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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머리를 저주한다'... 참혹한 21살의 죽음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고 한영현, 보안사의 프락치 활동 강요에 절망... 강제징집 3개월 만에 숨져

등록 2020.01.15 09:22수정 2020.02.2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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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전두환 군사정권기인 지난 1981년 7월부터 1984년 5월까지 공군에서 군복무를 했다. 신병시절 고참들은 수시로 내게 "고참은 하나님의 형님이자 성모마리아의 기둥서방이다"를 큰 목소리로 몇 번씩 복창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살기 위해' 고참들의 지시에 복종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관련기사: "이승만 위해 속옷 벗어던지고 논개가 됐다" http://omn.kr/7p70).
   

한영현 ⓒ 의문사위 자료사진

 
한영현(1962-1983)은 내가 군 생활을 한창 할 때인 지난 1983년 4월 2일 운동권학생으로 강제징집 되었다. 그리고 입대 후 불과 석 달 만인 그해 7월 2일 군에서 사망했다. 필자 딸의 이름이 '영', 아들의 이름이 '현'이라 그런지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한영현'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한영현은 어떤 젊은이였을까? 그는 어떻게 해서 강제징집 된 지 3개월 만에 '두개골이 없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었을까?
  
1962년 3월 1일 출생한 한영현은 1981년 한양대 정밀기계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학교 내 동아리인 민속문화연구회에 가입했으며 이어 대학동아리들의 연합조직인 전국대학생탈반연합에서 활동했다. 그는 학생들 간의 세미나를 통해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토론했고, 학내외의 여러 집회에 참석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2년부터는 '인문과학연구회' 후배들의 세미나를 조직해 지도했으며, 부천에서 노동자 대상의 야학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 한영현은 성동경찰서에 문제학생으로 특별관리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기는 이웃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학생들이 '문제학생'으로 분류되는 '이상한' 시절이었다. 당시 성동경찰서의 '특별동향 관리기록카드', '한양대학교 문제학생 현황'에 따르면 한영현은 A급(주동자급) 문제학생으로 선정, 관리되고 있었다.

1983년 1월, 성동경찰서가 부천 야학에서 활동한 한영현의 선배를 조사하던 중 한영현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그다음 달인 1983년 2월 중순 어느 날, 성동경찰서는 한영현을 강제로 끌고 가 고문조사를 시작했다.

늑막염 환자도 강제징집

한영현은 당시 성동경찰서에서 2~3일간 자신의 의식화 과정과 사회활동내용 등에 대해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반 후인 1983년 4월 1일 한영현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 늑막염으로 군대에 갈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인 1983년 4월 2일에 한영현은 청량리경찰서에 오라는 전화를 받고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추가조사를 받고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 연락도 못 한 채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강제입대한 한영현은 훈련소에도 가지 않고 1983년 4월 10일부터 18일까지 군수사기관에서 그간의 활동에 대해 진술해야 했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는 지난 1983년 한영현이 강제징집 된 정확한 이유나 경위에 대한 관련 기록을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나 국방부 등을 통해 찾고자 했다. 하지만 기관들의 비협조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영현의 병적기록부 확인 결과, 대학생들의 정상적인 입영절차(자원휴학·징병검사·입영통보·입영)와 달리 한영현은 합법적 징병검사절차 없이 입대가 결정되고 입영된 것이 확인되었다.
   
한영현은 춘천 103보충대를 거쳐 육군 신병교육대로 전입했고, 이곳에서 1983년 5월 7일까지 신병훈련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19일 하루 훈련 받은 뒤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한영현은 훈련소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훗날 의문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에 한영현은 육군보안부대에서 특수학적변동자(시위하다가 강제징집 된 자)로 가혹한 조사를 받으면서 입대 이전 운동권 활동내용과 동료들에 대한 진술을 강요 당했다.
  
특히 당시 한영현 조사를 담당했던 한 장교는 "일반적으로 강제징집 된 병사들을 심사장교가 세운 계획에 의해 소환 심사 하는 것과 달리, 보안사의 지시에 따라 신병훈련 중인 한영현을 심사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 진술했다. 보안부대에서 특수학적변동자에 대한 이른바 '심사'는 우선 의식화 과정이나 운동권에서의 활동, 함께 활동한 동료 등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한영현도 이런 진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영현과 함께 강제징집돼 심사를 받고 있던 지아무개는 1983년 4월 20일 보안부대 조사실에서 한영현이 조사받고 있을 때 한영현이 작성한 진술서를 보았는데, 많은 양의 이 진술서에는 한양대 서클, 기독학생연맹(KSCF), 국제연합학생연맹(UNSA) 등과 비밀서클 등에 관한 사항이 너무 많이 기록되어 있어 놀랐다고 했다. 특히 장교가 작성한 2장 분량의 의견서에 "이것은 제2의 학림·무림사건이고 관련자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다시 한번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했다.
   
지아무개가 한영현에게 진술서에 '왜 이렇게 많은 내용을 적었느냐'고 묻자, 한영현은 "구로·인천지역에서 한 야학활동을 발설하면 야학회의 연합모임, 노동자들과의 연계 등이 더 문제가 될 것 같아 공개된 학생운동 쪽을 진술했고, 그중에서도 학교에서의 서클활동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아무개는 전역 후 진술서에 이름이 여러 번 나온 학생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학교로 갔고, 이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영현의 진술서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지아무개는 당시 보안부대에서 만난 한영현이 매우 불안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고 한다.
  
그의 팔이 철사로 심하게 맞은 듯 피멍이 선명했다

의문사위 조사에 따르면, 한영현은 1983년 6월 중순 군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만난 선배에게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야학과 관련된 부분은 말할 수가 없어 불가피하게 학교 운동권 계보를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휴가 중인 한영현을 만난 한 대학친구는 한영현의 팔이 철사로 심하게 맞은 듯 피멍이 선명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 진술했다.
  
또 휴가 중 만난 대학친구에게 한영현은 "정신력으로 모든 환경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나 자신이 없다, 나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볼 것이며 81학번뿐만 아니라 72학번까지도 여파가 미치는데 아마 커다란 배가 침몰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진술을 종합해 보면, 한영현은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의 입대 전 활동사항과 한양대 서클에 대해 상당 부분 진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보안사는 사단 보안대에서 강제징집 된 병사들에 대한 조사가 끝난 다음에도 이들을 소환해 조사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이른바 '활용'이라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프락치로 이용해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이럴 경우 사단 보안대는 대상자에게 특별휴가를 주고 서울 보안사로 찾아가라고 지시했는데, 한영현도 활용대상에 포함돼 보안사의 특별지시에 의한 휴가를 받게 되었다. 훗날 몇몇 보안사 퇴직자들은 1983년 당시 보안사에서 직접 한영현을 조사하고 휴가기간 중 운동권 동료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활용했음을 의문사위에 인정했다.
      
이렇게 한영현은 보안사 요원이 계속 감시하는 가운데 학생운동권에 대한 동향파악과 정보 수집을 강요 당했다. 김아무개는 당시 한영현이 휴가를 나와 '야학을 같이 한 사람들의 동향을 파악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학교 선후배에 대한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심하게 괴로워했다고 의문사위에 진술했다. 또 보안사 요원들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감시하자 한영현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면서 그들을 따돌려야 했고, 매일 일지를 작성해 보안사에 제출해야 했다고 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들도 휴가기간 중 거의 매일 한영현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보안사 요원들이 동행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결국 한영현은 자신의 진술로 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연행되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보안사의 프락치 활동 강요에 절망감과 갈등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영현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었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다, 죄책감으로 죽고 싶다"고 고백했으며, 휴가 중 친구들과 만났을 때도 계속 한숨을 쉬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시 권아무개는 한영현이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학내 운동권의 계보를 진술할 수밖에 없었는데, 운동권 후배로부터 '형의 머리를 저주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진술했다.
   
결국 한영현이 당시 보안사에 의해 시행되었던 이른바 '녹화사업'(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운동권 대학생을 강제징집해 프락치, 즉 첩자로 활용하려 한 공작)의 일환으로 조사 이후의 활용단계, 즉 프락치공작의 대상자로 휴가 등을 통해 한양대 운동권조직과 학생동향에 대한 정보입수 지시를 받았으며, 보안사의 강압적 수사와 함께 이런 프락치공작으로 인해 심각한 갈등과 정신적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고 의문사위는 추정했다.

가슴과 무릎에서 멍 자국을 보았다
 

한영현은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받은 조사에 대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호텔에 끌려가 일주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눈을 가리고 가서 어디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아스토리아 호텔이었고, 어떤 조직의 그림이 이미 그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또 동료 김아무개도 군대로 귀대하는 버스 안에서 한영현이 "처음에 갔더니 엄청나게 공포분위기를 만들더라, 보안대에서 얘기를 하다 보니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말렸고 많이 불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또한 당시 보안부대에서 같이 조사를 받았던 아무개도 한영현의 가슴과 무릎에서 멍 자국을 보았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증언했다. 보통 녹화사업 당시 보안부대와 보안사에서 조사받았던 강제징집 된 병사들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구타나 고문을 당하는 것이 빈번했던 점을 고려하면, 한영현도 매우 억압되고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한영현의 소속부대는 1983년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군사훈련을 했다. 훈련 중인 1983년 7월 1일 한영현은 분대원들과 함께 벙커에서 철야 훈련을 했다. 다음 날인 1983년 7월 2일 오전 6시 훈련이 종료되고 분대원들은 복귀명령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 그날 비가 내려 한영현의 소속 분대원들은 벙커 옆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대기하면서 오전 8시 30분경 중대 막사에서 가져온 아침식사를 했다. 이때 제일 멀리 떨어진 벙커에 있었던 박아무개와 남아무개는 밥 먹으라는 말을 듣고 오다가 총과 군장을 한영현이 있던 벙커에 놓고 왔다(다른 분대원들은 총을 텐트 내에 쌓아 두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분대장에게 한영현은 용변을 보고 싶다고 했다. 분대장은 비가 그친 다음에 가라고 했지만, 한영현은 못 참겠다며 다시 일어나 분대장에게서 라이터를 빌린 후 텐트 밖으로 나갔다.
  
분대장의 진술에 따르면 한영현이 나간 뒤 5분도 채 되지 않아 쾅하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분대장은 직감적으로 사고가 났다는 생각이 들어 제일 먼저 뛰어나갔는데, 앞쪽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바로 앞에 있는 벙커로 뛰어 들어갔다고 한다. 매우 좁은 벙커 속에는 한영현이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으며, 분대장이 뛰어가서 얼굴을 잡았더니 머리 뒷부분이 심하게 파열된 상태로 사망해 있었고, 사체를 확인해 보니 두개골이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한영현이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강제징집과 보안사의 녹화사업 때문이라고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보안사 조사과정에서 학생운동 조직과 함께 활동한 친구들에 대한 진술을 강요받았던 한영현은 자신의 진술 때문에 운동권 친구가 구속되고 활동했던 서클이 와해되었다고 생각해 심하게 자책했다. 이런 심정은 휴가 중 만났던 친구들과 나눈 대화, 부대에 복귀한 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특히 보안사의 프락치공작으로 휴가를 나온 한영현은 친구들을 통해 실제 학내상황에 대해 알게 되면서 더욱 죄책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게다가 친구들의 최근 동향에 대한 정보입수를 계속 요구받으면서 이를 거부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러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의문사위는 추정했다.

조작, 조작, 또 조작
    

추모비 ⓒ 의문사위 자료사진

 
한편 당시 중대장으로부터 한영현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대대장은 한영현이 다른 사람의 총기로 사망한 사실이 밝혀지면 부대관리 책임자들이 문책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해, 중대장에게 "한영현이 본인의 총으로 사망한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사실상 총기를 변경해 현장을 조작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중대장 이하 부대원들은 상급자인 대대장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한영현의 총기를 가져다가 허공에 1발 발사한 후 사망현장에 가져다 놓아 현장을 조작했다.
  
한영현은 보안사에 불려와 프락치활동을 강요받으면서 자신의 진술로 운동권조직이 와해되고 친구들이 자신을 기피하는 것을 보고 갈등 끝에 결국 자살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 수사기관은 한영현이 불우한 가정형편 등으로 삶을 비관하다 자살한 것으로 이 사건을 조작했다.

1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소우주와 같은 한 젊은이, 어느 집 귀한 아들이 군대에서 소중한 생명을 잃었지만 군 보고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로 기록되는 비정상, 비인간성과 광기를 고발한 바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기의 우리나라 군대는 여기에 더해서 망자의 죽음을 온갖 조작으로 더럽히는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나오는 '한영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한영현

대학 장학생으로
야학 선생으로 자랑스러운 학생이다가
그만 늑막염 병중인데
강제징집
입대해서도
보안대에 끌려가 똥물 토해냈다
그런 뒤 부대로 돌아와
벙커에서 총 쏘아 자살
자살이라고?

강제징집 그것은 80년대의 죽음
그것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밝혀야 하는 죽음
개가 짖는 한
물총새가 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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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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