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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길이 사라져버리면…. 쉬어가라

노두 따라 걷는 ‘가고 싶은 섬’ 전남 신안 기점·소악도

등록 2019.12.29 18:25수정 2019.12.2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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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은 제방 끝에 있는 베드로의 집. 그리스 산토리니의 건물을 보는 듯한 이곳에서 12사도 순례길이 시작된다. ⓒ 이돈삼

 
겨울바다로 간다. 섬이 많은 바다, 다도해(多島海)다. 그 가운데서도 노둣길을 따라 여러 개의 섬을 돌아볼 수 있는 전라남도 신안의 기점·소악도다. 섬의 모양이 기묘한 점처럼 생겼다고 기점도, 섬 사이를 지나는 물소리가 크다고 소악도라 불리는 섬이다.

섬과 섬 사이가 노두로 이어져 있다. 오래 전 주민들이 갯벌에 돌을 던져 넣어 만든 길이다. 기점·소악도에는 하루에 두 번 노둣길이 물 위로 드러난다. 밀물이 되면 바닷물이 차올라 사라지고, 서너 시간 뒤 썰물 때 다시 갯벌 위로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다섯 개의 섬을 돌아볼 수 있다.


만약 여행 중에 길이 사라져버리면…. 쉬어가라는 하늘의 뜻이다. 주변 둑방이나 노두 근처에서 멍을 때리며 물이 다시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느린 여행의 지혜이고, 섬여행에서만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다.
  

썰물 때 드러난 노두를 따라 여행객이 걷고 있다. 갯벌 위에 세워진 하얀 건축물이 마태오의 집이다. ⓒ 이돈삼

   

안드레아의 집 창으로 내다 본 바다 풍경. 바다 건너로 보이는 섬이 대기점도에서 노두로 연결되는 병풍도다. ⓒ 이돈삼

 
기점·소악도는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을 일컫는다. 섬사람들은 다섯 개 섬을 한데 묶어 기점·소악도라 부른다. '슬로시티' 신안 증도에 속한다. 증도와 압해도 사이, 병풍도에 딸려 있다.

기점·소악도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해제반도 끝자락에서 연결된 신안 송도선착장과 버지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병풍도로 들어가서 노둣길을 따라 대기점도로 갈 수 있다. 목포와 무안에서 연결된 신안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대기점도로 들어갈 수도 있다.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는 게 여행하기에 더 편리하다. 배는 하루 네 번 오간다. 겨울철에 한해 오전 6시50분, 9시40분, 오후 12시50분, 3시30분 들어간다. 대기점도에서 송공항으로 나오는 배는 오후 4시40분이 막배다. 1시간 남짓 걸린다.
  

신안 천사대교의 위용.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기점·소악도로 가는 길에 본 풍경이다. ⓒ 이돈삼

   

대기점도와 병풍도를 이어주는 노두 위로 바닷물이 들고 있다. 한동안 열려있던 노둣길이 바다 속으로 다시 잠기는 순간이다. ⓒ 이돈삼

 
기점·소악도의 지형은 썰물 때 바뀐다.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이 노두로 모두 연결된다. '어미 섬' 병풍도까지 합하면 여섯 개의 섬을 두 발로 걷거나 차를 타고 건너다닐 수 있다.

노두 주변은 차진 갯벌이다. 칠게와 농게, 짱뚱어가 놀고 있다. 누렇게 변색된 억새가 손을 흔들고, 빨갛게 익은 청미래덩굴과 붉디붉은 속살을 드러낸 돈나무 열매도 길에서 만난다.

무엇보다 곳곳에 지어진 열두 개의 작은 예배당이 눈길을 끈다. 예배당을 따라가는 길이 '기적의 순례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하루 두 번 바다 위로 길이 드러나서 기적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을 따라가는 길이기에 순례길이다.


특정 종교인을 위한 시설은 아니다. 개신교인들한테는 예배당, 천주교인들에게는 공소일 수 있다. 불자들에겐 암자, 여행자들한테는 쉼터다. 서너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두 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다. 국내외의 전문 작가들이 지었다.

이 순례길을 '섬티아고'라 부른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만큼이나 아름다운, 다도해 섬에 있는 순례길이다. 노두를 따라 흘근흘근 거닐며 이국적인 건축물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2사도 순례길의 출발점인 베드로의 집. 거칠게 마감된 새하얀 벽과 파란색의 둥근 지붕이 바다와 잘 어울린다. 대기점도의 선착장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안드레아의 집 안에서 본 대기점도의 북촌마을 풍경. 옹기종기 모여 사는 섬마을 사람들의 정겨움이 고스란이 엿보인다. ⓒ 이돈삼

 
기적의 순례길은 배가 드나드는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시작된다. 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은 제방 끝에 있는 베드로의 집(건강의 집)이 출발점이다. 거칠게 마감된 새하얀 벽과 파란색의 둥근 지붕이 바다와 잘 어울린다. 그리스 산토리니의 건물을 보는 듯하다.

배를 타고 내리는 대합실로도 이용되는 베드로의 집 옆에 작은 종이 걸려있다. 이 종을 치면서 순례의 첫 걸음을 뗀다. 베드로의 집에서 안드레아의 집, 야고보의 집, 요한의 집을 거쳐 가롯유다의 집까지 순서대로 하나씩 돌아보는 코스다.

안드레아의 집(생각하는 집)은 대기점도와 병풍도를 이어주는 노둣길을 배경으로 북촌마을 동산에 있다. 두 개의 높고 둥근 지붕이 이색적이다. 야고보의 집(그리움의 집)은 저수지를 지나 작은 호수 주변의 숲속에 지어져 있다. 심플한 디자인에 로마식 기둥을 입구 양쪽에 세웠다.
  

대기점도의 남촌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요한의 집. 치마처럼 펼쳐진 계단과 염소 조각작품이 눈길을 끈다. ⓒ 이돈삼

   

기점도와 소악도를 잇는 노둣길 입구에 세워진 필립의 집. 유려한 지붕의 곡선미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노둣길을 따라 섬주민이 오토바이를 타고 건너고 있다. ⓒ 이돈삼

 
하얀 원형의 외관에 지붕과 유리창이 독특한 요한의 집(생명평화의 집)은 남촌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아낙네의 치마처럼 펼쳐진 계단과 염소 조각작품이 눈길을 끈다. 필립의 집(행복의 집)은 기점도와 소악도를 잇는 노둣길 입구에 있다. 적벽돌과 갯돌, 적삼목을 덧댄 유려한 지붕의 곡선과 물고기 모형이 독특한 프랑스 남부의 전형적인 건축물이다.

토마스의 집(인연의 집)은 초원을 배경으로 단정한 사각형의 흰색 건축물이다. 별들이 내려와 박힌 것처럼 구슬바닥과 파란색 문이 인상적이다. 소악도 둑방의 끝에서 만나는 작은 야고보의 집(소원의 집)은 프로방스 풍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건물마다 겉모습이 저마다 다르고 독특하다. 이 건축물이 더욱 아름다운 건, 안에서 바깥 풍경을 다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창문의 모양새도 다 다르다. 동그라미에서부터 정사각, 직사각, 마름모꼴까지 다양하다.

건물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도 바닷물이 들고나는 시간대에 따라 달라진다. 언제 봐도 새롭다. 한낮의 햇살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 설계돼 있다. 안에는 촛불을 밝힐 수 있도록 근사한 촛대가 놓여 있다. 잠시 쉬면서 분위기까지 잡을 수 있다. 섬 트레킹은 물론, 젊은 연인들의 인생샷 촬영지로 제격이다. 예비 신혼부부들의 웨딩사진 촬영 장소로도 좋겠다.
  

토마스의 집에 밝혀진 촛불. 잠시 쉬면서 분위기를 잡거나, 한동안 멍-때리기를 하기에 좋다. ⓒ 이돈삼

   

토마스의 집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섬여행에 동행한 일행이 건축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돈삼

 
기점·소악도는 특별할 것이 없는 섬이었다. 경관이 그렇고, 땅이나 바다가 비옥한 것도 아니다. 시쳇말로 외지인들을 불러들일 만한 매력이 그다지 없었다. 이 섬이 지난 2017년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됐다. 섬이 지닌 갯벌과 노두가 비교우위 자원이었다.

섬을 어떻게 꾸밀까 오래 고민한 끝에 만든 것이 '기적의 순례길'이다. 대기점도에서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까지 잇는 거리가 12㎞에 이른다. 섬주민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인 점을 감안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힌트를 얻어,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딴 작은 예배당을 세웠다.
  

섬길을 걸으면서 만난 돈나무 열매. 언뜻 석류 같다. 빨간 루비를 닮은 열매가 노란 껍질과 어우러져 환상경을 연출하고 있다. ⓒ 이돈삼

   

대기점도의 북촌마을 풍경. 섬에 슈퍼나 편의점이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섬이다. 하지만 최근 섬에 12사도 순례길이 만들어지면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 이돈삼

 
기점·소악도의 면적이 135만㎡. 여기에서 60여 가구 100여 명이 구순히 지내고 있다. 슈퍼나 편의점은 없다. 식당과 숙박시설이라곤 최근 문을 연 마을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전부다. 섬주민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마을식당의 음식이 정말 맛있다. 삶은 배추와 낙지를 무쳐내는 배추연포가 별미다. 물김으로 끓인 김국도 속을 풀어준다. 낙지, 감태, 파래 등 섬에서 직접 잡거나 채취한 해산물도 쩌금쩌금 먹게 한다. 섬여행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는 상차림이다.
  

섬여행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마을식당의 상차림. 물김으로 끓인 김국, 삶은 배추와 낙지를 무쳐내는 배추연포가 별미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기점소악도 #가고싶은섬 #노두 #순례길 #섬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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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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