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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병의 의로운 죽음' 막전막후... 대령-사단장의 엇갈린 주장

[민원 냈다가 수감된 육군 대령 ③] '사단장의 직접 조작지시 유무'에만 매달린 군검찰

등록 2020.01.13 11:14수정 2020.01.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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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국방부 영내에 있는 고등군사법원 대법정 내부. ⓒ 연합뉴스

 
형법상 무고죄는 '타인으로 하여금 처벌(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원이나 공무소에 대해 허위사실을 신고할 때 성립하는 범죄'다. 여기서 '허위신고'란, 객관적 진실에 반하는 일체의 사실로서 수사기관이나 징계권자가 징계권을 발동할 정도로 구체적인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이 허위사실을 신고하는 자에게는 피신고자로 하여금 형사처분이나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고한 사실이 설사 객관적 진실에 반하더라도 신고자가 진실하다고 믿은 경우에는 무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상훈 대령' 사건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이 대령은 2017년 7월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에 '과거(2011년 8월)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김OO 중장이 단순 익사사고를 후임병을 구하다 죽은 미담으로 조작하려고 했다가 문제가 되자, 또다시 직권을 남용해 부하인 자신으로 하여금 사건 조작자가 자신이라고 허위자백하게 했다'는 취지로 고충민원을 제기했다. 

그런데 권익위는 이 고충민원을 종결하거나 각하하지 않고 국방부로 이송했다. 그리고 국방부 검찰단은 이를 진정사건으로 접수해 김 중장에 대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직후 김 중장으로부터 이 대령에 대한 무고죄 고소장을 접수한 국방부 검찰단은 이 대령을 피고인으로 입건해 전격 기소했다.

군사법원은 이상훈 대령이 직접 군 수사기관인 국방부 검찰단에 신고한 것은 아니지만 '형사고발' '범죄행위' 등의 취지가 명시된 고충민원이 권익위를 거쳐 군 수사기관에 도달된 이상 그의 행위는 무고죄의 신고에 해당한다는 군 검찰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2018년 8월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무고죄를 인정, 이 대령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2019년 9월 국방부 고등군사법원(항소심)도 이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이 대령의 변호인은 대법원에 낸 상고이유서에서 '이 대령이 민원을 접수한 권익위를 형사소추 또는 수사를 할 권한이 있는 공무소 또는 공무원으로 볼 수 없고, 이 민원은 부패행위 신고 내지 고충민원으로 무고죄에 해당하는 신고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민원을 낸 취지가 대장 진급이 유력시되던 김 중장에 대한 '인사검증' 및 과거 허위보고의 누명을 썼던 이 대령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었지, 김 중장의 형사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이 대령이 정말 '허위의 사실'인 것을 알면서도 민원을 제기했는지다. 군사재판에서는 이를 놓고 군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군사법원은 이 대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다수의 증인들이 위증을 할 동기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증언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서류 작성에 관여한 사람들은 공소시효 7년의 허위공문서작성죄에 대한 처벌 가능성이 있었고, 1심은 형사처벌 위험성이 남아 있는 가운데 진행됐다는 점을 미뤄 보면 증인 중 일부는 자신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대령 측의 주장이다.


'구하고 죽었다'는 이 대령의 화상보고 있었나?

재판과정에서 일부 증인들이 사건 직후 자신들이 작성했던 진술서·확인서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을 이 대령에 대한 군 검찰 조사 이후부터 새롭게 주장했다는 사실도 논란거리다. 사고 당일 이상훈 대령이 화상회의를 통해 사단에 '선임병이 후임병을 구하고 실종됐다'는 취지로 보고를 한 적이 있다는 주장이다. 군사법원은 증인들의 이런 진술을 이 대령 유죄 판단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사고 당일 이 대령이 화상회의에서 '구하고 실종됐다'고 보고했다고 진술했던 사람은 2011년엔 사단 부관참모 1명뿐이었지만, 이 대령 재판 과정에서 사단 인사보좌관, 연대 인사과장, 연대 작전장교 등이 사고 당일 이 대령이 이런 내용의 화상보고를 하는 것을 "들었다"라거나 "보고한 것 같다"라고 진술했다. 7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사고 당일 연대 지휘통제실과 사단 지휘통제실(이하 지통실)은 화상으로 연결돼 있었고, 수시로 보고와 지시가 오갔다. 또 두 지통실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대령이 화상보고를 통해 거짓보고를 했다고 한다면 이 대령을 징계하는 데 그것보다 더 명확한 물증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령의 징계관련 서류에는 어디에도 그가 화상회의를 통해 허위보고를 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또 사단장을 대리해서 화상회의를 주재했던 사단 참모장, 연대 지통실에서 상급부대 보고를 총괄했던 연대 작전과장은 공판에 출석하거나 서면 진술을 통해 이 대령의 화상보고 내용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는 점도 실제 이런 화상보고가 있었는지 의구심을 들게 하는 대목이다. 사건 직후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일을 7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것도 여러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기억을 되살렸다는 점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다.

'사단장이 직접 조작 지시 했는가'에만 매달렸던 군 검찰

재판과정에서 군 검사가 관련자들에게 줄기차게 확인했던 것은 '사단장에게 직접 조작 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는지'였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관계자들은 이런 사실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 대령은 군 검찰 조사에서 "직접 증거는 없지만 당시 정황과 김OO 중장(사고 당시 사단장)이 그 이후에 저를 회유·압박해 허위진술을 강요한 것을 보면 김 중장이 사망 경위 조작을 직접 지시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라고 진술했다.

군사법원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이 대령이 민원을 제기하기 전, 김 중장이 병사 사망 경위 조작을 지시 내지 기획했는지 여부에 대한 어떠한 확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추측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고 민원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말 이 대령은 자신의 추측만 가지고 민원을 제기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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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17사단 병사 익사 사고를 보도한 KBS 뉴스 화면. ⓒ KBS 뉴스 화면 갈무리

 
다시 시계를 9년 전 사고 당일로 돌려보자. 2011년 8월 27일 낮 12시 20분께 17사단 101연대 3대대 9중대 소속 임아무개 병장이 한강에 빠져 실종됐다. 중대장은 낮 12시 30분께 대대장에게 휴대전화로 실종사고에 대한 보고를 했고, 다시 대대장은 낮 12시 50분께 연대장이었던 이 대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령이 받은 보고 내용은 "사계청소를 하다가 병장이 물에 빠져 실종됐다"라는 것이었다. 

이 대령은 즉시 사단장에게 군(軍)핸드폰으로 보고하려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낮 12시 56분 사단 참모장에게 대대장으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후 낮 1시 5분께 이 대령은 사단장의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고, 사단장과 통화가 되자 역시 대대장으로부터 받은 보고와 동일한 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별다른 지시 없이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통신기록에 따르면 이날 이 대령은 사단장과 두 차례 통화했다. 첫 번째 통화는 낮 1시 5분께 사단장의 군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최초 보고를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오후 2시 15분께 사단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다.

사단장과 이 대령의 진술은 여기서 엇갈린다.

엇갈리는 진술

이상훈 대령은 첫 번째 통화에서 자신이 사단장에게 "사계청소를 하다가 병장이 물에 빠져 실종됐다"라고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통화에서는 사단장이 "상황을 보니 살신성인한 것 같다, 의로운 죽음이다, 잘 처리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사단장과의 통화를 마친 뒤 20분 후 사단 정훈참모가 자신에게 '실종된 병사가 급류에 휩쓸린 후임병을 구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정리하여 언론보도를 하겠다'는 취지의 전화를 했기에 이 대령은 사단장이 정훈참모에게 사건 조작을 지시했다고 추측했다는 것이다.

반면, 사단장의 진술은 다르다. 사단장은 이상훈 대령이 낮 1시 5분 첫 번째 보고 혹은 오후 2시 15분 자신이 건 전화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 대령이) 수초 제거 작전 중이던 병사들 중 병장과 일병이 물에 빠졌고, 병장이 일병을 구해내고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취지로 보고했다"라고 주장했다. 보고 시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선임병이 후임병을 구하고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이 대령으로부터 받은 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령이 '선임병이 후임병을 구하고 죽었다'는 보고를 최초보고 때부터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대령이 대대장으로부터 '사계청소를 하다가 병장이 물에 빠져 실종됐다'는 보고(낮 12시 50분)를 받고 사단장과 통화(낮 1시 5분)하기까지는 단 15분이 흘렀을 뿐이다. 몇 명이 빠졌는지, 누가 빠졌는지도 확인이 안 된 상황에서 '병장이 일병을 구하고 실종됐다'는 구체적 보고가 가능했을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사단장에게 최초보고가 이뤄졌던 낮 1시 5분, 연대는 실종된 병장의 인적사항조차 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령이 실종된 병장의 신원을 파악한 것은 빨라도 사단장 최초 보고 후 10여 분이 흐른 낮 1시 20분께(연대 지통실 상황반장 김OO 상사 진술)였다. 연대 인사과장이 군사법원에 제출한 서면 진술서에 따르면 연대에서 실종자의 신원을 파악한 것은 낮 1시 45분~50분께였다.

문서로 작성된 연대의 최초 상황보고(낮 1시 33분)에는 실종된 병사의 이름이 없고, 낮 1시 57분에 작성한 두 번째 보고에서야 실종된 임OO 병장의 이름이 나온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연대에서는 빨라도 오후 1시 20분 이후에야 실종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연대에서 실종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당일 오후 1시께 사단 차원에서는 주목할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2011년 10월 수도군단은 병사 익사사고가 미담으로 보도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연대장 이상훈 대령과 17사단 헌병대장, 17사단 정훈참모를 징계했다. 당시 헌병대장은 직권남용(공정의무위반) 혐의로 감봉 1개월 징계를 받았다.

사고 초기부터 언급된 "의로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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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사단 헌병대장이 2011년 9월 6일 수도군단 감찰부에서 작성한 확인서를 보면 "2011년 8월 27일 오후 1시 6분경 참모장으로부터 익사사고와 관련하여 '사단장께서 의로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는 연락을 받고..."라고 돼 있다. ⓒ 김도균

 
그런데 헌병대장이 2011년 9월 6일 수도군단 감찰부에서 작성한 확인서를 보면 "2011년 8월 27일 오후 1시 6분경 참모장으로부터 익사사고와 관련하여 '사단장께서 의로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는 연락을 받고..."라고 돼 있다.

정훈참모는 2012년 2월 16일 3군사령부 법무실에 출석해 "2011년 8월 27일 오후 1시 20분경 참모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란 검찰관 질문에 "병장이 사람을 한 명 구하려다 실종되었다던데 미담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언론대응하라는 취지였다"라고 답변했다.

참모장과 헌병대장의 통화 시각(낮 1시 6분), 참모장과 정훈참모의 통화 시각(낮 1시 20분)은 모두 연대에서는 실종된 병장의 인적사항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때다. 또 참모장이 두 사람에게 전달한 내용은 이 대령이 오후 2시 15분께 사단장으로부터 들었다는 내용과 아주 유사하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병사 실종 직후부터 사단 차원에서는 일종의 지침 혹은 가이드라인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다만 헌병대장과 정훈참모는 참모장의 이런 지시에 대해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참모장은 1심 재판에 출석해 "누가 사단장이라도 이 사고가 악성(惡性)사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지 않았겠나 생각한다"라면서 "그런 의미가 오해가 돼서 헌병대장이나 정훈참모도 잘못됐는데..."라고 진술했다. 사고 자체가 부대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표현한 것을 헌병대장과 정훈참모가 오해했다는 취지였다.

"군대에서 사단장 말은 엄청난 무게... 지시는 실행의 의미"

그런데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 조직의 특성상, 사고 초기 단계의 이 같은 언급은 직접적인 조작 지시는 아니었다고 해도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한민국 ROTC중앙회 권익위원회 김준철 사무처장(예비역 육군 대위, <김오랑, 역사의 하늘에 뜬 별> 저자)은 "삼성그룹 임직원들이 이재용 회장의 말 한 마디, 호흡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려 애쓰는 것처럼 군대에서 사단장의 말 한마디는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다"라며 "특히 보고에서 시작해서 보고로 끝나는 곳이 바로 군대인데, 사단장의 지시는 그대로 실행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쉽다"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에서 '의로운 죽음이 되게 하라' 등의 언급은 사건이 왜곡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당일 병사가 실종된 현장에는 사단과 연대, 대대의 정보·작전·인사·군수 등 여러 계통의 간부들이 도착해 제각기 사고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또한 현장에서 파악된 내용들은 각 계통과 기능별로 보고가 이뤄졌다.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정보가 오가는 가운데, 진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키를 쥐고 있었던 인원들은 바로 수사권을 가지고 있었던 헌병 요원들이었다.

특히 현장에서 수사를 주도했던 헌병대 수사과장은 일찌감치 사고가 사계청소 중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수사과장은 2011년 10월 10일 수도군단 징계위에 출석해서 "병사들을 추궁해 보니 청소과정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고 청소하다가 휴식 중 어망에 물고기 등을 보며 쉬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진술했다.

이런 그에게 오후 2시 40분께 사단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단 인사계획장교였다. 이 장교는 "사단장님 지시로 정훈부에서 언론대응 브리핑 자료를 주는데 맞느냐"라면서 언론보도 초안을 읽어줬다. '분대원이 물에 빠진 것을 분대장이 구하고 실종됐다'는 내용이었다. 수사과장은 "내용이 틀리다,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라고 답변했다. 이때 인사계획장교가 읽어준 초안은 사단 정훈참모, 작전참모 등이 각 계통별로 확인한 내용, 현장의 중대장과 전화통화 내용 등을 종합해 작성된 것이었다. 이로 미뤄 살펴보면, 선임병이 후임병을 구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현장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병이 다른 계통들의 보고와는 달리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모장에게 보고됐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10분께 사단 지통실에 들어온 사단장도 참모장을 통해 이런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사단장은 "모든 것은 현장에서 확인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단장은 현장으로 떠나기 전 참모장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사단 지통실에 있었던 헌병대 작전과장이 작성한 상황일지에 따르면, 이 지시는 "관련 내용들을 확인하여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으로 조치하라" "내가 현장에서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이 내용을 헌병에게 전파하라"라는 지시였다. 참모장은 다시 헌병대 작전과장에게 "우리가 토의한 내용을 사단장님 출발하시기 전에 헌병대장에게 전파하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헌병대 작전과장은 오후 3시 45분 참모장 지시 내용을 문자로 현장에 있던 헌병대장과 수사과장에게 보냈다. 2분 뒤에는 헌병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장님께서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전달했다. 헌병대장은 "알았다"라면서 수사과장에게도 전파하라고 지시했다.

작전과장의 전화를 받은 수사과장은 크게 반발했다. 언성을 높이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난 모른다, 수사현장에 전화하는 것 아니다"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만약 이날 수사과장이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면 아마도 사건은 크게 왜곡되지 않고 단순 익사사고로 결론 내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단장의 지침을 전달받은 헌병대장은 수사과장과는 다르게 판단했다. 헌병대장 입장에선 이미 2시간 30분 전 '사단장께서 의로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참모장의 전화를 받았던 터였다.

2011년 10월 10일 수도군단 징계위원회에 출석한 헌병대장은 "언론보도가 구하러 죽은 방향으로 나간다고 하고, 특히 오후 3시 45분경 작전장교로부터 문자와 전화로 사단장께서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을 전해 듣고, '사단의 분위기가 이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되었고, 그 시점 이후로 스스로 결단하게 되었다"라고 진술했다. 수사과장 역시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헌병대장의 말에 '분대장이 후임병을 구하고 실종되었다'는 것이 사단의 지침이라고 생각하고 따르게 됐다고 말했다.

헌병대장과 수사과장의 수도군단 징계서류에는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헌병대장은 "실제 사실관계는 구하고 죽은 것이 아님에도, 그리고 사단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고 죽은 것으로 하자는 것을 '사단의 흐름'으로 받아들였다"라고 했다.

수사과장은 '사건 당일 지휘부에서 사실은 사망자가 분대원을 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보는가'라는 징계간사의 질문에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시가 이런 식으로 내려오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답변했다.

대법원 판단은?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사단장이 조작을 지시했다'는 이 대령의 주장 역시 그로서는 충분히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대령이 허위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권익위에 고충민원을 넣었다는 군사법원의 판단에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 헌병대장이 언급했던 '사단의 흐름'은 당시 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2개월이 갓 지난 이 대령이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고 현장에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단 관계자들 다수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언제든 탄로 날 위험을 무릅쓰고 이 대령이 사건을 조작해야 할 이유 역시 없어 보인다.

특히 사단장의 직할부대인 헌병대는 이 대령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조직이다. 헌병의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사단장에게 조작된 미담을 미리 보고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런 의문에도 군사법원은 이 대령의 무고혐의를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패소한 이 대령은 즉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법률심인 대법원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심리하지 않고, 군사법원의 법리 해석과 적용이 맞는지만 들여다본다.

이 대령의 변호인은 상고이유서에서 "원심(군사법원)의 판단은 무고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채증법칙을 위배한 잘못이 있으며, 적법한 증거조사 절차를 거치지 않은 군 검사 작성의 참고인진술조서에 대한 증거 채택은 채증법칙을 위반한 위법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 대령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고충민원을 제기한 것을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한 행위와 똑같다고 보고 무고죄를 적용했던 군사법원의 판단을 대법원도 그대로 받아들일 지 주목된다.

이상훈 대령은 기자에게 "사단장이 전화를 했을 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던 것"을 자신의 실수라고 고백했다. 2019년 9월부터 4개월째 국군교도소 감방에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이 대령은 "내 인생의 전부이자 보금자리였던 군이었다, 지난 30년간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걸어왔던 군인의 길을 후회하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다"라면서 "대법원이 군사법원과는 달리 올바른 판단을 해주리라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민원으로 수감된 육군 대령]
① 국민신문고 민원 때문에 교도소 간 대령을 아십니까
② '국방부로 보내지 말라'는 대령 민원은 왜 국방부로?
#이상훈 대령 #무고죄 #군사법원 #한강 익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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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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