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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신화 멤버 김동완씨 덕분에 만나게 된 외국인 독자

[내가 만난 독자] '소년의 레시피'를 읽고 쓰고, 일본어로 옮기는 기쿠치 미유키씨

등록 2019.12.26 08:53수정 2019.12.2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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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언니. 나를 그렇게 부르던 우리 영어 선생님 조지니아 슬랜더는 남아공에서 온 20대 젊은이였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따로 한국문화를 공부했다. 케이팝, 한국드라마뿐만 아니라 '탑돌이'까지 알고 있었다. 내소사나 선운사 마당에서는 합장을 하고 탑을 돌았다. "남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면서.


2017년 7월 29일, 조지니아 슬랜더는 대만 여행을 가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있었다. 한글 읽는 것에 재미 들린 조지니아는 공항서점으로 갔다. 낯익은 책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쓴 <소년의 레시피>였다. 그녀는 매대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보내왔다.

"Stella 언니! Look what I found at the airport."

그 여름의 어느 날, 도쿄에 사는 기쿠치 미유키씨도 인천국제공항의 서점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으려고 책을 고르는 중이었다. 표지도 예쁘고, 따라할 수 있는 조리법도 들어있어서 <소년의 레시피>를 선택했다. 덕분에 미유키씨와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친구가 되었다.
  

인천공항 서점에서 <소년의 레시피>를 사간 기쿠치 미유키씨는 회사에 1시간 먼저 출근해서 <소년의 레시피>를 읽었다. ⓒ 기쿠치 미유키


미유키씨는 우리나라 최장수 아이돌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씨 팬이다. 드라마 <힘내요 미스터 김>을 통해서 '우리 동완씨'를 알게 됐다고 한다. 김동완이라는 가수 겸 연기자를 제대로 좋아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김동완씨가 나오는 뮤지컬과 콘서트를 보기 위해 1년에 서너 번은 혼자 한국에 온다.

"저는 2012년부터 우리 동완씨를 좋아했어요. 팬 역사가 짧아서 미안해요."

쉰 살이 되기 전에 암호처럼 보이던 한글을 공부하게 된 미유키씨. 한국드라마를 보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동아리에 들었다. 그 정도 활동으로는 한국어에 대한 갈증이 달래지지 않았다. 한국어라는 물을 실컷 마셔보고 싶었다. 미유키씨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한국의 대학에서 운영하는 '한국어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몇 번이나 참가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재외동포 및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어능력시험은 6급까지 있다. 1~2급 시험은 읽기와 듣기, 3급 시험부터는 쓰기 영역이 추가된다. 회사 다니면서 공부한 미유키씨는 몇 년 만에 한국어능력 5급을 땄다. 쓰기가 약하다고 자평하는 그녀는 지금 일본 한국대사관에서 운영하는 도쿄어학원에 다닌다.

"100퍼센트 한국어로만 수업해요. 매주 월요일에 90분씩 해요. 20대부터 50대까지 있어요. 처음 자기 소개할 때 저는 느꼈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나이는 가장 많지만 실력은 막내'라고 이야기 했어요. 한국어로 도스트에프스키를 읽고, 청소년 고전도 읽어요. 5페이지나 10페이지짜리 글도 써야 해요. 때로는 너무 어려워서 좌절하지만 재밌어요.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신화의 멤버 '우리 동완씨' 팬인 기쿠치 미유키씨는 <소년의 레시피>를 한글로 쓰고 다서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공부를 했다. ⓒ 기쿠치 미유키


미유키씨는 <소년의 레시피>를 일본어로 옮겨보고 싶었다. 프롤로그부터 시작했다. 배지영 작가가 광화문 촛불 집회에 갔을 때 젊은 셰프들이 '해바라기하는' 걸 보는 장면에서 고민했다. 일본어에는 그 말이 없어서 인터넷을 찾아봤다. 日向ぼっこ(햇볕을 쬐다)보다는 陽なたぼっこ가 더 비슷한 것 같았다. 어학원 선생님이 미유키씨에게 잘 썼다고 칭찬했다.

미유키씨의 인스타그램 업데이트는 그녀를 닮아서 꾸준했다. 회사에 가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회사에서 틈틈이 가드닝을 하는 일상. 미유키씨는 하다 말다 하는 내 인스타그램에도 찾아와서 성실하게 하트를 눌러줬다. 언젠가는 군산에 와보고 싶다는 댓글을 달았다. 빈 말일 리가 없다. "오세요, 반가울 거예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김동완씨 덕분에 미유키씨의 군산 방문 날짜가 정해졌다. 김동완씨는 동덕여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세 번째 외박' 공연을 한다. 12월 3일부터 12월 29일까지 하는 12회 공연. 서울에 한 번 오면 같은 공연을 두 번 이상 보는 미유키씨는 금요일과 일요일 티켓을 예매하고 나한테 메신저를 보내왔다.
 
"작가님, 저는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 가요. 14일(토)에 8시나 9시 버스를 타고 군산에 가려고 해요. 혹시 그날 작가님은 시간이 계세요(나세요)?" 

 

김동완씨의 '세 번째 외박' 공연. 12월 3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미유키씨는 서울에 오면 같은 공연이어도 '우리 동완씨' 공연이니까 두 번 이상 보고 도쿄로 돌아간다. ⓒ 기쿠치 미유키


미유키씨는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 군산' 편을 이미 본 뒤였다. 1899년 개항 이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철저히 수탈당한 도시 군산. 일본인인 미유키씨는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동시에 어린 미유키씨가 놀던 할머니 집과 비슷한 집들이 군산에 있어서 향수를 느꼈다. 그녀는 근대문화가 있는 월명동, 은파호수공원, 재래시장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군산고속버스터미널은 늘 주차하기 복잡한 곳. 느긋한 사람들도 참지 않고 경적을 울린다. "안녕하세요. 일단 타세요." 미유키씨에게 건넨 내 첫 마디는 다급했다. 미유키씨는 커다란 쇼핑백을 먼저 차에 들여놓고 조수석에 앉았다. 꽃차남이 좋아하는 피카츄 담요를 비롯한 카레, 각종 과자,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안대를 선물로 준비해왔다.

우리는 터미널과 가까운 철길마을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가리지 않고 한국음식을 잘 먹는다는 미유키씨는 나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시래기 비빔밥을 먹고 식당 근처에 있는 한길문고로 갔다. 미유키씨는 내가 처음 쓴 책 <우리, 독립청춘>과 윤지회 작가의 <사기병>을 샀다.

"작가님 책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는 교보문고 해외배송 페덱스로 샀어요. 혼자서 사면 비싸요. 그러니까 동아리 친구들 모아서 한국 책을 주문해요. 두꺼운 국어사전도 샀어요. 항상 스마트폰 사용해서 검색하는데 국어사전을 갖고 싶었어요." 
 

신흥동 일본식 가옥. 미유키씨는 군산에 있는 이 집의 정원에서 향수를 느꼈다. 도쿄에서 나고 자란 그녀도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의 일본 집에서 놀고는 했다. ⓒ 배지영


수면이 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파호수공원을 걷고 나서 월명동으로 갔다. 지배 받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그 시절을 되살려놓은 동네 월명동. 독립 운동가들이 고문당하던 모습을 재현해놓은 군산항쟁관, 집 안에 집 한 채만한 금고를 지어놓은 신흥동 일본식 가옥,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절집 동국사까지 걸어 다녔다.

미유키씨와 나는 국적과 모국어가 다르다. 평생 모르고 살았을 우리 사이를 이어준 건 문화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겨했던 미유키씨는 미야베 미유키 작가에게 친근함을 느낀다고 했다. <화차>, <모방범>, <이유>같은 소설은 나도 읽었다. 우리는 그룹 스마프,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 그리고 '우리 동완씨' 얘기를 했다.

밥 먹을 때 빼고는 줄곧 걸어 다녔다. 우리는 카페로 갔다.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100년 넘는 동안 버텨온 군산세관, 그 세관의 창고였던 곳을 개조해 만든 카페. 고속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타이머를 맞추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의 한국어 실력이 신기했다. 빤한 질문이긴 한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고 물었다.
 
"집에서 공부를 못해요. '우리 집 아저씨'가 시끄러운 편이에요. 회사 영업시간은 8시 30분부터예요. 저는 먼저 출근해요. 7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매일 한국어를 공부해요. 점심도 빨리 먹고 또 공부하고요."
 

타이머가 울렸다. 15분 뒤에 미유키씨는 서울 가는 버스에 타야 했다. 나는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에서 '매진임박' 자막을 본 것처럼 서둘렀다. 침착한 미유키씨는 나보고 도쿄에 놀러오라고 했다. "그럴게요." 지난해 같았으면 바로 대답했을 거다. 강제징용 사과와 배상 요구에 경제보복을 한 아베 때문에 일본은 이제 가지 않는데. 그래도 미유키씨와 나는 친구다.

도쿄 집에 도착한 미유키씨는 <소년의 레시피>를 한국어로 먼저 쓰고 일본어로 번역한 노트 사진을 보내줬다. "좀 부끄러워요. 공부가 부족한 사람이에요"라고 했지만 한글이 너무나 반듯하고 예뻤다.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 지치지 않고 공부했을 그녀가 그려졌다. 좋아하는 우리 동완씨에게 닿기 위해 노력하는 미유키씨의 자세는 정말이지 근사했다.

소년의 레시피 - 요리 하지 않는 엄마에게 야자 하지 않는 아들이 차려주는 행복한 밥상

배지영 지음,
웨일북, 2017


#소년의 레시피 #신화 김동완 #우리 동완씨 일본인 팬 #기쿠치 미유키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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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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