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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기도 전에 문 닫는 소리... 버스 기사의 속사정

[서평] 전주시내버스 기사가 쓴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등록 2019.12.31 08:39수정 2019.12.3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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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를 이용한 지 어느덧 8개월째, 올해 4월부터 운전대를 놓았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답답했다. 노선도 익혀야 했고 버스카드도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 요즘은 애플리케이션 서비스가 잘 돼 있어, 버스가 언제 어느 때 오는지 대략 알 수 있다. 버스정거장에도 버스 코스나 현재 차량 위치를 안내해주는 전광판이 설치돼 예전보다는 버스 이용이 수월하다. 전주의 정거장 의자에는 열선이 설치돼 있어 뜨듯하다. 덕분에 요즘처럼 찬바람 부는 정거장에서 버스 기다리는 일이 그리 신산하지만은 않다.


버스를 다시 타기 시작하고 처음 1~2개월간은, 내 마음속에 작은 갈등이 있었다. 대부분은 버스 앞문이 열리며 발을 내딛기 직전이다. '기사님께 인사를 할까, 말까...' 그것이 고민이었다. 인사를 안 하기에는 뭔가 삭막하고, 인사를 하기엔 좀 부끄럽다. 복잡한 세상 별걸 다 고민하면서 산다 싶겠지만 그래서 그냥 고민하기 싫어 인사를 유쾌하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습관이 되니 편했다.

기사님 대부분은 말없이 고개를 까닥이거나 '안녕하세요' 맞장구쳐주신다. 묵묵부답인 기사님들도 있다. 처음에는 좀 머쓱했지만, 요즘엔 그러려니 한다. 기분 좋게 버스에 오르고, 뭔가 아무 생각 없이 거리 구경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앞으로 쏠림, 옆으로 쏠림, 급출발, 급정거를 하기에 이르면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내 인사를 무시한 기사님일수록 그 불쾌함은 더한다.

발끝과 손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버스가 쏠릴 때마다 힘을 주어서 넘어지거나 남우세스러운 일이 없도록 대비한다. 늦게 내린다고 승객 뒤통수에 대고 싫은 소리하는 기사님들을 볼 땐 '나도 저런 신세가 되지 말아야지' 싶어서, 내릴 때가 되면 총알처럼 내릴 태세를 갖춘다(물론 모든 기사님이 그러는 건 아니다).

기사님들과 '신경전'이 벌어질 때는 하차하는 순간이다. 분명 운행 중에는 움직이지 말라고 써붙여놓고서 버스가 멈춘 뒤에 내리려고 일어서면, 일부 기사님들은 그새를 못 참고 문을 닫고 출발하려 한다.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그 바람에 후다닥 늦게 내리다 문에 끼인 적도 있다. 늦게 내리면 늦게 내린다고 뭐라고 하고, 벨을 늦게 누르면 늦게 눌렀다고 또 싫은 소리를 하는 분들도 있다.

시내버스 기사의 철학서, 시집, 노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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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앞표지 ⓒ 수오서재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다닌 지 8개월이 지났을 때, 우연히 내 방 책장에 꽂혀있는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를 보았다. 전주시내버스 허혁 기사님이 쓴 수필집이다. 1년 전인 2018년 12월 24일에 샀는데, 그 당시 1/3 정도만 읽다가 덮었다. 


그리고 1년 후, 무슨 계시처럼 다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1년 사이 나는 시내버스 승객이 되어 있었다. 모든 건 똑같았는데 나만 변했다. 이때 읽은 것은 전에 읽었던 것과 같지 않았다. 허혁 기사님이 아예 내 귀에 대고, 나 들으라고 하는 독백 같아서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특히 기사와 승객과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버스 하차'에 대한 부분은 왜 버스기사들이 그렇게 급하게 내리고 출발해야 하는지 그 속사정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촉박한 배차시간, 복잡한 도로사정, 승객들의 늑장과 꾸물거림 등 때문이다. 그랬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각자 다 나름대로의 사정은 있는 법이다(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버스 뒷문에 끼이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다).
  
버스 노선표가 곧 인생 노선표다. 버스를 타며 늘 똑같은 길을 가는 기사들이나 승객이나 모두 인생의 궤적을 반복하는 것은 같은 운명. 그래서인지 이 글은 그냥 수필집이 아니라 철학서다. 제각각이 모두 한 편의 시다. 읽으면서 때론 무릎을 치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한다.
 
승객이 있건 없건 시간 맞춰 제 궤도를 돈다. 빠르고 넓은 길을 놔두고 굽이굽이 돌아 나온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시내버스의 세 가지 큰 덕목' (p.169)

시내버스는 하루종일 '끽끽' 브레이크 밟는 것이 일이다. 관광버스는 달리기 위해서 서고 시내버스는 서기 위해서 달린다. 당신 몸이 앞으로 안 쏠리면 시내버스가 아니다. (p.185)
 
버스 운전을 하며 겪는 고충과 어려움,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도 있다. 시내버스 운행과 정차에 결코 좋지 않은 도로 사정과 교통시스템, 일부 몰지각한 승객들의 행패, 특히 '기사 생활 이 년여 만에 터득한 시내버스 최고의 덕목은 닥치고 빨리 달리는 것이다'라는 자조적인 고백에서는 묘하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밀리에 시내버스에 올라타 친절기사를 선정하는 '시민모니터단' 사업을 이야기하며, 버스기사들의 그림자노동과 감정노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현실에 대한 비판은 수긍이 갔다. '암행'처럼 비밀리에 뒷조사를 하는 듯한 환경에서 어떻게 자발적인 '친절'이 나올 것인가. 친절기사는 행정과 버스회사, 버스기사, 승객이 다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 해보기

전주 시내버스에는 유독 아픈 파업의 역사가 있다. 올해 9월에도 짧은 파업을 했다. 그때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010년~2011년에는 약 5개월간 최장기간 파업을 한 역사가 있다.

나는 그때는 자가용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불편하지도 않았고 큰 관심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문제가 아닌 이상,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시내버스 승객이 된 요즘, 전주시내버스가 또 언제 파업을 선언하고 나올까 싶어 내심 조마조마다. 부디 전주시와 버스회사, 노조의 원만한 '삼각관계'를 기원할 뿐이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시내버스 기사에 대한 편견을 갖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급정거 급출발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일방통행'을 달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처럼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남의 일로만 여겼을 것이다. 때로 인생에 쏠림은 필요하다. 몸이 홱 쏠려서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의 궤적을 한 번쯤 들여다보는 우연. 그렇게라도 타인을 이해하는 계기는 필요하지 않을까.

버스를 운전하며 승객들을 바라보는 기사의 시선은 애잔하고 따뜻하다. 언제나 앞만 보고 직진하는 줄 알았는데, 버스에 차곡차곡 올라오는 승객들의 발소리에서 그들의 삶의 무게를 감지하기라도 하는 걸까.
 
 '승객이 노인 아니면 학생이다. 엄마 아빠는 자가용 타고 돈 벌러 다니기 바쁘다. 아이들이 버스 안에서 무얼 보고 무얼 듣고 무얼 느끼는지 알지 못한다. 전주 시내버스에도 몇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승객 일부는 특별히 갈 데가 있어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며, 진짜 길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젊은이가 반드시 음악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등이다.' (p.64)

오늘도 시내버스를 탄다. 멍하니 앉아 버스의 흔들거림에 몸을 맡긴다. 그러다 한 번씩 홱, 쏠린다. 앞으로 쏠림, 뒤로 꺾임. 좌로 쏠림, 우로 쏠림. 짜증이 슬슬 피어날 때면 마음을 가다듬고, 손끝과 발끝에 힘을 모으고 기사님들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인생에는 때로 쏠림이 필요하다.
#전주시내버스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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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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