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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와도 못 보여줘".... 전두환은 정말 최악이다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대학생 군대 보내 죽인 전두환 정권, 녹화사업 진상규명도 가로막다

등록 2019.12.31 16:06수정 2020.02.2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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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성수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팀 전문위원으로 일했습니다.[편집자말]
나는 40년 전인 1979년 대학 1학년 때 총명해 보이는 동갑내기 대학생을 종로의 한 모임에서 만났다. 인상이 너무 강렬해 잊지 않고 있다가, 그 다음 해인 1980년 그를 서울 영락교회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때 그가 연대생인 것과 전두환 정권에 아주 비판적 시각을 가진 운동권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나는 철도대를 다니던 '생활권'이라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1981년 7월 공군에 입대하고 1984년 5월 제대 후 곧 철도청에 복직했다.

그해 여름 연희동의 한 모임에서 나는 4년 전에 만났던 그 동갑내기를 우연히 다시 만났고, 큰 충격을 받았다. 4~5년 전 그의 눈에서 발하던 총기는 아예 없어지고 그는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무척 힘들어했다. 달변가였던 그가 몰라볼 정도로 말도 너무 어눌했고 또 그의 손끝은 이상하게도 까만빛을 띠고 있었다.

나중에 지인들에게 들으니 그는 1981년 시위를 하다가 군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제대 후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했다. 침을 흘리거나 손끝이 까만 것은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신경 계통이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젊은이의 인생을 전두환이 망쳤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청년들을 죽인 '녹화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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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 전 대통령을 향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소명과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2019.12.21 ⓒ 연합뉴스

 
전두환 정권은 지난 1980년 9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했고, 이들을 프락치(첩자)로 활용하는 이른바 '녹화사업'을 진행했다. 지난 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 자료에 따르면, 당시 강제징집자는 1152명, 녹화사업 대상자는 강제징집자 921명 등 모두 1192명이었다. 이 가운데 6명이 의문사했다.

녹화사업은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 이후 '선도공작'으로 이름을 바꿔 노태우 정권 때까지 이어졌고, 수많은 청년들이 인권 사각지대인 군대에서 고통을 당했다. 내가 알던 그 연대생도 녹화사업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가 살아있는지 또 살아 있다면 어느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녹화사업 중 의문사 당한 여섯명 중의 한 명인 이윤성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들의 강력한 반정부 시위에 부딪히게 되자, 검거된 시위 참가자들을 강제징집하고 이들을 상대로 녹화사업을 진행했다. 보안사령부(2018년까지 기무사령부였다가 지금은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의해 입안된 '녹화사업'은 운동권 대학생들을 '특별교육'을 통해 순화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즉, "좌경사상으로 붉게 물든 학생들의 사상을 푸르게 변화시킨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평소 전두환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체포구금하고 시위 때 연행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제 입대시켰다. 이 과정은 보안사(기무사)·치안본부(현 경찰청)·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문교부(현 교육부)·검찰·대학이 총동원된 가운데 이뤄진 권력기관의 종합선물세트였다.

녹화사업은 보안사의 대학동향 파악을 위한 프락치(첩자) 강요로 이어졌다. 즉, 녹화사업 대상자들에게 휴가를 내주며 과거에 함께 활동한 친구들의 행적과 동향을 파악해 보고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녹화사업의 대상이었던 사병들은 정신·육체적으로 철저히 파괴당했다. 나아가 이렇게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운동권 조직사건 등을 만들어냈고, 그런 과정에서 대학생·노동자와 민주인사들도 보안사가 불법으로 보안사 분실로 연행해 고문 수사하기도 했다. 이윤성은 바로 이 녹화사업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이윤성은 1981년 3월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 계열에 입학한 후 그해 4월 '인문과학연구회'에 가입해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이윤성은 1981년 6월부터 '역사·철학 계열 1학년 세미나모임'에 참여했고, 결국 그다음해 전공을 사학과로 정하며 '사학과 세미나모임'에서 활동했다.

한편 이윤성은 1981년 12일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인문과학연구회' 동기들과 함께 '겨울 스터디 그룹'을 조직해 선배들의 지도 아래 겨울방학 동안 세미나를 했다. 그는 2학년 때 '인문과학연구회' 후배들의 세미나를 지도했으며 1982년 8월 '인문과학연구회'의 회장이 되었다.

입영대상자도 아닌데 시위 중 강제입영 된 이윤성

이윤성은 1982년 11월 3일 '(전두환)군부독재 타도',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을 주장하는 데모 중 사복 전투경찰 '백골단'에게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동대문경찰서는 이윤성을 시위주동자(A급)로 분류했다. 이윤성의 매형과 그리고 시위현장에서 함께 체포된 이윤성 친구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동대문경찰서는 시위주동자로 분류된 학생들에게 '군 입대를 하지 않으면 징역형, 실형 등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이윤성에게 입대를 강요했다.

시위주동자로 분류된 이윤성은 이러한 경찰의 강요를 거부할 수 없어 입대에 동의하고 결국 강제징집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이윤성의 부친은 60세 이상이었고 그는 2대 독자로서 병역법상 현역 입영대상자도 아니었다. 이것은 전두환이 당시 자신의 정권을 비판하는 학생들의 입을 막기 위해 불법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는 일면을 보여준다.

이윤성은 체포된 지 3일만인 1982년 11월 6일 동대문경찰서 강당에서 가족들과 간략하게 면회를 마친 후 바로 101보충대에 입대했다. 지난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101보충대에서는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체 조건상 현역입영이 부적합한 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면 현역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윤성은 1982년 11월 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육군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그해 12월 24일 한 전방 육군부대에 전입되었다. 이윤성은 전입과 동시에 경기도 연천군 대광면 대마리 철책지역에서 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의문사위 보고서는 당시 이윤성이 "소대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이윤성의 가족들은 그의 부친이 60세 이상이었고 그가 2대독자인 관계로 원래 입영될 대상도 아니었기에, 1983년 2월 서울 종로구청에 이윤성에 대한 의가사 전역을 신청했다. 그리고 1983년 4월 28일 이윤성에 대한 의가사 전역명령이 발령되었고 이어서 이윤성은 1983년 5월 12일 전역할 예정이었다.

한편 이윤성은 '운동권출신사병(A급)'으로 분류된 특별관찰 대상이었으므로, 부대 대대장의 지시로 이윤성의 동향에 대한 관찰 및 기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선임하사는 이윤성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수시로 상부에 보고했다. 게다가 당시 보안대 주재관은 매주 이윤성의 부대를 방문해 대대장이나 선임하사와 면담하거나 이윤성에 대한 관찰기록을 검토하는 등 그의 동향을 관찰했다.

이윤성의 부친은 당시 아들을 면회 갔을 때 아들로부터 '어디서 부르면 겁이 나 몸이 떨린다'는 말을 들었다. 또 "윤성이가 보안부대의 조사를 수차례 받았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주장했다.

군생활 중 수시로 보안대에서 (구타)조사 받은 이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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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 의문사 6인 ①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②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③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④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⑤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⑥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 민청련동지회

 
당시 이윤성의 한 소대원은 "이윤성이 연대 보안대로부터 호출당하면 성명불상 보안대원이 하사를 대동하고 와서 이윤성 관물대를 뒤지는 것을 2~3회 본 기억이 있고, 이윤성이 연대 보안반에 가면 하루는 자고 왔던 것 같다"며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또한 당시 보안반의 한 서무병은 "이윤성이 2~3회 보안부대로 가는 차량을 기다리기 위해 연대 보안반에서 머물렀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이런 진술을 종합해 보면, 군생활 중 이윤성은 수시로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성의 사학과 동기이자 당시 성균관대학교 고전연구회 회장 최아무개는 의문사위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1983년 4월 초순 이윤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성균관대학교 근처 술집에서 만났는데, 이윤성은 '너희 서클은 잘 되냐?' '다들 뭐하냐? 별일 없냐?'등을 묻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가봐야 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윤성과 서클도 다르고 활동도 같이 한 적이 없어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별 이야기 없이 안부만 묻고 갑자기 딱 자르고 일어서는 것 같아 이상했다."

이윤성의 성대 역사·철학계열학과 동기생은 "당시 성대 정문 앞에 있는 '시골집'이라는 술집 앞에서 이윤성이 군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이윤성은 하얀색 계통의 셔츠를 입은 남자와 함께 서 있었던 것 같다"라며 의문사위에서 훗날 진술했다.

의문사위는 위의 진술에서 나타난 이윤성의 행적과 이윤성이 보안부대의 소환을 받은 사실을 종합하면서 이런 결론을 맺는다.

"이윤성은 보안부대의 프락치 활동 강요에 의해 성균관대 부근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만나 정보수집 활동을 했을 개연성이 상당하나, 구체적으로 보안부대의 소환시기, 조사경위, 프락치 활동 강요여부 등을 확인할 만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어, 구체적 내용을 특정할 수 없다."

당시 이윤성이 복무하던 보안부대 부대장, 연대 보안반장, 보안부대 대공계장 등은 "(그때) 보안사의 지시에 따라 녹화사업(순화교육)의 일환으로 1983년 4~5월 이윤성을 소환해 조사한 사실이 있다"며 훗날 의문사위 조사에서 진술했다.

당시 보안대원들도 이윤성에게 '나의 성장기'를 작성하게 하고, 책자를 주어 소감문을 제출하도록 하면서 소위 순화교육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의문사위는 이윤성이 1983년 4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보안부대에서 대공계장 및 대공수사관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았고, 보안대원들은 이윤성에게 학생운동 가담 여부 및 운동권 동료들의 활동사항 등에 관해 조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심하게 압박한 것 같다"

당시 이윤성의 부대에 근무하던 보안부대 관련자들은 훗날 의문사위 조사에서 아래와 같은 진술을 남겼다.

- 보안부대 대공계 대기병 "이윤성을 조사하던 수사관이 이윤성을 좀 심하게 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 보안부대장 "당시 대공계 수사관들이 운동권출신 사병들을 늦은 시간까지 심사실에서 조사했다."

- 헌병대 조사계 선임하사 "이윤성이 야간까지 취조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 보안사 감찰실 준위 "대공계장은 이윤성의 학생운동 배경을 조사하면서 심하게 압박한 것 같다."

- 이윤성 부대 소속의 한 병사 "1982년 1월 근무 중 북한 삐라를 주워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어서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했는데, 그것이 발단이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당시 수사관이 보안부대 대공계장 박○숙이었으며, 혐의를 부인하자 박○숙으로부터 4일 이상 구타를 당해 결국 자백했다."
 

당시 보안부대 조사에서 이윤성은 자신의 입대전 학생운동 활동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니 보안부대의 기존 조사관행 등을 종합해 보면, 이윤성은 보안부대에서 수사관들로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윤성 부대 소속의 한 병사의 경우처럼, 이윤성은 자신이 부인한 학생운동 활동사항에 관한 진술을 강요받으면서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대 8일 앞두고 자살?

이윤성의 전역 예정 8일 전인 1983년 5월 4일, 결국 비극이 발생한다. 이날 새벽 3시경 보안부대 김아무개 사병은 위병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가던 중, 심사실에 있어야 할 이윤성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보안부대 일직사관에게 보고했다. 그 후 보안부대 소속 사병들이 이윤성의 소재를 찾던 중, 위의 김아무개가 보안부대 부근 테니스장에서 군화 끈과 요대를 연결해 심판대에 목을 맨 채로 매달려 있는 이윤성을 발견했다.

일직사관은 라이터로 군화 끈을 자른 후 이윤성을 바닥에 끌어 내리고 목에 감겨 있던 요대를 풀어 인공호흡을 실시한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윤성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보안부대 운영과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윤성은 군대 끌려오기 전 자신의 학생운동 가담과 관련해 보안부대 수사관들로부터 수시로 강압적인 (구타)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안부대 대공계 사병 조아무개는 '나 같은 사람 무엇 때문에 괴롭히느냐,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이윤성의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진술했다.

이와 같은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이윤성은 학생운동 가담 여부 및 운동권 동료들의 활동 사항 등에 관한 가혹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운동권 동료들을 배신할 수 없다는 심적 부담감, 또는 프락치 활용 강요로 인한 심리적 갈등과 강압적인 조사에서 비롯된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이를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안사(기무사)가 전혀 자료를 제공해 주지 않은 상황에서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이윤성의 유서'에 대해 의문사위는 위의 "조아무개 이외에 이윤성이 작성한 유서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윤성이 보안부대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점에 비추어, 그가 타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윤성의 죽음을 조작한 보안사

의문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는 이윤성의 사망과 관련해 아래와 같은 조작행위를 벌인다.

- 당시 헌병대장은 "보안부대로부터 사건을 통보받고 상급 헌병대로 속보를 보고하는 시간이 지연된 현실을 감안해 본인이 보안부대장과 함께 보안사와 군단 헌병대에 사체 발견 시각을 '06:00'으로 하자고 합의했다"고 진술.

- 당시 헌병대 조사계 선임하사는 "보안부대에서 인지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헌병대에 신고한 후 헌병대장 등과 이윤성이 연대에서 사망한 것으로 할 것인가 등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

- 당시 보안부대 사병은 "사령부 감찰실에서 간부들이 나오기 전 본인이 위병근무 중, 부대간부들이 (이윤성의) 발견 시각을 '06:00'으로 하자는 대화 내용을 들었다"고 진술.

- 당시 보안반 대대 주재관은 "(보안)사령부 간부들이 이윤성 사망 직후 본인을 소환해 보안부대로 갔는데, 성명불상 보안사 간부가 사무실 통로에서 '이번 사건은 불온 삐라와 책자를 소지해서 월북혐의로 조사하다가 일이 일어난 걸로 알아라'고 말했다"고 진술.

- 당시 연대 보안반장은 "이윤성을 부검한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본부 운영과장이 '보안사령부에서 특수학변자가 불온전단을 휴대한 것으로 처리하라고 했다'고 말했다"고 진술.

- 당시 보안부대장은 "이윤성은 보안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순화교육(녹화사업) 목적으로 보안부대에 온 것이며 이윤성이 월북혐의로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은폐, 조작된 것이다"라고 진술.


위와 같은 여러 진술을 검토 한 결과 "당시 보안부대장과 사단 헌병대장 등이 이윤성의 사체 발견 시각을 1983년 5월 4일 '06:00'으로 하기로 합의해 이를 조작" 했고 "보안사의 개입으로 이윤성에 대한 조사 경위와 사망 경위는 조작된 것으로"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억울한 죽음, 그러나 사죄하지 않는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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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9일,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이 80~90년대 강제징집 녹화사업에 당시 보안사령부가 개입한 의혹이 있는 사건들의 자료 열람등 실지조사를 위해 추모단체연대회의 회원들의 피켓시위를 지나 서울 종로구 기무사령부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의문사위가 이윤성의 사망 사실, 즉 의문사에 대해 자·타살 여부 등을 단정하지 못하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슬픈 사연이 있다. 필자가 몸담았던 의문사위는 지난 2001년에서 2004년 전두환 정권기 강제징집·녹화사업과 관련한 의문사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기무사에 대해 현장 실지 조사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기무사는 의문사위의 기무사의 문서 보존관리 기준표 및 내규에 대한 요청공문에 아예 회신하지 않고, 기무사 '문서고' 등에 대해 의문사위 위원장, 위원들과 조사관들의 접근 자체를 일절 거부했다. 당시 기무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와도 보여줄 수 없다", "대한민국이 거꾸러져도 안 된다"라며 의문사위의 협조 요청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그래서 의문사위는 녹화사업 희생자들과 연관된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련 기사: "녹화사업 자료, 대통령도 못 본다")

기무사가 진정 결백하다면 이런 자료들을 전혀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만천하에 모든 녹화사업과 의문사 관련 자료를 공개할 것이다. 기무사가 자료는 은폐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하면 전혀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한편 지난 12월 21일 전두환 정권기 '녹화사업' 피해자들은 전두환 자택 앞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날 피해자들은 녹화사업 등과 관련해 '전두환을 구속하라', '전두환을 감옥으로'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전두환은 지금까지 이윤성 등 녹화사업관련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아무런 사죄나 용서를 빌지 않고, 골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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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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