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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송년회에서 표창장 남발하게 된 사연

남의 소원 빌어주는 자리... 우리는 모두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등록 2019.12.23 16:47수정 2019.12.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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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넘겨 보내기 위해서는 송년회라는 행사를 치러야만 하는지 여기저기서 송년회 안내가 쇄도한다. 요즘은 문화 요소를 곁들여 송년 음악회나 송년 연주회, 송년 잔치라는 이름을 담은 안내장이 많다.

세밑을 조용히 보내기로 했지만 한 곳은 참석하기로 했다. 밥을 사 먹지 않고 먹을거리를 하나씩 가져와서 나눠 먹는다고 했다. 또 한적한 숲속에서 모이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도 새해 소원 빌기를 하는 순서가 있는데 그게 관심을 끈 것이다.

내 소원 빌기가 아니라 '남의 소원 빌어주기'를 한다는 것이다. 남의 소원 빌어주기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거 참 남는 장사로구나 싶었다. 내 소원 빌기를 하면 그 소원은 단 한 사람의 바람이지만 남의 소원 빌어주기를 하면 최소한 참석자 전원이 내 소원도 함께 빌어 줄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청와대 민원도 서명자가 많으면 더 효과적이라 하지 않던가. 기원자가 많은 소원은 아무래도 하늘(상제. 하나님. 부처님)이 눈길을 먼저 주지 않을까 싶고, 소원이 많이 접수된다고 해서 하늘이 과부하로 처리 불능에 빠질 리도 없을 것이다.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이니까 말이다.

그 장소가 지지리도 멀고 먼 곳이었지만 작정하고 갔다. 오가는 시간을 몇 번씩 갈아타는 버스에서 졸기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갔다.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술 한 방울 없이, 담배 한 대 피우는 사람 없이, 언쟁이나 다툼도 없이 1박 2일을 잘 보냈다.

맛있는 집 음식들도 성찬이었지만 역시 소원 빌어주기 시간이 최고봉이었다. 넘치는 축원과 추임새로 울먹이는 사람이 속출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을 소원 한 어느 여성분은 아버지라는 말을 꺼낼 때부터 눈시울이 붉어졌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바람람이 이뤄지도록 정성스런 기원을 보냈다.  

마지막 순서는 여느 모임처럼 소감 나누기였는데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소감을 내놓았다.

"이제 저 자신이 행복해도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행복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옆에 있는 백지 한 장을 집어 들고 짐짓 엄숙하게 그(녀)에게 (최근 몇 달 동안 검찰의 무리한 조사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표창장'을 드리는 의식을 진행했다.

"아무개 님은 매사에 맑고 밝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세계 만방을 누비는 용기까지 보여 줌으로써 곁의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충분히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추었기에 이 행복 누림 자격증을 드립니다."

효과 만점이었다. 속된 말로 대박을 친 것이다. 백지장을 받아 든 그(녀)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여기저기서 자기도 달라고 손을 벌렸다. 백지는 두툼하게 남아 있었고 인쇄도 필요 없고 부상도 필요 없는 표창장은 이때부터 남발되기 시작했다.

한층 더 격식을 갖춰 표창장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받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길래 덩달아 표창장을 주는 높은 위치에 서게 된 나도 이 영광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어 고개까지 숙여가며 백지를 드리기 시작했다.

고유번호는커녕 직인도 없고 날짜조차 적히지 않은 완전한 백지 표창장을 마구잡이로 나눠주면서 나는 무성영화 변사처럼 목소리를 두툼하게 꾸며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과 장점을 반영해서 낭송했다.
 

백지 표창장 백지 표창장을 주는 모습이다. 너도 나도 백지 한 장을 받고서는 무척 좋아했다. 초상권이 있으므로 얼굴들은 옅게 모자이크 처리 했다. ⓒ 전희식

 
"말씀은 지독한 눌변이시나 진정 어린 마음 전달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무개 님"이라든가 "경제적으로나 직업적으로 봤을 때, 대책 없는 분이지만 어디 가서 밥 굶을 일 없고 돌아다니면서 차비 걱정 없는 아무개 님" 등등 우스갯소리를 곁들이니 사람들이 더 좋아했다. 이른바 긍정심리학의 정점을 우리는 함께 오르게 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유튜브에 28만의 구독자를 가진 한 명상음악 작곡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백지가 좀 구겨졌지만 액자에 넣어 걸어 두겠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그 백지 행복 누림 자격증을 가장 눈에 잘 띄는 방 벽에 떡하니 붙여 놓은 사진을 보내 주기도 했다.  

행복. 그렇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정서의 문제이다.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은 위기와 위험을 알아차리고 대응하는 진화과정에서 부정성을 크게 키워왔다. 부정이 부정될 때에만 비로소 안도하는 식이다.

엄혹한 자연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능력을 이렇게 키워 온 인간은 현대 물질문명의 모든 놀라운 성취와 혜택 역시 그 덕분이라 하겠다. 함께 발달한 부정성의 지능, 부정성의 논리는 이제 스스로를 해치는 단계까지 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 생각에 포박되어 행복 또는 행복감을 떨구어냈다고나 할까. 긍정에 대한 질투(?)가 오죽했으면 '긍정의 배신'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어 냈을까.

행복을 개인적 심리 상태로만 볼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삶의 종합적인 질을 따지는 표본 통계수치로 따질 일도 아니다. 두 요소의 총합이어야 할 것이다. 이날 몇 장인지도 모르고 나눠 준 '행복 누림 자격증'이 나의 성장과 함께 관계의 성숙을 이루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긍정의 밝은 기운을 백지 속에서 발원하는 에너지로 삼아.

행복해지는 비법을 담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너무 걱정할 것도 없고,
자기편을 만들 필요도 없고,
나를 이해시키려고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이룬 후에 공을 취하려 하지 않고,
다해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행복해지는 비법이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이라는 김승호 시인의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함양신문>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주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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