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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미 부추긴 스님도 나빠" 심청전 읽다가 뿔난 6학년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 30] 유은실 글, 홍선주 그림 '심청전'

등록 2020.01.06 12:11수정 2020.01.0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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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변화하는 만큼 책도 다르게 읽힌다. 누구에게나 여러 번 읽게 되는 책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심청전'이 그렇다.     

나는 초등교사를 하며 여러 학년을 가르쳤다. '전래 동화'는 어떤 학년에서도 써먹기 좋은 수업 도구였다. 누구나 알고 있고,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닿아있어 아이들이 쉽게 감정 이입했다. 심청전은 단골 소재였다. 그런데 올해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지금껏 내가 만나지 못한 새로운 심청전에 눈떴다.      


열 살과 읽은 심청전이 엄마와 아빠를 보고 싶게 만드는 그리움의 촉매였다면, 열세 살의 심청전은 의심의 불꽃이었다. '덮어놓고 효도'는 굿바이, 세상에 눈뜨기 시작한 청소년의 가슴으로 심청이를 만나보자.       
 

책표지 ⓒ 비룡소

 
옛날 금슬 좋은 부부가 살았어. 어느 날 엄마는 아기를 낳고 병에 걸렸지. 엄마 병은 약 먹어도 못 고치고 굿을 해도 못 고쳤어.

심청이 어머니는 출산 후 사망한다. 시작부터 비극이다. 홀아비가 된 심학규는 젖동냥으로 심청의 배를 불린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기꺼이 품을 내어준 까닭이다. 

"심청이 아빠는 눈도 안 보이는데 대단하다. 저렇게 키우고."
"젖 나눠주는 아줌마들이 더 대단하지. 자기 자식도 아닌데."

여학생들이 젖 나눠주는 아줌마를 추켜세운다. 아주머니들은 살아있는 사회안전망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부인까지 잃은 심학규가 딸을 살리려 노력한 건 맞지만, 젖을 물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심청은 죽는다. 약자 보호가 제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국가에서 심학규는 마을 공동체의 도움으로 딸을 살린다. 
청이는 지혜로운 아이가 되었어. 다섯 살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하더니 일곱 살부턴 아버지 집에 두고 밥을 빌러 나갔지. 

지금도 제3세계 국가의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학교 대신 거리와 공장으로 간다. 여성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사회에서 심청은 바느질하고 길쌈하며 부지런히 일한다. 따듯한 밥 따듯한 옷 지어 아버지께 드린다. 

"그럼 심 봉사는 뭐해요?"

P의 기습 질문이 들어온다. 답을 구해보려 빈틈없이 들여다봐도 심학규의 경제활동은 나와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맹인은 주로 점을 치거나, 악기를 연주해 생업을 이었다는데 심학규의 직업은 알 수가 없다. 설마 어린 딸에게 가장 노릇을 맡기고 나 몰라라 했을까? 심 봉사가 뭐하고 살았는지 책만으로는 알 수 없으니 판단을 보류하자고 했다. 
 

심청이 일하는 동안 심학규의 경제활동은 나오지 않는다. ⓒ 비룡소

 
그런데 다음 장에서 사고가 터진다. 심학규가 개천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몽은사 화주 스님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약속해버린 것이다.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서. 


"이 장면에서 화나는 사람?"

절반이 손을 든다. 나머지 절반은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른다. 답답한 듯 L이 한숨을 쉰다.

"집에 쌀 한 되 없는데 무슨 수로 삼백 석을 구해."
"스님도 나빠. 괜히 눈 뜰 수 있다고 말해서 부추기는 거 아닐까?"

이제야 나머지 절반도 소름이 돋는다. 시주 책에 자발적으로 기입한 부채의 무게가 실감 나기 시작한다. 1석은 한 말의 열 배다. 삼백 석은 어린 시절 내게 심청전을 들려준 할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일반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구하는 쌀'이다. 심학규는 집에 돌아온 청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다. 착한 청이는 어떻게든 구해 보겠다고 아버지를 안심시킨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심학규가 심청에게 기생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부모로서 책임감이 있다면 15세 딸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심청이에게 삼백 석을 대신 갚으라고 하는 꼴이니까. 심학규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뻔뻔한 건지 아니면 모두 다인 건지 의심스럽다. 

의외로 아이들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심청과 심학규는 특별한 부녀 사이이니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심학규가 삼백 석을 시주하겠노라고 약속하는 행위는 비판하면서도 심청이에게 공양미 사건을 고백하는 심학규를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뾰족한 수 없는 심청은 대가를 받고 인당수에 빠지기로 결심한다. 심청은 이 사실을 끝까지 숨기다가 뱃사람과 떠날 순간이 되자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밝힌다. 그런데 심학규가 오열한다. 
 
아가, 이게 웬 말이냐! 너를 죽이고 눈을 떠서 뭣하며 너를 팔아 눈을 사서 뭐하냐

여기서부터 헷갈린다. 심학규는 정말로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던 것일까?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 그 정도 자기 객관화가 안 되나? 하지만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 딸을 무척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 우리 반은 혼돈에 빠진다. 
 

인당수에 떠오른 연꽃. 우리 반 M은 마늘 같다고 했다. 사연이 맵고 비통하긴 하지. ⓒ 비룡소

 
설상가상으로 비탄에 빠진 심학규에게 심술보 뺑덕어멈이 달라붙는다. 심청의 목숨 값으로 받은 돈을 엿 사 먹고, 술 사 먹고, 고기 사 먹는데 펑펑 쓴다. 심학규는 절망에 빠져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는다. 회색톤으로 그려진 늙은이의 모습은 애처롭다. 
 
"아니, 내 딸 죽으며 남긴 돈을 어디에 다 썼소!" "아기를 가졌는지 맛난 게 당겨서 그럽니다." 뺑덕어멈은 거짓말로 둘러댔어.

초반에 득세하던 심학규 심판론이 쏙 들어간다. 뺑덕어멈 옆의 심학규는 불쌍한 피해자일 뿐이다. 잠깐 숨을 고르고 이 비참한 상황의 원인을 분석한다.

"결국 심학규는 딸도 잃고 돈도 바닥났어. 누구 잘못이 가장 큰 것 같니?"
"뺑덕어멈이요."

심학규라고 이름은 겨우 들릴락 말락 한다. 그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서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꼬여버린 가여운 사람이 되고 만다. 뺑덕어멈은 폐인이나 다름없는 심학규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해 재산을 탕진했으므로 가장 못된 사람으로 몰린다.

"그런데 뺑덕어멈이랑 심학규는 결혼까지 했거든. 심학규가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아닐까?"
"돈을 보고 옆에서 살살 꼬셨겠죠?"
"그래, 살살 꼬셨다고 쳐. 그래도 혼인하면 부부니까 남편이 감수해야 할 몫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 입이 튀어나온다. 어떻게 선생님이 뺑덕어멈 같은 품행 불량자를 옹호할 수 있냐는 항의다. 나는 심학규의 불행은 안타까워하되, 선택에 따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맞선다. 

모든 이야기는 시대의 한계를 품고 있다. 조선 시대의 심학규는 딸 잘 둔 아비이자, 처복 없는 남편으로서 존재한다. 책임은 면제받고, 동정과 섬김의 대상이 된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심학규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시각장애인 엄마였다면 전혀 다른 사건 전개가 펼쳐졌을 것이다. 
 

심학규는 부원군이 되어 행복한 말년을 누린다. ⓒ 비룡소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알다시피 눈물겨운 모녀 상봉식과 행복한 말년으로 끝난다. 번듯하게 옷 차려입은 심학규 주변으로 십장생들이 정답게 노닌다. 효도 판타지의 끝판왕이다. 아버지 잘 모시면 하늘이 감응 하사 자식도 잘 풀린다는 희망고문. 좋은 부모를 만나 효도하고 자식이 잘 살면 축하할 일이나, 나쁜 부모인 경우는 어떡하나. 

"심청전은 사실일까요?"
"당연히 지어낸 거죠. 전래동화잖아요."
"선생님이 볼 때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순간까지는 당시 현실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인당수 대목까지는 르포, 이후는 판타지. 귀신이 된 심청이의 환상으로 뒷이야기를 읽으면 눈물이 찔끔 난다. 우리 반 K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까짓 시주 약속 안 지키면 안 되나. 목숨을 바칠 만큼 중한 일인가. 그래도 부활하여 성공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청이는 어진 왕비가 되어 가난한 백성에게 빛이 되었지. 그리고 왕과 함께 귀하고 행복한 삶을 오래오래 누렸대.

기적을 믿지 않는 담임은 이야기의 마무리가 살아생전 심청의 내밀한 꿈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그저 아린다.
#심청전 #그림책 #유은실 #홍선주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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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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