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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신돌석 묘도 있는데, 왜 전봉준은 없어요?

[동작민주올레 56]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에서 동학농민혁명군 묘를 만날 순 없을까

등록 2020.01.06 19:28수정 2020.01.0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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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동작민주올레' 현충원길을 일곱 개 길(4.3길, 5월길, 독립운동가길, 친일파길, 전직 대통령길, 평화-통일길, 여성길)로 나누어 탐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볼 만한 곳임에도 미처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이에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을 중심으로 현장을 찾아 몇 회에 걸쳐 이야기를 더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 말
 

녹두장군 전봉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을 담은 좌상이 그가 처형당하기 전 갇혀 있었던 전옥서터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언제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 김학규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은 애국지사묘역과 무후선열제단, 임시정부요인 묘역과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으로 구성돼 있다.

독립유공자묘역에는 13도창의군 총대장을 역임한 이인영(1868~1909)과 평민의병장 신돌석(1878~1908)의 묘가 애국지사묘역에 있고, 농민의병장 김수민(1867~1909)과 평산의병 선봉장 이진룡(1879~1918)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이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

하루는 청소년들과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탐방을 하던 중 한 친구가 물었다.

"이인영 장군, 신돌석 장군도 있는데, 그럼 녹두장군 전봉준은 없어요?"

맞다. 의병장의 묘는 있는데, 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등 동학농민혁명군의 지도자는 독립유공자묘역에서 만날 수 없는 걸까.

누가 독립유공자인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헌법 전문에 명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를 함으로써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의 생활 안정과 복지 향상을 도모하고 나아가 국민의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선양함을 목적"으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을 제정해 "독립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을 예우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법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분류된다.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이고,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이다.

독립유공자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순국선열 또는 애국지사에게 그 기여도에 따라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 등 5등급의 건국훈장 또는 건국포장이나 대통령표창을 수여한다.

'상훈법' 제11조(건국훈장)에 따르면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 여기에 건국훈장 다음의 훈격으로 동법 제20조(건국포장)에 따라 건국포장을, '정부 표창 규정'에 따라 대통령표창을 수여한다.

결국 보훈처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의 결정으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면 현충원에 조성돼 있는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 의병운동에 나선 의병장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다
  

평민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묘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평민의병장 신돌석은 1896년부터 1908년까지 나선 의병활동으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순국한 자”로 인정받아 독립유공자가 되었고, 이로써 1965년에 생긴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될 수 있는 자격도 부여되었다. ⓒ 김학규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묘역에 안장돼 있거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이인영과 신돌석, 김수민과 이진룡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심의 과정을 거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895년의 을미의병과 1907년의 정미의병 등에 참전한 의병이 어떤 자격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국가보훈처에서 제공하고 있는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공적조서'와 '독립유공자공훈록'을 보면 그 사유를 알 수 있다.

먼저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의병장 이인영의 '독립유공자공적조서'를 보자.
 
"1. 1895년 유인석 등과 거의하여 1896년 여름에 해병하고 1905년에 다시 원주 의병대장이 되었고 그 후 양주로 옮겨 의병 원수부 13도총대장이 되었는데 그 때 각 도에서 회합한 의병 수가 만여 명이었다 그 후 즉시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분쇄하고 위납(僞納)을 취소하여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세우고 먼저 서울에 심복인을 보내 각국 영사에 호소하여 원조를 청하고 이인영이 먼저 3천 명을 인솔하고 동대문 밖까지 들어와서 왜적과 분전하였으나 저적할 수 없이 퇴진하였다. 또 후군도 여주에서 패전하였다.

2. 1909년 상주에서 산중에 숨어 있다가 황간에서 체포되어 대전옥에서 경성옥으로 갖은 악형을 받다가 옥중에서 순사하였다."
 
마찬가지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의병장 신돌석의 '독립유공자공훈록'의 내용도 이인영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략) 그는 1896년 평해(平海)에서 기병하였다. 이곳 일대는 일찍이 사귀어 온 동지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의지하고 따랐다. 때로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를 두려워하자 신돌석은 필마단창으로 적병을 수없이 사살하여 용맹을 사방에 떨쳤다. 이리하여 평해 일대에는 일본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1896년 말 영해군의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불길같이 일어난 전국을 휩쓸었던 을미 의병은 대체로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선유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받고 자진 해산하였다. (중략)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음) 아우 우경(友慶)과 함께 영덕 복평리 축산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대장기를 세우고 영릉의병장이 되었다. (중략) 1907년 봄에 중군장인 백남수와 김치헌 등 용감한 휘하 장령들과 함께 영덕 일대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협력을 얻어 가면서 진용을 보강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여 의진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 갔다. (생략)"
 
의병장 이인영은 1895년부터 1909년까지 벌인 의병활동으로, 의병장 신돌석은 1896년부터 1908년까지 나선 의병활동으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순국한 자"로 인정받아 독립유공자가 됐다. 이로써 1965년에 생긴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될 수 있는 자격도 부여됐음을 알 수 있다.

의병, '제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

그런데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1908년과 1909년에 순국한 의병장 신돌석과 이인영은 '상훈법'에서 말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있다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시 의병운동에 나선 의병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희망하기는커녕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평민의병장 신돌석의 경우 반봉건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일단 유보한다고 해도 고종의 밀명을 받아 거병한 이인영이 추구한 바 그 지향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상훈법'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이들을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있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있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다만 신돌석과 이인영 등이 '독립유공자법'에서 말하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순국한 자"임에 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상훈법'의 조문도 '독립유공자법'과 충돌하지 않도록 폭넓게 해석해 일단 의병도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혼란이 올 수도 있다. 
 

무후선열제단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위편에는 독립유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무후선열제단이 있다. 이 무후선열제단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김수민, 김진묵, 변학기, 이진룡, 조맹선, 지용기, 차도선, 채응언 등 의병장들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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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은 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까

이제 처음 제기한 의문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의병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있다면, 똑같은 논리로 동학농민혁명군도 당연히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동학농민혁명군도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한 사람들이지 않는가.

혹시 발발 시점의 차이 때문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해 일어난 의병운동은 1895년의 을미의병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1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군다나 의병운동의 시작을 일반적으로 을미의병으로 설명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 거병한 갑오의병도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1894년 3월 고부농민봉기로 시작된 1차 봉기의 경우 반봉건운동의 성격으로 진행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해 9월 일어난 2차 봉기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내정간섭에 맞서 일어났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해 일어난 반외세운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을 반외세반봉건운동의 본격적인 출발로 보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데, 동학농민혁명군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가 가지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발생 당시부터 '동학란'으로 불렸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은 '동비'라고 매도당했다. 마치 5.18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폄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바로 이러한 뿌리 깊은 거부감과 폄훼의 역사는 해방이후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1962년 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서훈이 시작된 이래 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상황에서도 동학농민혁명군은 검토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유족이나 후손들에게는 한으로 남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작된 동학농민혁명군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의 요구는 학술적 검토의 수준을 넘어 1990년대 후반부터는 입법 요구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결과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동학농민명예회복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동학농민군서훈추진위원회 1894인이 낸 광고(1997. 11. 29, <한겨레신문>)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작된 동학농민혁명군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의 요구는 학술적 검토의 수준을 넘어 1990년대 후반부터는 입법 요구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결과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 한겨레신문

 
이렇게 만들어진 '동학농민명예회복법' 제1조는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봉건제도를 개혁"하려고만 한 게 아니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에는 혁명군의 황토현 전투 전승일인 5월 11일이 국가기념일인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정부차원에서 첫 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동학농민명예회복법' 제정은 물론 동학농민혁명기념일까지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오늘에도 동학농민혁명군 참여자들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설립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을 위한 명예회복사업"도 하도록 했지만, 그 핵심인 동학농민혁명군의 독립유공자 인정 문제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거부감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부당한 현실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 이리저리 아무리 뜯어봐도 공평하지 않다. 

우리 청소년들을 포함한 국민들이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에서 의병운동의 거두 이인영과 신돌석뿐만 아니라,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싸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등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드라마 <녹두꽃> 포스터 최근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SBS에서 제작된 <녹두꽃>이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다. ⓒ SBS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 #동학농민혁명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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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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