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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와 조씨의 시대에 '홍씨 왕비'가 등장한 배경

[사극으로 역사읽기] TV조선 드라마 <간택-여인들의 전쟁>

20.01.13 15:17최종업데이트20.01.1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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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주말드라마 <간택 : 여인들의 전쟁>의 한 장면. ⓒ TV조선

 
TV조선에서 주말에 방영되는 <간택-여인들의 전쟁>은 '세도정치시대가 배경'이라는 점과 '사랑에 빠진 젊은 임금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조선 제24대 주상인 헌종(재위 1834~1849년)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드라마 제작진은 실존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고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세도정치시대 세 명의 군주인 순조·헌종·철종 시대에 사랑 문제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군주는 헌종 하나였다.
 
헌종은 관행을 깨트린 임금이었다. <간택> 속의 임금인 이경(김민규 분)이 보여준 것처럼, 그는 신랑 후보는 참석할 수 없는 간택 심사장에까지 나타나 궁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왕비를 자기 손으로 뽑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가 헌종과 후궁 김경빈(경빈 김씨)의 러브스토리다.
 
1834년 일곱 살 나이로 왕이 된 헌종을 위해 1837년에 왕비 책봉이 있었다. 효현왕후 김씨가 이때 선발됐다. 효현왕후가 1843년 사망하자, 두 번째 왕비를 뽑는 간택이 이듬해에 있었다. 이때 17세인 헌종은 13세인 김씨 후보에게 반했지만 왕실은 홍씨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렇게 왕비가 된 홍씨가 효정왕후다. 김씨 소녀를 잊을 수 없었던 헌종은 3년 뒤 그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이 소녀가 김경빈이다.
 
이 시기는 세도정치 시대였다. 왕실의 사돈 가문들이 외척이란 지위를 이용해 힘에 의한 정치, 세력에 의한 정치를 펼치던 세도정치 시대였다. 1800~1863년인 이 기간에 정권을 잡은 가문은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다.
 
세도정치시대를 주름잡은 가문

정조가 죽은 뒤 정조의 새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정순왕후 집안인 경주 김씨가 하나의 집권당을 이루고 국정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이 가문의 세도는 순조가 친정(직접 통치)하게 된 1803년 소멸됐다. 이것으로써 경주 김씨의 세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경주 김씨의 퇴장과 함께 새롭게 주역이 된 가문은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다. 그로부터 24년 뒤인 1827년에 또 다른 주역으로 떠오른 가문이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처가인 풍양 조씨다. 효명세자가 그해부터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풍양 조씨가 세도가문이 된 것이다. 2016년에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배우 박보검이 효명세자를 연기한 바 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만인 1830년 21세 나이로 요절했다. 살아서는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는 아들 헌종이 왕이 된 1834년 익종으로 추존됐다. 실제로는 임금 생활을 한 적이 없지만, 임금을 했던 것으로 간주됐던 것이다.
 
이 같은 법적 처리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의 지위를 단단하게 해주는 동시에 효명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의 입지도 튼튼하게 만들었다. 헌종 집권기간 중에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밀어내고 9년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이처럼, 세도정치시대를 주름잡은 가문은 김씨 아니면 조씨였다. 김씨와 조씨가 왕실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 사항이 하나 있다. 이 시대 왕비들 중에 김씨나 조씨가 아닌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효정왕후 홍씨가 바로 그이다.
 
순조(제23대 주상)의 왕비는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다. 추존왕 익종의 왕비는 풍양 조씨인 신정왕후다. 헌종(제24대)의 첫 번째 왕비는 안동 김씨인 효현왕후다. 세도정치시대의 마지막 임금인 철종(제25대)은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를 왕비로 뒀다. 이런 시대에 남양 홍씨인 효정왕후가 헌종의 두 번째 왕비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효정왕후가 간택된 배경
 

TV조선 주말드라마 <간택 : 여인들의 전쟁>의 한 장면. ⓒ TV조선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득세하던 시절에 남양 홍씨라는 의외의 가문이 외척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탐구한 논문이 있다. 2017년에 역사학자 임혜련이 <사림> 제62호에 기고한 '헌종비 효정왕후의 국혼과 남양 홍씨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1834년에 효정왕후가 간택된 배경을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규명한다. 그 시점의 집권당이 풍양 조씨였다는 점, 죽은 첫째 왕비가 안동 김씨라서 안동 김씨의 발언권이 남아 있었다는 점,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왕비 간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등을 근거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이 같은 제반 요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남양 홍씨라는 제3의 가문이 왕후를 배출하게 됐다는 게 이 논문의 결론이다.
 
남양 홍씨는 순조의 아버지인 정조시대 초기에는 막강했지만, 헌종 당시에는 미약했다. 그리고 이 가문은 안동 김씨 가문과 혼인관계로 연결돼 있었다. 이것이 순원왕후가 효정왕후를 택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풍양 조씨가 집권한 상황에서 순원왕후가 자기 가문에서 왕후를 데려오기는 힘들었다. 그는 제3의 가문에서 왕비를 뽑았다. 그는 자기 가문에서 왕비를 뽑지 않음으로써 풍양 조씨의 견제를 피하는 한편, 자기 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된 가문에서 왕비를 뽑음으로써 풍양 조씨를 견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 의도를 갖고 홍씨 후보를 염두에 뒀을 순원왕후의 눈에는 헌종의 태도가 돌발 변수로 비쳐졌을 것이다. 엉뚱한 후보한테 한 눈에 반한 손자를 보면서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헌종이 반한 김경빈은 광산 김씨였다. 정국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두 번째 왕비를 고르려 했던 것이다. 그런 헌종을 보면서 순원왕후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헌종은 김경빈을 왕비로 만들지 못했다. 효정왕후와 억지로 결혼해야 했다. 그 뒤 헌종은 효정왕후에게 차갑게 대했다. 1970년대까지 생존한 조선시대 궁녀들의 증언에 기초한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효정왕후와 헌종이 첫날밤부터 각방을 썼다는 이야기가 궁궐에서 대대로 전해졌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정치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던 사랑

그 같은 헌종의 태도로 인해 확실하게 피해를 본 가문은 남양 홍씨다. 남양 홍씨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효정왕후를 앞세워 토지 확장에 나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가문은 끝내 세도가문이 되지 못했다.
 
왕비를 배출하면 가문이 집권당이 될 수 있었던 시대에, 이 가문만 유독 '왕비를 배출하고도 세도가문이 되지 못하는 집안'이 됐다. 헌종의 차가운 태도가 남양 홍씨의 정권 장악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헌종의 태도가 풍양 조씨한테는 당연히 반가웠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차단하는 일로 비쳐졌을 것이다.
 
한편, 안동 김씨한테는 헌종의 태도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단할 수 없다. 효정왕후와 남양 홍씨를 앞세워 풍양 조씨를 견제하려던 안동 김씨의 의도는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안동 김씨에게 손해가 됐다.
 
하지만 헌종의 태도로 인해 남양 홍씨는 더 이상 강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와의 제휴관계에 여전히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안동 김씨한테 이익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 일국의 군주였기에, 그 사랑이 그 같은 정치적 영향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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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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