. 1976년 10월 2일 완공된 이 건물은 당시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달고 있었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다. 

1987년 1월 14일 이곳에서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숨졌다. 당시에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렸다. 건축가는 김수근이다. 고문에 특화된 남영동 대공분실에 만족해서일까. 경찰은 1983년 치안본부 청사(지금의 경찰청사) 설계도 김수근에게 맡겼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자 치안본부 특수1대와 2대는 '합동수사본부(합수부) 5국'으로 통합됐다. 통합 이후 특수대는 김종필, 이후락 같은 정치인과 10.27 법난 때 승려에 대한 고문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활동하던 '특수1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1981년이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부친(김종희 회장) 부탁으로 맹인 지압사를 '고문'한 사건이 폭로되면서다.

전두환 신군부 시절인 1983년 3월 22일에는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당시 치안본부 특수1대는 한일합섬 비업무용 토지 부정 매입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리 담당 이사 김근조씨를 고문해서 뇌출혈로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근조씨는 '특수1대'에게 연행되어 부산의 한 여관으로 끌려갔다.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근조씨는 속옷 차림으로 얼굴과 가슴, 목덜미, 발바닥 같은 부위를 수차례 폭행당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는 부산대학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출혈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폭행을 가한 경찰은 병원 이송 후 의사에게 폭행이 아닌 약물 복용에 의한 실신이라고 설명했다. 폭행을 가한 '특수1대' 경찰은 구속되었지만 김근조씨는 3월 25일 끝내 숨졌다.

그들이 '사직동팀'이라 불린 이유
 

청와대 청와대는 비밀경찰 조직인 ‘사직동팀’을 직접 지휘했다. 법무비서관을 통해 이른바 ’하명수사’ 조직으로 사직동팀을 운영한 것이다. 사직동팀은 청와대 지시로 움직이며 그 수사 내용을 청와대에 직접 보고했다. ⓒ 백창민

 
김근조씨 가족은 경남 양산군 동면 내송리 출신이다. 1987년 1월 14일 경찰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군의 어머니 정차순씨와 동향이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김근조씨와 박종철군 가족은 경찰 고문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잃었다.

김근조씨 사건뿐 아니라 치안본부 '특수1대'는 정치인과 경제인, 언론인을 불법 연행해서 감금하고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마구잡이로 먼지털이식 강압 수사를 자행한 것이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치안본부 특별수사대는 '특수1대∙2대'에서 '수사1대∙2대', '조사과'와 '수사3계'로 계속 이름을 바꿨다. 1983년 서울시가 위장 예산으로 사직동 어린이도서관 건물을 증축하자, 특수1대는 어린이도서관 건물에 '입주'했다. 이때부터 '특수1대'는 '사직동팀'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신길동에 사무실을 둔 '특수2대'는 '신길동팀'으로 불렸다.

사직동팀이 사용한 건물 부지는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 소유였다가, 사직동팀은 이 땅을 1983년부터 무상 임대해서 사용했다. 이곳이 문화재관리국 부지인 이유는 '사직단'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화재관리국 땅에, 서울시가 위장 지출한 예산으로 건물을 올려, 치안본부가 파견한 경찰 조직을, 청와대가 직접 지휘했다. 시민 세금으로 시민을 사찰하고 고문하는 조직을 운영한 것이다.

청와대 특명 사건을 전담한 '사직동팀'은 '청와대 특명반'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직동팀은 2급 이상 공직자 비리와 청와대가 지시하는 하명 사건을 전담했다.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조사과'로 알려졌지만, 청와대의 지휘를 받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청와대 '별동수사대'로 기능했다.

경찰 총수도 모르는 '비밀경찰'
 

경찰청사 경찰청은 내무부 치안국과 치안본부를 거쳐 경찰청으로 승격했다. 사직동팀은 전원 경찰이고 예산도 경찰 예산을 사용했지만, 경찰 총수조차 그들의 수사와 활동 내용을 알지 못했다. 경찰청사는 치안본부 시절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 백창민

 
사직동팀은 치안본부 형사국 소속이지만, 형사국장은 물론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조차 그들이 어떤 수사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치안본부 예산에서 월급과 비용을 지출하고 전원 경찰이지만, 경찰의 지휘 계통에서 벗어난 조직이 바로 사직동팀이었다.

사직동팀은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경찰 중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40~50명을 선발해 운영했다. 최정예 수사 요원으로 구성된 사직동팀은 대한민국에서 정보와 내사 분야의 가장 뛰어난 팀이었다. 사직동팀은 쥐도 새도 모르게 수사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조사 대상자도 자신이 수사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사직동팀은 미행과 감청, 영장 없는 계좌추적 같은 불법 수사 활동을 벌였다. 사직동팀 하면 흔히 사생활 침해, 부당한 조사, 비선 수사기구, 불법적 운용, 무소불위의 초법적 존재 같은 표현이 따라다녔다.

사직동팀이 '치안본부 조사과'를 표방했기 때문에, 수장은 경찰서장급인 조사과장이었다. 1997년 정권 교체 전까지는 단 한 번도 호남 출신이 사직동팀 조사과장에 임명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호남 출신이 조사과장이 되자, 정권에 따라 책임자가 TK(대구경북)-PK(부산경남)-MK(목포광주)로 바뀐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1990년대 후반 사직동팀은 30명 내외였다. 외부 수사를 맡는 부서는 6개 반이었다. 내부에는 기획반과 서무반을 따로 뒀다. 1999년 6월 시점엔 총경인 조사과장 아래 경정 1명, 경감 3명, 경위 17명, 경사 4명이 사직동팀으로 움직였다.

사직동팀에는 3공화국 시절부터 경찰뿐 아니라 은행감독원과 증권감독원의 공직자 자금추적반 4개 팀이 상주했다. 청와대가 내사할 인물의 주민등록번호와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자금추적반이 움직였다. 자금추적반은 시중 은행전산실 통해 비자금을 추적하고 이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사직동팀은 내사 벌인 결과를 중요도에 따라 A~D 등급으로 나눠 청와대 사정비서관에게 보고했다. 사정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사안에 따라 덮거나 검찰이나 경찰에 넘겨 공식 수사를 진행했다. 각종 뇌물과 부정비리 사건이 사직동팀 내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또 하나의 비밀수사 조직 '신길동팀'
 

신길동팀이 있던 자리 ‘사직동팀’과 ‘신길동팀’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일란성쌍생아 같은 비밀경찰이다. 신길동팀이 있던 공간은 경찰수사연수원을 거쳐, 영등포 청소년문화의 집으로 바뀌었다. ⓒ 백창민

 
특수1대인 '사직동팀'이 더 유명(?)했으나 특수2대인 '신길동팀'도 만만치 않았다. 신길동팀은 '신길산업'이라는 위장 간판을 내걸고 활동했다.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수사를 담당한 부서가 바로 신길동팀이다. 당시 신길동팀은 5개 반 20여 명의 경찰로 팀을 구성해 수사를 진행했다.

박종철군의 부검은 사망 하루 후인 1월 15일 밤 8시 한양대학교 병원에서 이뤄졌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황적준 법의1과장이 부검을 집도했다. 경찰 수뇌부는 국과수 황적준 부검의에게 박종철군 사망 원인을 심장 쇼크사로 작성하도록 '압박'했다. 

고뇌하던 황적준은 1월 18일 새벽, 부검을 통해 확인한 '사실 그대로'를 소견서로 작성했다. 황적준의 부검 소견서는 의사 오연상의 증언과 함께 박종철군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연상은 박종철군을 처음 검안한 중앙대 용산병원의 의사다. 국과수 황적준 과장이 '진실'에 입각해 부검 소견서를 작성한 장소가 '신길동팀' 사무실이다.

박종철군이 숨을 거둔 날로부터 4일 후인 1월 18일, 신길동팀 사무실에 박종철군 고문 수사의 배후로 지목된 경찰 간부들이 나타났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은 박종철군 고문에 직접 관여한 경찰 5명과 '신길동팀' 수사관 회의실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의 배후와 당사자는 말을 맞추고, 이 중 2명이 '책임'을 지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경찰의 조작 시도는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미사를 통해 폭로되지만, 박종철군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은폐하려 한 시도가 모두 '신길동팀' 사무실에서 벌어졌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7월, 대통령 딸 노소영씨가 국가대표 연습장에서 승마 연습을 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었다. 대통령 로열패밀리의 특혜 사실이 보도되자 신길동팀은 발설자를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 신길동팀은 승마협회와 한국마사회 관계자를 불법 조사하면서 물의를 빚었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치안본부는 1988년 8월 13일 신길동팀을 공식 '흡수'했다. 8개 반 33명으로 운영되던 신길동팀은 치안본부 통합 후 5개 반 28명으로 조직을 줄였다. 사무실도 치안본부 별관 건물로 옮겼다.

신길동 사무실을 폐쇄하면서 신길동팀은 치안본부 '특수수사과'로 거듭났다. '특수수사과'는 청와대 사칭 또는 공직기강 사건을 담당했다. 이후 특수수사과는 지능범죄수사대와 함께 치안본부와 그 후신인 경찰청 차원의 중요 범죄를 전담했다.

신길동팀이 경찰청 내부로 흡수된 반면, 특수1대인 '사직동팀'은 계속 유지되었다. 김영삼 정부 때 사직동팀은 '황태자'로 불린 대통령 아들 김현철의 '손발' 역할을 했다.

신길동팀이 있던 곳은 어디일까?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107-2번지다. 신길동팀이 쓰던 공간은 경찰수사연수원을 거쳐, 지금은 복합공간인 영등포 '청소년문화의집'으로 바뀌었다. 

'신길산업'으로 위장한 신길동팀뿐 아니라 세검정(홍제동) 대공분실은 '충의회중앙회', 장안동 대공분실은 '경동산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활동했다. 어린이도서관 건물을 사용한 사직동팀과 함께 여러 비밀경찰 조직이 시민의 눈을 피해 철저히 위장한 채 암약했다. 

(*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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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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