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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민주주의의 무덤, 젊은 엄마들이 나섰다

[아파트 회장 분투기 24] 참여가 변화를 만들어 내다

등록 2020.01.07 09:11수정 2020.01.0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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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비리 발생과 부패의 근본적 원인은 주민참여의 부재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아파트에는 동대표를 하려는 사람은 드물고, 동대표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를 감시하는 사람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동대표 지원자가 많다는 것,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아파트에 문제가 많다는 증거다. 어쩌다 관리비가 높게 나오거나 당장 불편한 일을 당한 입주민이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따위 상황이 발생하냐고 고함치는 경우는 있지만, 제대로 된 참여나 감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파트는 주민주권의 무덤이다
 

아파트 비리 발생과 부패의 근본적 원인은 '주민참여의 부재'다. ⓒ 오마이뉴스

  
그렇다면 아파트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대표와 선거관리위원이 되는가? 상당수는 회의비를 용돈에 보태려는 노인들과 '대표님', '위원님' 혹은 '회장님'이란 호칭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까닭에 아파트 회장의 나이가 70세가 넘는 경우가 상당하고 어떤 경우에는 80세까지도 넘는 경우도 있다. 그뿐 아니라 어떤 경우엔 공사 입찰이나 아파트에 필요한 물품 구매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대표로 나서기도 하니 아파트엔 비리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는 이런 사람들로 득실거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상식적인 입주민들이 참여를 꺼린다는 점이다. 상식적인 입주민들은 이미 각종 미디어를 통해, 소문을 통해 형편없는 사람들이 자기가 낸 관리비를 흥청망청 쓴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관리비 만 원 더 낼 테니 너희들이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심정으로 차라리 모른 체하는 것을 택한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아파트 일에 무관심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공간이 바로 아파트인 것이다.

그렇다. 국가의 가장 작은 단위, 대한민국 국민의 70%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가 주민주권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아파트는 상식 있는 다수 입주민이 주인인 '민주주의'의 현장이 아니라, 타락한 소수가 무관심한 다수를 지배하는 '과두제'의 현장이다.
  
입주민들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생각한 것은 아파트의 일에 입주민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참여가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경험을 우리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 그래야 질 낮은 사람들이 동대표나 선관위원이 되기 어렵고, 나아가서 참여자 중에 일부가 동대표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위적으로 호소해서는 입주민들은 움직이진 않는다. 관리비에 관심을 가져야 관리비가 절감된다고 설명해도, 입주자대표회의에 참관해서 실제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감시해야 비리가 근절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입주민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는 걸 부인하지 않지만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관건은 참여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내가 섭외해서 동대표가 된 사람들과 계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의논에 의논을 거듭했다. 입주민들이 즐겁게 참여하면서 변화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아이템 찾기를. 의논 끝에 우리는 '놀이터 개선'을 찾아냈다.

우리 아파트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부부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나는 잘 몰랐는데 놀이터에 나가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끼리 놀이터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30년이 다 된 우리 아파트의 놀이터는 이용하는 아이들이 꽤 되었지만, 불편한 점들이 많았고 위험시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놀이터개선위원회'를 구성하다
   

나는 입주민들을 변화의 주체로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놀이터에 관심 많은 '젊은 엄마'들로 구성된 '놀이터개선위원회'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남기업

 
이를 위해 우리는 아파트 홈페이지에 놀이터 개선 사항에 관한 제안을 하면 그것을 반영해서 놀이터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런데 "그네를 바꿔주세요", "조합 놀이대를 설치해주세요"라는 단순한 제안만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면 구체적인 해법 찾기의 과제는 동대표 혹은 관리사무소로 넘어온다. 그런데 동대표 중에는 놀이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고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참여를 통한 변화의 경험을 누리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입주민들을 변화의 주체로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놀이터에 관심 많은 '젊은 엄마'들로 구성된 '놀이터개선위원회'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행히 동대표 중에 아내가 놀이터 개선에 관심 많다는 '젊은 아빠'가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젊은 엄마 5명을 섭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동대표의 아내는 평소 교류하던 젊은 엄마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위원회 활동에 참여할 5명을 모집해서 입주자대표회의에 전달했고, 입주자대표회의는 이 5명 중 한 명을 위원장으로 나머지 4명을 위원으로 임명한 후, 그 위원회가 개선 사항을 정리하여 제출하면 입주자대표회의가 최종적으로 의결하여 개선하는 것으로 프로세스를 확정했다.

제안작업에 착수한 놀이터개선위원회는 약 1달 동안 아파트의 많은 젊은 엄마들에게 직접 의견을 수렴하고, 놀이터 시설이 잘 갖춰진 아파트를 방문하여 개선 사항을 정리한 최종 보고서를 완성한 후 회장인 나에게 미팅을 요청하였다.

젊은 엄마들의 놀라운 열정

2018년 3월 30일, 관리사무소 회의실에서 놀이터개선위원회와 미팅을 가진 나는 그들의 열정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들이 만든 제안서는 ppt 30장 정도 되었는데, 거기에는 구체적인 개선 사항과 비용 추산 등이 담겨 있었다. 마치 놀이터 전문 회사가 만든 자료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유모차 진입로 확보, 그네의 쇠줄 교체, 소음이 나는 시소 교체의 필요성과 수리 방법, 젊은 엄마들이 쉴 수 있는 벤치 수리와 등나무 교체 등 놀이터 개선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었다. 감동한 나는 밥을 사주는 것으로 그들의 노력에 감사를 표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제외하고 그들이 제안한 거의 모든 것들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아파트의 놀이터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더 안전해지고 편리해졌다. 유모차 진입이 쉬워졌고 그네의 쇠줄을 안전한 재료로 교체했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 쉴 수 있는 벤치와 등나무는 위원회가 요청한 대로 수리하거나 교체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고 젊은 엄마들이 담소 나누는 모습을 보는 건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젊은 엄마들의 열정은 어디서 왔을까?
  

이들의 열정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아마도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하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 Pixabay

 
놀이터개선위원회 활동은 '무보수'다. 그런데 이들의 열정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사는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하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 안에 잠재된, 까닭이 자기에게서 나온다는 뜻의 '자유(自由) 의지'가 작동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연말에 놀이터개선위원회 위원 5명에게 시상을 했다. 그들의 '즐거운 참여'를 통해 입주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상장과 함께 위원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소액의 격려금도 지급하였다. 그들의 이런 경험이 또 다른 시도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 #아파트 비리 #아파트 민주주의 #마을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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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환수하는 토지공개념과 기본소득, 그리고 통일을 염두에 둔 대안 국가모델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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