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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과 1월 1일이 '마법 같은 순간'인 이유

인생은 시간의 주검들이 이룬 무덤... 새해 계획 아직 늦지 않았어요

등록 2020.01.15 16:19수정 2020.01.1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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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독서기행 길에 젊은 선생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시겠어요?"

저는 머뭇거렸지만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그냥 지금 이대로 살래요."

그 선생은 다시 물었지요.

"왜요?


이번엔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지금의 '나'가 좋아요. 싫지 않거든요. 만약 20대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젊은 선생은 단념하지 않았지요.

"만약 지금의 의식, 지금의 지적 수준을 지니고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요?"
"하,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돌아갈 만하겠네요. 그러나 좀 여유롭게 살고 싶고, 학창 시절을 그렇게 아웅다웅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니 부질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셈입니다. 인생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무덤입니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 선생은 <나비와 전사>에서 '시간은 단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간은 무와 유의 경계를 넘나들고 관현악의 화음처럼 중첩되어 있으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어서 쉽게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연장하는 일이 불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뿐 아니라 공간도 간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책과 공간, 그리고 더 많은 갈등과 기쁨과 슬픈 일들의 조각들이 이마의 주름살을 만들고 마음살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조각들은 돌이킬 수 없으니 무덤입니다. 다만 그 무덤 위에 무엇이 피어날 것인지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지나온 길이 결정할 몫이겠지요.
 

2020년 1월, 아직 새해다. ⓒ Pixabay

 
저도 오십 중반을 넘고 있으니, 가끔씩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떤 때는 살아서 파닥거리는 생선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왜 나는 그런 젊은 날 그런 말과 행동을 하였던가? 왜 그리 지혜롭지 못하고 혈기만 믿고 가벼이 살았을까? 왜 그렇게 젊은 날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사색하지 않고 멋대로 시간을 죽였을까?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파도 내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므로 버릴 수 없고, 그 아픈 기억들도 지금의 나를 만드는 거름이 되었을 것을. 내 모습 중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어여쁜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그 숱한 시간의 주검들이 썩어서 피워낸 것임을 압니다.

다행이 우리들은 연속된 시간을 끊어서 이해하는 재주를 지녔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없고, 2019년과 2020년의 경계가 없지만, 우리는 말로서는 뚜렷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어디 해와 날 뿐이겠습니까? 일 년은 열 두 달로 구분하고, 한 달은 상, 중, 하로 구분하지요. 또는 첫 주 둘째 주, 셋째 주 등으로 구분하고, 30일 31일로 끊어서 표현하지요. 하루는 또 어떻습니까? 오전 오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24시간으로 구분하고 그 시간을 다시 60등분합니다.

시간을 작게 쪼갤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은 피곤하지만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1년 단위로 헤아리게 되면 하루의 잘못된 삶이 1년의 흠결로 남게 됩니다. 우리가 한 달을 단위로 살게 되면 하루의 즐거운 삶이 한 달을 즐겁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끊어서 표현하기 때문에 1월을 부끄럽게 살게 되면 1월 31일에 아쉬운 날을 비우고 2월 1일부터 더 곱게 살겠다는 다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저의 생각으로 지은 말이 아닙니다. 폴란드의 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12월 31일과 1월 1일을 '마법과 같은 순간'이라 하면서 '전혀 다른 시간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한 해는 아쉬움과 부끄럼으로 채워진 한 해였다고 해도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으므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봅니다.

'새해에는 좀 내 생각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시작하자. 좀 잘난 체 말고 잘난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술 사주는 사람이 되자. 책 좀 사지 말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돈이 좀 생기면 이웃들에게 기부를 하자. 일하는 시간을 좀 줄여서 이웃들을 집으로 불러서 차를 마시고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자. 말은 좀 줄이고 사색과 글쓰기로 마음살을 살찌우자.'

좀 많은가요?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다보면, 그렇게 죽어간 나의 시간들이 쌓일 테고 작년에 죽은 시간보다 더 윤택한 주검들이 쌓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난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생각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아직은 새해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경남 양산시 서창동에 있는 (사) '희망 웅상' 소식지에 실릴 수 있습니다. 희망웅상(http://hopeus.or.kr/)은 지역 활동 조직으로 노동자 여성 청소년 이주민 장애인 노인 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입니다. 오프라인 소식지에 실릴 수 있습니다.
#새해 #새해 계획 #시간 #고미숙 #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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