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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할아버지가 조금 더 따뜻하게 지내시길

보통 사람들이 겨울 추위를 버텨내는 힘

등록 2019.12.31 13:40수정 2019.12.3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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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 pxxels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자정이 훌쩍 넘어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길로 난 큰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 본다. 한겨울밤의 도심은 매서운 추위에 굴복한 듯 숨죽이며 엎드려 있다. 그동안 비교적 포근했던 탓인지 갑자기 닥친 추위에 온몸이 움추려드는 기분이다. 이중창문까지 닫아놓았는데도 찬바람이 새어들어온다.


저만치서 큰 차가 다가와 멈춰서더니 차뒤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린다. 가로등 불빛에 보니 쓰레기수거차이다. 뛰어내린 사람은 쌓인 쓰레기를 하나씩 차에 던져 싣는다. 창문을 빼꼼히 열었더니 바깥에 웅크리고 있던 냉기가 왈칵 밀려들어 온다. 황급히 문을 닫는다. 가슴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운 바람 한자락이 지나가는 듯하다. 맞은 편 아파트 앞마당에 서있는 나무의 빈가지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듯 몸을 떤다. 쓰레기를 다 실었는지 남자는 바람막이도 없는 차뒤에 매달려 떠난다.

저녁 무렵,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아홉 시쯤 물건을 배달하겠다는 택배기사의 연락이다. 가끔 택배를 이용하지만 이처럼 늦은 시간에 배달을 오는 건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끝낸 뒤 따뜻한 집에서 식사를 하고 쉴 시간이다. 더구나 이처럼 사나운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 밤에.

'저녁밥은 먹었을까.'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간단하게 챙겨 줄 먹거리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택배기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냉장고를 열고 병에 담긴 두유를 꺼내 따뜻하게 데웠다. 현관벨이 울리고 '택배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앳된 얼굴의 청년이 서있었다. 청년에게서 찬 기운이 훅 끼쳤다. 내게 물건을 건네고 등을 돌리는 청년에게 따뜻한 두유를 내밀었다. 청년은 나를 쳐다보더니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바삐 뛰어갔다.

지난해 승강기가 고장나서 고치고 난 뒤부터 문 여닫는 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졌다. 가끔 택배임을 알리는 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열면 물건은 앞에 놓여있고 기사는 거의 달리다시피 복도 끝을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내가 건넨 병의 온기가 청년의 차가운 손을 조금이나마 녹여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칼바람 부는 깊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힘겨움과 고달픔에 가끔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말없이 손을 잡아주며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장면을 상상해본다. 골목길을 걸어 어느 집 문앞에 선 남자는 대문을 지나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지하 계단으로 내려간다. 이제 청년이 된 아들은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싸늘한 기운을 묻히고 들어온 아버지를 걱정스러움과 애정이 가득 담긴 눈길로 따뜻하게 맞는다. 새벽이 되도록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보리차 한 잔을 내오며 오늘도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초라한 반지하 전세방에 퍼지는 온기가 한겨울 추위를 녹인다.

자주 밖을 내다보던 노부부는 돌아온 아들의 차가운 겉옷를 받아들며 말없이 등을 토닥인다. 그리고는 늦은 저녁밥상을 내온다. 밥상 위에서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다. 아들은 그제야 편안해진 얼굴로 넉넉하고 따뜻한 부모의 품안에서 길게 다리를 뻗는다. 이런 상상을 하는 내마음속에 따사로운 기운이 살살 피어오른다. 고단하고 팍팍한 일상이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정의 따뜻함으로 겨울을 버틴다.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가는 길. 빨간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앞에 멈춰섰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는 사람들 속에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와 빈 박스가 가득 실린 수레를 힘겹게 끌며 뒤처져 가고 있다. 난 신호등이 좀 더 오래 계속되기를 가슴 졸이며 빌었다. 새해에는 부디 할아버지께서 좀 따뜻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허망하고 가시같은 욕심보다는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겨울 #따뜻함 #보통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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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과 객창감을 글로 풀어낼 때 나는 행복하다. 꽃잎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삽상한 가을바람 한 자락, 허리를 굽혀야 보이는 한 송이 들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날마다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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