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한곳에서 죽은 1200명의 조선인들... '천인갱'을 아시나요

전남 남악고 남악평화나비, 중국 하이난 일제강제동원 피해지 방문

등록 2020.01.10 14:59수정 2020.01.10 14:59
0
원고료로 응원

전남 무안군 남악고등학교 남악평화나비 학생들은 지난 2019년 12월20일부터 24일까지 중국 하이난 섬에 위치한 일제강제동원 피해지들을 방문했다. 사진은 일제강제동원피해로 죽임을 당한 조선인 1200여 명이 묻혀있는 ‘천인갱’ 방문 모습. ⓒ 손상욱

고등학생들이 해외에 있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지를 직접 찾아갔다. 학생들은 방문에 앞서 전교생의 마음을 담은 대형 태극기와 추모리본을 현지에 게시하는 등 일제강제동원 피해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전라남도 무안군 남악고등학교(교장 이행수) 자율동아리 남악평화나비 학생들은 지난 12월 20일부터 24일까지 중국 하이난 섬 곳곳에 있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지를 방문했다.

전라남도교육청(교육감 장석웅)에서 시행 중인 '청소년 미래도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프로그램에는 동아리 학생 10명과 인솔교사 1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제강제동원으로 끌려갔다가 생을 마감한 조선인 1200여 명이 한 곳에 묻힌 '천인갱'에서의 추모제를 시작으로 전독광산, 후석촌 만인갱, 석록역, 팔소항 등 일제강제동원 피해지를 방문했다.

이어 국내로 돌아오는 날에는 실제 위안소 건물로 쓰인 곳을 찾아가 억울하게 희생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넋을 위로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제강제동원 피해지 중국 하이난 섬은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1939년에 침략한 섬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철광석과 석회석 등 전쟁물자를 약탈하기 위해 조선인을 비롯한 중국인, 홍콩인, 대만인, 인도네시아인, 말레이시아인 등 수만 명의 노동자를 강제동원하고 학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학생들은 하이난 섬 일제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사전조사를 위해 사단법인 하이난 천인갱 희생자 추모회 관계자를 초대해 설명회를 진행했으며, 이후 각 피해지에 대한 조사를 학생 각자가 나누어 맡아 현지에서 설명하기도 했다.

남악평화나비 동아리회장 박찬수 학생은 "중국 하이난 섬은 동양의 하와이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에게 하이난 섬은 더위와 질병, 노동, 배고픔, 폭력, 학살이 가득한 지옥섬이었을 것 같다"며 "일본인들의 거짓에 속아 하이난 섬으로 끌려온 위안부 박래순 할머니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설명에 마음이 아팠다"라고 말했다.

남악평화나비 지도교사 이여옥 선생님은 "국내에서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박정규 할아버지를 모셔 대화의 시간도 갖고, 전남 해남에 위치한 옥매광산과 부산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목포 근대화거리 등을 탐방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며 "하지만 중국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잔혹한 현장에서는 일본의 잔악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특히 일제강제동원으로 중국 하이난 섬까지 끌려온 조선인 1200여 명 모두가 학살돼 '천인갱'에 묻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다. 이분들의 유해가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해본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프로그램의 현지안내를 담당한 사단법인 하이난 천인갱 희생자 추모회 신설아 대리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해 위안부와 군함도 등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천인갱'에 대한 인식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방문을 통해 해외까지 끌려와 고된 노역 끝에 생을 마감한 우리 선조들의 아픔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아울러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이 한참 놀고 싶은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슬픔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모습이 무척 기특했다"고 전했다.
 

조선인 1200여 명이 묻혀 있는 천인갱은 사단법인 하이난 천인갱 희생자 추모회에서 20여 년 동안 관리하고 있다. ⓒ 손상욱

조선인 1200여 명 한 곳에 묻혀

중국 하이난 섬 싼야시에 위치한 천인갱에는 조선인 1200여 명이 묻혀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이들은 '형기를 줄여준다'는 거짓에 속아 타국만리에서 갖은 노역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조선보국대 또는 남방파견보국대라는 명칭으로 1943년부터 끌려갔으며 일곱 차례에 걸쳐 총 2000여 명이 강제동원됐다. 국내로 돌아온 700여 명을 제외한 1300여 명이 하이난 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도로 및 항만건설과 광산채굴, 비행장건설 등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며, 굶주림을 비롯해 풍토병, 폭행, 고문, 살해 등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일본군은 1945년 일본의 패망직후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고자 남겨진 조선인 모두를 살해한 후 한 곳에 매장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천 명의 조선인이 묻힌 곳이라는 뜻을 담은 '천인갱'이라고 부른다.

한편, '천인갱'은 20여 년 동안 사단법인 하이난 천인갱 희생자 추모회(이사장 배영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유해봉환을 위한 사전작업을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남악고 교직원 및 학생들은 일제강제동원피해에 대한 마음을 대형태극기에 담았으며, 남악평화나비는 해당 태극기를 천인갱에 게시했다. ⓒ 손상욱

핏빗으로 물든 전독광산

일제강제동원으로 희생된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가 산을 물들였다.

이에 하이난 섬 현지인들은 전독광산을 예로부터 홍산광산이라고 불렀으며, 전독만인갱에 그 증거가 남아있다.

이시하라산업이 1940년부터 운영한 전독광산에는 조선인 및 중국인, 대만인, 인도네시아인, 말레이시아인, 홍콩인 등 평균 8000여 명의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근무했으며, 생산된 철광석은 유림항을 통해 일본 야하타제철소로 보내졌다.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은 철광석을 생산한 6년 동안 병으로 죽거나 굶어 죽고 때로는 맞아 죽는 등 1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는데, 특히 일본군이 영양실조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을 광산 근처에서 석유를 이용해 태워 죽였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전독만인갱은 1958년 주민들이 농업용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견됐다. 일대에서 발굴한 유해가 만 명을 넘는다고 해서 만인갱이라 불리며, 전독광산에서 근무하다가 사망한 강제동원 노동자들을 한 곳에 순차적으로 묻은 곳이다.

현지 주민들은 만인갱을 발굴한 당시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중국 하이난 성 정부는 1994년 11월 2일 전독만인갱을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2001년 초 전독만인갱사난광공(田獨萬人坑死難壙工)기념비를 세웠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석원산업으로 알려진 이시하라산업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미에현 구마노시에 위치한 기슈광산을 개발했다. 기슈광산에서는 총알을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를 생산했으며, 조선인 1300여 명이 강제동원 된 바 있다.
 

남악평화나비는 만 명 이상의 강제동원 노동자가 희생된 만인갱에서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 손상욱

살아있는 사람을 소각시설에

중국 하이난 섬 링수이현에는 살아있는 사람도 불에 태우는 소각시설이 존재했었다.

중일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자 했던 일본은 1939년 2월 하이난 섬을 침략했다. 이후 1940년 9월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점령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 중국, 네덜란드 등이 일본에 전쟁물자수출을 금지하는 ABCD포위망을 펼치자 하이난 섬의 목적을 침략거점에서 자원약탈거점을 바꾼다.

그렇게 시작된 자원약탈을 위해 수만 명의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하이난 섬으로 끌려왔으며, 노동자들은 광산과 도로, 철길, 항만, 비행장 건설 등지에서 힘겨운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일본군은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이라도 걸리면 자신들에게 감염되는 것은 방지하고자 소각시설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불태워 죽였다. 현재 소각시설과 같은 건축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후석촌만인갱 비석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후석촌만인갱은 중국군이 1970년 신병교육장을 건설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수많은 유골이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으며, 발견된 유골에는 대나무로 된 이름표가 함께 묻혀 있었다.

한편, 후석촌만인갱이 위치한 파인애플농장 관계자에 따르면 비석 뒤편에 수많은 유골이 묻혀있으며, 땅 밑을 30㎝만 파도 유해가 발견되는 상황이라 그 주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전했다.
 

중국 하이난 섬을 침략한 일본군은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병이라도 걸리면 소각시설을 이용해 불태워 죽였으며, 그 시설에 있던 곳에는 후석촌만인갱 비석이 세워졌다. 사진 속 비석 뒤편으로는 아직 수많은 유해가 묻혀있다. ⓒ 손상욱

일제 자원 약탈의 증거, 석록광산

중국 하이난 섬 서북쪽 창장리족자치현에는 일본 약탈의 증거 석록광산이 남아있다.

일본은 하이난 섬을 침략하기에 앞서 석록광산에 질 좋은 철광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35년 일본질소비료 주식회사가 구리광산을 조사하기 위해 하이난 섬을 찾았다가 석록광산을 발견한 것인데, 1939년 침략 직후 석록광산 개발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강제동원 노동자 4만5000여 명을 투입해 발전시설을 비롯해 광산채굴시설을 만들었다. 또한 석록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일본으로 옮기기 위해 팔소항을 건설했고, 석록광산과 팔소항을 잇는 52㎞ 구간을 철도로 연결했다.

중국정부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석록광산에 남아있던 노동자는 단 5800여 명이었으니 수만 명의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록광산 인근에는 당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인갱 비석이 세워져있다.

하이난 섬에는 석록광산을 운영하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와 전독광산을 운영했던 이시하라산업 외에도 아사노시멘트, 미쯔비시광업 등의 전범기업이 하이난 섬의 자원을 약탈했다.

한편,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시절인 1927년 우리나라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와 조선수력전기를 세우는 등 전범기업으로 활동한 바 있다.
 

하이난 섬에는 일제약탈의 증거 석록광산이 현재까지도 운영 중에 있다. ⓒ 손상욱

하이난 섬에 끌려온 조선보국대

팔소항은 일본군이 하이난 섬에서 약탈한 자원을 일본 본토로 옮기기 위해 건설한 항만이다.

그러나 자원약탈에 필요한 강제동원 노동자들을 하이난 섬으로 끌고 온 곳이기도 하다.

일본은 중국인 및 대만인, 인도네시아인, 말레이시아인, 홍콩인 등을 강제동원 했고, 이 중 조선인들은 팔소항을 통해 하이난 섬 곳곳으로 이동시켰다.

최석열씨는 1943년 당시 팔소항에서 일본해군 5함대 소속 군무원 배급소 책임자로 근무했으며, 조선보국대가 네 차례에 걸쳐 하이난 섬에 도착한 것을 목격한 것을 증언하기도 했다. 해당 증언은 MBC가 2001년 방영한 다큐멘터리 '하이난 섬의 대학살'에서 확인할 수 있고, 현재 유튜브에 게시되어 있다.

팔소항에도 억울하게 희생된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만인갱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이번 방문에서는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기념비는 하이난 성 정부가 1994년에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으며, 기념비 근처에는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물감옥 건물도 2000년 초반까지는 남아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동원된 조선보국대가 중국 하이난 섬에 첫 받을 딛은 곳이 바로 팔소항이다. ⓒ 손상욱

'위안부' 그 피해자들이 머물던 곳

중국 하이난 섬에는 실제 위안소 건물로 쓰이던 곳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싼야시 북쪽 반령저수지 끝자락 온천마을에 위치한 건물에는 현지주민이 거주 중이며, 일본이 하이난 섬을 침략했을 당시 온천을 개발함과 동시에 위안소도 함께 만들었다.

위안소에 있던 조선인 위안부 7명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위안소가 위치한 뒷산에 묻혔다. 이들의 묘소에는 나무로 만든 묘비가 세워졌으나 농장개발로 인해 묘비마저 사라진 상태다.
 

하이난 섬 그곳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었다. ⓒ 손상욱

일본은 대만척식주식회사를 통해 하이난 섬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위안소 76개소와 위안부 1300여 명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그 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2011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를 통해 하이난 섬 위안부에 대해 발표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주요 위안소에 5명~6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고, 특정 위안소에는 최대 50명이 넘는 한인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는 등 총 210명 이상의 조선인 위안부가 하이난 섬으로 끌려갔다.

특히 1945년 일본의 패망직후 하이난 섬에 남게 된 위안부 김옥주 할머니는 1946년 일본을 거쳐 부산을 통해 귀국했으며, 다른 위안부들 또한 그곳에서 만난 조선인과 결혼해 따로 귀국하는 등 하이난 섬을 떠나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만행으로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박래순 할머니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한 평생을 고통과 아픔으로 살아간 할머니는 1995년 하이난 섬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마을주민들은 할머니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줬다.

박래순 할머니의 증언은 중국 하이난 성 정부가 1995년 출간한 일본침략 증언집 '철제하적성풍혈우(鐵蹄下的腥風血雨 철발굽 아래 피비린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할머니는 1941년 경상남도에 있는 고향마을에서 '중국으로 가서 일본 군인을 위해 취사와 세탁, 간병 등을 하면 매월 급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거짓에 속아 열차로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무순(撫順)까지 연행됐다. 이후 1942년 2월 중국 본토에서 일본의 군함으로 하이난 섬 하이커우 위안소로 끌려갔고, 1943년 1월에는 싼야시에 위치한 위안소와 홍사에 위치한 구가원이라는 위안소까지 끌려 다녔다.

증언집에서 할머니는 "매일 접대하는 일본군이 적을 때는 서너 명, 많을 때는 10명 넘게"라며 "일본 군인은 애초부터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성욕을 풀어내는 도구 취급했다. 일본인의 삼엄한 감시에 도망갈 기회조차도 잡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 일제강점하 국외 한인 피해 실태조사 보고서 중국 해남도 지역(2005, 독립기념관)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손상욱씨는 사단법인 하이난 천인갱 희생자 추모회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남악고 학생들의 하이난 기행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유튜브 영상을 확인해주세요. (https://youtu.be/ZgyFyQIs3AA)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AD

AD

인기기사

  1. 1 "고등학교부터 온라인 개학... 데이터 비용은 무료"
  2. 2 코로나가 끝이 아니다, 쓰레기 대란이 온다
  3. 3 '부부의 세계' 김희애에게 완벽히 당했다
  4. 4 "굶어죽으나 병들어죽으나..." 탑골공원 100m 줄 어쩌나
  5. 5 "용퇴" 요구까지 나온 윤석열, 자업자득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