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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없는 참혹한..." 고려대생 김두황의 이상한 죽음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1983년 군에서 의문사한 '특수학적변동자' 김두황

등록 2020.01.09 09:22수정 2020.02.2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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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17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고대생들이 군에 강제 징집된 뒤 부대 내에서 총상을 입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두황(경제학과)군 추모식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0일 필자는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 장아무개로부터 이런 이메일을 받았다.

"김두황이라고 고려대 80학번으로 사회대 학생장 하던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가 1982년 초여름에 내가 근무하던 춘천 103 보충대에 '특수지원자'로 (대학시위 중 '녹화사업'으로 군대에) 끌려왔다. 마음이 아파 내가 그 녀석(김두황) 머리를 밀어준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1984년 내가 전역하고 대학에 복학해서 보니 학교 대자보에 후배 김두황이 군에서 의문사했다고 녀석의 사진이 보이더라..."

지난 5일 나는 장아무개에게 "두황의 머리를 밀어준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는데 그 머리를 밀어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또 김두황이 어디 후배인지 물어봤다. 지난 6일 그는 내게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김두황은 내 고등학교 후배다. 내가 1979년 졸업생이고 두황이가 1980년 졸업생이지. 1982년 초여름 밤 내가 근무하던 춘천 103 보충대에 45인승 버스에 후배 김두황을 포함해 2~3명 대학생들을 강제징집 시키려 병무청 직원 5~6명, 경찰 2~3명 함께 새벽 1~2시경 도착했다. 미리 춘천 보안부대 중사가 우리 부대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지.
 

그 보안부대 중사는 김두환의 병적기록카드를 급조해와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상태로 가지고 왔었어. 그전에도 몇 번 그런 비슷한 일들이 있었지. 내가 보충대 인사과 병력분류담당이어서 그 부대에 오는 병력은 모두 내 손을 거쳐 가야만 했지.

그 병적기록 카드는 일반적인 입대병력과 달리 이름과 생년월일, 학력이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 빨간색 고무인으로 '특수지원'(대학서 시위하다 강제입영)이라고 찍혀있었어. 그 친구들은 입대 전 신체검사도 생략하고 데모하다가 갑자기 군대에 끌려왔지. 그래서 내가 키와 체중 이런 것을 그 친구들에게 그냥 물어보고 카드의 빈칸을 채우는 식으로 입영 전 신체검사를 군부대 현지에서 대신했던 거야.
 

병무청 직원과의 병력 인도인접이라고 불리는 병력인수가 끝나고 병무청 직원들이 다 돌아간 후에, 나는 김두황 등에게 왜 갑자기 군대에 끌려오게 됐는지를 물어보는 과정에서 김두황이 고려대 사회대 학생장이었는데 당일 날 시위 중에 경찰에 검거되었고, 바로 그날 밤에 춘천 소양댐 아래 103 보충대에 끌려왔고, 이력을 보면서 내 고등학교 후배인 줄 알게 된 것이지.

그래서 특히 맘이 안 돼서 대학생 머리 그대로인 채로 끌려 왔기에, 어차피 군대에서 머리를 개 취급당하며 밀어버릴 게 뻔하니까, 측은지심으로 후배 머리를 부대 이발소에서 새벽에 내가 직접 밀어주고 전방사단 신병교육대에 보내게 된 거지.

특수지원자는 전방부대에 배치하게 되어 있었고, 전방부대는 GOP(일반전초)라고 부르는 비무장지대 바로 앞에 근무하는 전투사단과 바로 그 뒷 선에서 전투사단을 대치하는 교육사단이 있는데, 그 친구들은 무조건 철책선 근무를 하는 전투사단에 배치하게 되어 있었어. 배치된 후에는 해당 전방사단 보안부대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되어있었지. 전방사단 보안부대의 중사 정도가 전투사단의 사단장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발휘하던 개 같던 시절이었지.



그 후 잊고 지내다가 제대 후 1983년 가을학기 복학 후 학교 대자보에서 바로 내가 직접 머리 깎아주던 두황이가 군대에서 의문사한 몇 명의 사진과 함께 있어서 내가 큰 충격을 받았지. 한동안 밥이 목에 안 들어가더라. 당시에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가 제법 있었어.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양심선언 하려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접었었어. 그래서 지금도 항상 김두황 등 그 후배들에 대해 마음의 부채가 남아있다."

초등학교 동창의 이메일을 읽으며 나는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다. 김두황과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 대학에서 시위 중 군대에 끌려온 그들은 '특수지원자'로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아래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한 다수는 어느덧 환갑을 맞이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러니 우리 세대는 모두 김두황과 같은 '녹화사업'(1980년대 신군부가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해 '프락치'로 활용하려 한 공작) 희생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부채가 남아있다.

김두황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리고 그는 왜 그토록 젊은 나이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 세대를 살아남은 필자가 김두황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참회는 그의 짧은 삶과 억울한 죽음에 대해 묵묵히 기록이라도 남기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김두황의 신음소리와 절룩거리는 모습 보았다"
 

김두황 ⓒ 의문사위 자료사진

 
김두황(1960~1983)은 1980년 3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현대철학회'에 가입했고,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계승', '전두환 군사정권 퇴진', '민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각종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1981년 여름에는 서울 구로지역 노동현장에서 활동했고, 그 후 고려대 현대철학회 총책임자로서 후배들의 조직관리, 신학기 투쟁 방향 수립, 지하 학생운동조직과 학회지도를 담당했다. 1980년 말경에 김두황은 서울제일교회(담임목사 박형규, 1923~2016) 대학생부 세미나팀에 참여해 일주일에 1~2회가량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김두황은 1983년 3월 15일 고려대 단과대학 간의 학회연합체 및 지하조직인 '81 통일체 연계, 83년 1학기 시위 모의사건(일명 3·7사건)'과 관련해 성북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김두황과 함께 조사를 받은 한아무개와 양아무개는 본인들이 "성북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바늘로 찌르기, 물고문, 경찰봉을 허벅지에 끼우고 얼굴을 때리는 고문 등을 수없이 당했으며, 김두황에 대한 구타나 가혹행위를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김두황의 신음소리와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훗날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그때 성북경찰서 정보과 학원팀장 반아무개도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일부 가혹행위가 있었으며 김두황에게도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던 이아무개와 윤아무개도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이렇게 김두황은 성북경찰서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사흘간 당하면서 조사받은 다음, 1983년 3월 18일 강제징집 조치되어 춘천 103 보충대로 입대했다.

김두황은 훈련단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1983년 5월 4일 자대로 전입했다. 김두황은 훈련단에서 신병교육 수료시에 훈련단장의 표창을 받는 등 훈련 성적이 좋았으나, 강제징집자를 철책 지역에 배치하고 주특기는 소총수만 부여한다는 방침에 의해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당시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대에서 김두황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는 않았으며, 특수학적변동자라는 신분상의 특이점 때문에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소대 서열에 나름대로 적응하려고 했고, 고참병이 부르면 복창을 크게 하고 재빠르게 뛰어가는 등 이등병다운 모습을 보였다. 소속부대 지휘관과 병사들도 김두황이 특수학적변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김두황 자신도 이를 주위에 숨기지 않았다.

의문사위 조사에 따르면, 당시 대학서클 동료들이 김두황에게 보낸 편지는 봉투가 뜯긴 채로 김두황에게 전해졌고, 편지 내용을 부대원들이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머리는 총탄에 부서져 몸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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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8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80년대 당시 학원통제를 했던 군사정부의 계엄사 연구자료와 문교부 등의 학원통제 자료를 발표했다. ⓒ 연합뉴스


의문사위 조사 결과 1983년 당시 헌병대 수사는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헌병대 수사기록은 1983년 6월 18일 강제입대한 지 3개월 된 김두황이 전우들과 함께 매복근무 중에 소변을 본다며 매복호 밖으로 나가 7m쯤 떨어진 곳에서 밤 11시 35분경 M16 소총을 연발로 머리 부분에 4발 발사해 사망했다고 했다. 김두황의 사체는 머리 부분이 총탄에 부서져서 아예 없어지고 몸통만 남았다.

그러나 의문사위 조사 결과, 사건 발생의 일시·장소·경위 등 모든 면에서 사실과 다른 점과 의혹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헌병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두황은 1983년 6월 18일 사건 당일, 동료소대 고참병들과 함께 매복근무에 나가 사망한 것으로 수사종결되었다. 그러나 김두황과 함께 생활한 소대원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소대 내에서 하사와 사병들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고참병들의 군기교육이 상존했다. 당시 황아무개 보급병은 "김두황으로부터 '고참들이 괴롭힌다', '매복근무에 나가 그곳에서 고참병들이 의례적으로 군기를 잡는다'고 전해 들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김두황이 부대 내에서 고참들로부터 구타 등을 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사건 당일 매복근무에 투입된 후 고참병들의 구타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의문사위는 보안대의 비협조로 부합되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 김두황은 다른 특수학적변동자와 마찬가지로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등으로부터 동향관찰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동향관찰내용을 보고하고 면담기록을 작성했다.

또한 대대 보안대 주재관, 연대 보안반장이 수시로 부대를 방문해 김두황의 근황을 파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소대원 박아무개와 보안반장 이아무개, 보안부대 운용과장 황아무개의 진술에 의하면, 김두황에 대한 동향관찰은 보안부대로 보고되었으며, 대대본부나 중대본부 등지에서 보안부대 관계자가 김두황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당시 대대 군수과 황아무개는 김두황으로부터 '입대 전에 학생운동에 참여한 동료들의 명단을 요구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이는 보안사나 보안부대 차원에서 김두황에 대한 심사와 녹화사업이 진행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특히 당시 경찰과 보안사령부는 김두황의 소속 서클인 현대철학회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한편, 학생운동권 팸플릿과 관련된 수사를 광범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의문사위 "사인 조작했다는 의혹 짙다"


김두황의 사망원인이 보안사의 녹화사업으로 인한 것인지, 부대 사병들에 의한 가해로 인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두황이 강제징집 된 후 동향관찰·녹화사업·고참들의 구타 등으로 인한 간접적인 원인이 작용한 것인지도 의문사위는 확인할 수 없었다.

김두황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과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과거 헌병 수사기록의 사건발생일시, 사망장소, 사체의 총알자국, 매복근무와 관련한 유아무개와 김아무개의 허위진술, 소대장의 매복근무자 인솔과 순찰 등 사건 실체가 조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근거들이 의문사위 조사 결과 상당 부분 확인되었다.

또한 의문사위원회는 헌병대가 김두황의 유서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의문사위는 민간 감정전문가에게 김두황의 유서로 제시된 글 '끝'과 김두황이 자대배치 직전 보안사 사무소에서 쓴 '나의성장기'의 필적감정을 의뢰해 "다른 필적"이라는 소견을 얻어냈다. 또 탐문조사를 통해 헌병대가 김두황의 유서라고 주장한 것은 김두황과 고려대 '현대철학회'에서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동료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 첨부한 김지하 시인의 '끝'이라는 시였음도 밝혀냈다.

헌병대는 사건 발생 장소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 헌병대는 3분초 인근(의문사위가 사건장소로 지목한 곳으로부터 1.5km 떨어진 장소)을 사건 발생 장소로 지목했다. 하지만 의문사위가 당시 보안부대 보안계장, 보안과장, 대대장, 인사장교, 소대장, 운전병, 소대원 등의 진술을 종합한 결과, 사건은 김두황의 근무지 인근에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당시 군 당국이 "김두황의 시체를 유기하고 사인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짙다"고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그럼에도 김두황 의문사의 자·타살 여부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의문사위는 김두황 사건을 '진실규명불능'으로 결정했다.

막내아들이 그렇게 가버리자

김두황은 6남매의 막내아들이었다. 강제입대한 지 3개월 만인 1983년 6월 18일 머리가 부서지고 몸통만 남긴 채 의문사한 막내아들의 죽음에 망연자실한 김두황의 부모들. 그들은 그다음 해인 1984년과 1986년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김두황이 의문사한 뒤 1년 남짓 지났을 때였다. 1984년 그의 부친은 어느 날 집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허수아비처럼 푹 쓰러지셨다. 그 후 부친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말을 못 하고 두 눈만 뜨고 계셨다. 그렇게 보름 정도를 누워 계시다가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김두황의 모친이 돌아가신 것은 그의 부친이 돌아가시고 채 두 해가 못 되어서였다. 1986년 청주에 살던 그의 모친은 김두황의 6월 18일 기일에 맞춰 서울에 올라오시려고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목욕탕에 들어가신 모친이 나오지 않아서 김두황의 형, 큰아들이 들어가 보니 모친은 구석에 웅크린 모습으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모친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남은 가족들은 또 한 번 통곡을 터뜨렸다. 김두황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 모친이 식음을 전폐하고 막내아들 김두황의 사진만 하루 종일 눈이 뚫어지게 바라보시는 것이 가족들은 큰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막내아들 김두황의 사진을 모친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춰버렸다.

김두황의 모친은 막내아들 사진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머릿속에 있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몰래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리고 또 그렸던지, 처음에는 서툴렀던 모친의 그림 솜씨가 나중에는 거의 막내아들 김두황을 쏙 빼닮게 그릴 정도로 늘어 있었다.
 

김두황 모친이 막내아들을 그리워하며 몰래 그린 김두황 ⓒ 의문사위 자료사진

  
"자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지난 2004년 6월 8일 의문사위는 김두황 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1980년 초 김두황과 함께 고려대 '현대철학회' 활동을 하다가 강제징집된 양창욱씨가 이렇게 증언했다.

"김두황은 강제징집 후 훈련단장에게 상을 받을 만큼 군 생활을 잘했다. 낙천적인 두황이가 자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두황이는 고려대 학생운동권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보안사에서 집요하게 조사를 했을 것이다."

김두황의 당시 부대동기인 황희동씨는 사망 직전까지 김두황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절친한 사이였다고 했다. 황씨는 당시 의문사위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애인이 변심해 두황이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상부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두황이는 그런 이유로 자살할 속 좁은 친구가 아니다. 두황이 군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고, 녹화사업 등에 대해 힘겨워하는 걸 봤지만 사건 당일에도 자살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두황이가 자살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당시 부대원들도 자살을 믿지 않는 걸 보면 (두황이 사건이 당시 헌병대에 의해) 조작됐음이 분명하다."

지금도 우리는 1983년 6월 18일 의문사한 김두황의 자·타살 여부를 모른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혹시 당시 김두황과 함께 근무했던 전우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두황이의 살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그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알려주길 요청 드린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남은 우리들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나오는 '김두황'을 인용하며 이 기사를 마친다.
 
김두황

늘 껄껄 웃던 사람
안암동 학도답게
거칠거칠 소탈한 사람
그 사람이 강제징집 백일 만에
머리 없는 참혹한 시체로 왔다
자살이라고?
여자 친구의 변심으로
자살이라고?
천만에 그의 여자 친구 변심한 적 없었다

나쁜 군대는 죽여 버리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과
아가리에 몽땅 착복하는 것이 하나
그놈들이 쳐들어와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사령관 대신 회장이 된다

고려대 학생 김두황
그대 머리 없어
살아서 와도
그대 술 퍼마실 입도 없구나
원수 앞에 부릅뜰 눈도 없구나
#김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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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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