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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사랑이 전부였던 철학자의 일기

[서평]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

등록 2020.01.02 11:41수정 2020.01.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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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이었던가. 한 한지공예 명인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였는데도,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쪼그리고 앉아, 한지를 오렸다. 앞으로 계획이 뭐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젊었을 때에는 1년 계획을 거창하게 세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1년 계획을 세우지 않고 딱 '한 달'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 계획을 세운다고 했다. 단, 그때에도 살아있다는 전제란다. 두 번 큰 수술을 겪고 난 뒤의 달라진 마음가짐이라 했다.

당시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그 달의 계획은 뭐였냐고 물어보니, 오래된 친구와 점심 먹기였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구체적이고 소소한 계획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소소한 한 달 계획이, 그 후로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한 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새 세상이 열린 듯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새삼스러웠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데, 단순히 캘린더 날짜가 바뀌었다고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꽤나 인생 좀 달관한 듯 말했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신년 계획을 세우긴 했다.

10대나 20대, 30대 초반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내 기억에 나는 한 번도 그것들을 지키지 못했다. 나중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게으르며, 치열하지 못했고, 계획은 대책없이 창대했다. 어느 순간부터 '계획 없음이 나의 계획'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그럴싸하게 내 태만을 합리화했다.

올해는 조금 다를 것 같다. 그렇다 해서, 새해 계획을 거창하게 세운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계획없음을 계획'으로 삼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해의 단위를 '하루치'로 잡기로 했다는 것.

앞서 한지 명인이 '한 달 인생'이라면 나는 하루살이다. 죽음은 언제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것. 엄밀히 말하면, 누구도 자신의 여생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다 '하루살이'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작년 세밑에 만난 한 권의 책 덕분이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 ⓒ 한겨레출판

 
작년 12월 중순, 서점에 갔다가 <아침의 피아노>를 만났다. 제목에 끌려서 집어든 책이었다. 책 앞장에는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죽기 사흘 전까지 쓴 기록이라는 안내문구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2018년 여름 무렵이었나. 한겨레신문에서 그의 부고를 보았던 기억도 난다(김진영 선생은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

<아침의 피아노>를 매일 아침마다 야금야금 읽었다. 짧은 글들이었지만, 술술 넘어가지 않았다. 투명하면서도 묵직했고, 기쁘면서도 먹먹했다. 김진영 선생은 암과 싸우면서, 또는 암과 동행하면서 환자인 자신이 어떻게 남은 인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처절하게 기록했다.


특히 자신의 전부였던 '철학'이 과연 남은 생존에 어떻게 쓰이고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본인 스스로가 목도하려는 모습은 끝까지 철학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에서였으리라.

죽어가는데... 철학이 무슨 쓸모 있을까

스러져가는 병든 육신, 허물어가는 육체에 철학 따위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단 한줌의 알약이나 한 번의 항암주사만도 못한 사상누각에 그치지 않을까. 하지만 선생의 글은 철학이 그의 마지막을 어떻게 견고하고 따뜻하게 지탱해주는지 보여준다. 평생 철학 밖에 몰랐던 철학자. 그의 글은 사랑으로 넘친다. 사랑이 곧 그의 철학이었다.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이 없다. 남겨진 사랑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그걸 다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 p.12

'인색한 부자의 곳간처럼 내 안에 쌓여서 갇혀 있는 사랑들. 이 곳간의 자물쇠를 깨고 여는일 – 거기에서 내 사랑은 시작된다.' - p.147

'나는 말해야 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 p. 166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접하고 쓴 글도 있다. 선생은 생전 첼로를 켰던 노회찬 의원의 모습을 회상하며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노회찬 의원에게는 정치의 본질이 음악'이었으며, 그것은 '사랑과 꿈을 간직한 가슴이고 그 가슴을 지닌 정치와 정치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지켜야했던 진실은 다름 아닌 사랑과 꿈'이었다는 선생의 말은 애잔하기만 하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야했던 사랑의 가치. 과연 오늘날 우리의 정치에 사랑과 꿈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하지만 정치의 본질이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선생의 말은 그냥 믿고 싶다. 순진한 바람이라 해도 믿고 싶다.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날 때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선생이 얘기했던 사랑이란 그런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애도일기'

선생의 기록은 '마음이 편안하다'라는 한 줄로 끝난다. 마지막에 선생은 무엇을 보았을까. 이 세상을 그는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걸까. 참으로 잘 살다 간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글쓰기의 책무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임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p.242
 
타자를 지키려는 그 마음이 곧 사랑이었다. 내가 스러져가고 있는데 타자를 지키려한다니...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랑이다. 흉내낼 수도 없는 사랑이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리라.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내 오늘 하루분 인생을.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은이),
한겨레출판, 2018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 #철학자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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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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