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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했던 이봉창, 수류탄을 들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자신의 착각 깨닫고, 민족차별에 보복하다

등록 2020.01.08 09:50수정 2020.01.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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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8일, 나루히토 현 일왕의 조부인 히로히토 일왕(재위 1926~1989년)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는 일반적인 독립운동가들과 달랐다. 성장 환경이나 가치관 등이 여느 독립운동가들과 구별됐다.

1901년,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2가의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 쪽에서 서민 가정의 차남으로 출생한 이봉창은 3년간 서당 교육을 받고 4년간 소학교 교육을 받았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 6세 이상 한국인의 82.8%가 무학이고 10.9%가 소학교 졸업자 혹은 중퇴자였므로, 이보다 훨씬 이전 시기인 1910년대에는 이봉창의 소학교 학력이 평균보다 상당히 나은 편이었다.
 

이봉창의 생가가 있었던 장소. ⓒ 김종성

소학교 졸업 뒤 이봉창이 경험한 직업은 빵집 점원, 약국 점원, 용산역 역무원, 가스회사 직원, 어물전 점원, 가방 외판원, 철공소 노동자, 악기상점 점원 등등이다.

낮에 하는 일은 좀 힘든 일이었지만, 밤에 하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언뜻 보면 플레이보이로 보일 수도 있었던 그는 갸름한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머리를 빗어넘긴 뒤 검정 코트를 입고 어둑한 저녁 거리를 걸을 때가 많았다. 직장 일이 끝나면 그런 옷으로 갈아입고 유흥업소에서 밤을 지새우는 게 그의 낙이었다.

그는 원어민 수준의 일어를 구사했다. 오사카 사람을 만나면 오사카 사투리를 쓰고 도교 사람을 만나면 도쿄 사투리를 썼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가 고급 일어를 구사했으니, 해진 뒤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낮에 고된 일을 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생 방탕'이란 말처럼 그에게 잘 맞는 표현도 없었을 것이다. 낮에 힘들게 번 돈을 그는 유흥업소에서 죄다 소비했다. 1년간 그를 관찰한 김구는 이봉창 의거를 정리한 <동경 폭탄사건의 진상>에서 "술은 무제한이고 여자 좋아하기도 무제한"이라고 평가했다. 절제 능력이 제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면은 달랐다. 순박하면서도 강인했다. 김구는 "성품은 봄바람처럼 부드럽지만, 기개는 화염처럼 강하다"면서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매우 인자하고 호쾌하지만, 한번 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가 다반사다"라고 평가했다.

김구는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지도자란 지위 때문에도 그렇고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때문에도 그랬지만, 16세 때 과거시험에 낙방한 뒤 <마의상법>이란 관상학 서적을 연구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무명의 청년들을 발탁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거사를 일으키고 독립운동 진영의 분위기를 일신한 것만 봐도 김구의 사람 보는 능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봉창에 대한 위의 평가는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라 상당부분은 객관적 판단을 담은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

일본 동경했던 이봉창을 변화시킨 경험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의사상(像). ⓒ 김종성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청년이지만 "술은 무제한이고 여자 좋아하기도 무제한"인 이봉창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추상적인 이념이나 명분 때문이 아니었다. 아홉 살 때부터 서른한 살 때까지 22년간 일본제국주의를 뼈저리게 체험해본 것이 그가 수류탄을 쥐게 되는 원동력이 됐다.

이봉창은 일본을 동경하면서 성장했다. 일제강점 개시 2년 뒤인 1912년 입학한 소학교가 천도교 계열인 문창학교(용산구 청파동 소재)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제 치하 소학교였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는 식민지 교육의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은 선진 국민이지만 한국인은 후진 국민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한국인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그는 나이를 먹어갔다.

의거 뒤 체포돼 판사에게 제출한 <상신서(上申書)>에 따르면, 10대 시절의 그는 자신이 대일본제국 국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한국인 피를 타고난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다.

일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본어뿐 아니라 일본 노래도 잘했다. 못하는 노래가 없을 정도였다. 일 끝나면 유흥업소에서 살았으니까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한류가 아니라 '일류'에 빠진 식민지 청년이었다.

그가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 그 전까지도 그는 일본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살았다. 그랬던 그가 일왕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민족차별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추상적인 명분이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말로는 한국인도 같은 국민이라고 하면서도 한국인을 대놓고 차별하는 일본제국주의를 용서할 수 없어서 독립투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가 서른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민족차별을 느낀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차별은 이미 그 전부터 경험하고 있었다.

용산역에 근무할 때였다. 그는 1919년 8월 입사해서 1924년 4월 퇴사했다. 18세에서 23세까지 근무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일본인 역무원들이 근무기간이나 업무능력에 관계없이 무조건 고속 승진하는 것을 지켜봤다. 재판부에 제출한 <상신서>에서 그는 "당시 일본인 역무원 가운데서 약간 저능에 가까운 남자가 두세 명 있었다"면서 "이들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승진했다"고 기술했다. 또 이봉창에게 직무교육을 받은 일본인 신참이 불과 1년 뒤 이봉창을 감독하는 위치로 승진하는 일도 있었다. 직장인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일 중 하나를 체험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는 일본에 대한 기대감을 쉬이 버리지 않았다. 한국인도 잘살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이 머릿속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이 아니라 일본 땅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었다. 일본 땅에서는 한국인 차별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짐을 쌌다. 24세 때인 1925년 11월 오사카로 건너갔다. 상점 직원을 거쳐 이듬해 1월 그는 오사카 가스회사에 취직했다.

일본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근본적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그곳에서 훨씬 더 심했던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봉급을 떼이고 해고당하고, 한글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체포돼 유치장 신세를 지는 일들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이 그간 착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는 '식민 치하에 사는 한, 한국인은 어디서든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비로소 절감하게 됐다. 서른 살쯤 돼서야 그 점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은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데다가, 일본인처럼 되겠다고 일본어를 너무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깨달음이 늦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늦은 깨달음이 의외의 결과로 이어졌다. 뒤늦은 깨달음은 일본의 구심점인 히로히토 일왕을 상대로 분노를 표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가르침을 부탁한 뒤 그의 지시를 받아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한번 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가 다반사였다"는 김구의 평가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이봉창의 의거는 히로히토의 신상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잠깐 활짝 피었다가 좌우 분열로 금방 시들해진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제사회가 한국 독립운동에 주목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됐다. 이 의거가 원동력이 돼서 한국 독립운동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봉창 의거가 오늘날의 자유한국당과 뉴라이트(신우익)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자유한국당과 뉴라이트는 친일청산을 저지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식민지배 덕분에 우리가 잘살게 됐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하지만 이봉창의 분노는 그런 주장이 죄다 허위라는 것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런 주장이 진짜라면 이봉창이 '낮에는 힘들지만 밤에는 즐거운' 나날을 포기하고 위험하게 수류탄을 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봉창이 죽음을 각오하고 도쿄로 건너간 것은, 민족차별을 일삼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인간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일청산을 왜 해야 하는지, 식민 잔재를 왜 청산해야 하는지를 그는 후세의 우리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이봉창 #히로히토 #민족차별 #친일청산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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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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