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부통령 지명의 '정치'

[누산따라 인도네시아 ③] 인도네시아 신정치(New Politics)의 상징, 부통령제

등록 2020.01.16 15:49수정 2020.01.2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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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산따라(Nusantara)? 자바 고어로 '섬 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가로로 긴 인도네시아의 영토를 표현하는 단어로, 한국을 표현하는 '한반도'와 같이 인도네시아를 부르는 애칭이다. - 기자말

[기사 수정 : 23일 오후 2시 47분]

앞선 연재(http://omn.kr/1ma6v)에서는 '다양성의 나라' 인도네시아의 다당제와 '거래의 정치'로 설명되는 신정치(New Politics)에 대해 설명하고 인도네시아 신정치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도네시아의 다당제와 거래의 정치가 발현되는 방식으로 부통령 지명과 내각 구성을 제시했는데, 이번 연재에서는 인도네시아 민주화(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 사퇴 이후) 이후 정·부통령 조합을 통해 부통령 지명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인도네시아는 대선에서 정·부통령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함께 출마한다. 부통령이 없는 한국의 정치제도에서는 부통령을 대통령 다음으로 권력 서열 순위가 가장 높은 총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부통령이 갖는 상징적·실제적 의미는 그보다 크다.

1999년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네 명이었으며 부통령은 여섯 명이었다. 이들 중 메가와티(Megawati Sukarnoputri)는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유숩 칼라(Jusuf Kalla, 아래 칼라)는 부통령을 두 번 지냈다. 인도네시아 정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연합과 연정은 부통령 지명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대통령 후보는 부통령 지명을 통해 상대당의 지지를 확보하거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한다. 1999년 와히드(Abdurrahman Wahid) 정부부터 조코위 2기 정부까지 정·부통령 조합을 통해 인도네시아 연합과 연정의 정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99년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통령 명단 ⓒ 박준영

수하르토 대통령 사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 받은 하비비 과도 정부에서는 부통령이 공석이었다. 다음 대통령은 1999년에 선출되었는데, 이때는 아직 직선제가 실시되기 이전으로 MPR(인도네시아 국회)에서 대통령, 부통령을 순차적으로 투표하여 간선제로 정·부통령을 선출했다. 와히드와 메가와티가 맞붙은 대선에서 와히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메가와티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로 인정받는 수카르노의 장녀인 메가와티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와히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에 이후 메가와티의 지지자들은 거리로 나와 강하게 항의했고, 당시 이슬람계 정당인 PPP의 함자(Hamzah Haz)라는 강력한 부통령 후보가 있었지만 MPR은 정국 안정을 위해 메가와티를 부통령으로 선출한다.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와히드와 메가와티는 국정 운영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와히드의 계속된 실정과 연정 약속 불이행으로 메가와티는 다시 와히드의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게 됐다.

와히드 대통령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2001년 대통령에서 하야한 이후 MPR은 메가와티를 대통령으로, 함자를 부통령으로 선출한다. 함자는 1999년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였으며 와히드 정부 내각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함자가 이끌던 이슬람 정당 PPP는 제3당으로, 함자의 부통령 선출은 충분히 예상되던 결과였다. 함자는 2004년 선거에서 마지막 정치적 꿈이었던 대통령에 도전하였지만, 3% 득표율을 얻으며 후보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을 얻었다. 2004년 이전까지는 MPR에서 대통령, 부통령을 순차적으로 선출했고 이후 대통령 선출에서부터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며 정·부통령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따라서 부통령 지명을 통한 연합 연정의 정치는 2004년 이후 대선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2004년 대선에서는 메가와티가 재선에 도전했으며, 경쟁자로는 군 장성 출신인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가 나섰다. 이 선거에서 승리한 유도요노의 부통령 파트너인 칼라는 성공한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와히드 정부에서 산업통상부(Kementerian Perdagangan) 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으며 내각에서 퇴출되었다가 메가와티 정부에서 다시 내각에 기용됐다.

칼라는 2004년 대선에서 Golkar의 대선 후보로 도전하려했지만, Golkar의 경선 며칠 전 돌연 유도요노의 PD(민주당)으로 옮겨 유도요노의 러닝메이트가 된다. 2004년 예선 투표에서 Golkar와 연정을 하던 PDI-P당의 메가와티는 PD의 유도요노보다 높은 득표를 했지만, 결선에서 역전당하며 유도요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여기에는 칼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결선투표를 앞두고 그는 다시 당적을 Golkar로 옮기며 유도요노-칼라 후보는 Golkar의 지지를 확보했다. 칼라는 비자바(Non-Java) 출신으로 자바 출신의 유도요노 대통령의 출신 배경을 보완했고 결선투표에서는 유도요노에게 꼭 필요했던 주요 정당 Golkar의 지지까지 이끌어내며 부통령 후보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재선에 도전한 유도요노의 부통령 후보 파트너였던 부디오노(Boediono)는 경제학자이며 메가와티 정부에서 재정부 장관으로 4%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유능한 경제 전문가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유도요노 1기 정부에서 인도네시아 은행 총재를 지낸 부디오노는 2009년 재선을 노리는 유도요노 대통령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합류한다. 유능한 경제 관료 이미지의 부디오노를 재선 러닝메이트로 지정함으로서 유도요노 대통령은 2기 정부에서 인도네시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 발전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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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코위 인니 대통령 두번째 임기 첫 내각 구성. 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조코위 대통령이고 일곱 번째가 마루프 아민 부통령이다. ⓒ AP Photo/연합뉴스

유도요노 1기 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칼라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도전하는 조코위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가 된다. 2009년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와 3위로 낙선했던 칼라는 사실 Golkar의 2014년 대선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Golkar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인이었지만 다소 불안정하다고 여겨졌던 조코위 후보에게 칼라는 일종의 '신용보증'과 같은 역할을 했다. 칼라는 당시 신인 정치인이었던 조코위 후보에게 안정감을 주는 역할과 더불어 지지층을 확장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칼라가 소속된 당이자, 조코위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PDI-P의 '라이벌' 정당인 Golkar는 당 차원에서는 상대 후보인 프라보워 후보를 지지했지만, Golkar 소속 유력 정치인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면서 지지자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로써 조코위는 참신하고 개혁적인 이미지에 안정적인 이미지까지 얻으며 유력한 후보가 되었고 대선에서 승리한다. 칼라가 두 번이나 부통령이 된 데에는 Golkar의 배경과 함께 현실적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가 큰 역할을 했다.

조코위의 재선 도전 부통령 러닝메이트인 아민은 여러 의미에서 가장 논쟁적인 후보였다. 그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지도자협회(Majelis Ulama Indonesia, 아래 MUI)의 회장이자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 단체인 NU의 최고 지도자였다. 또한 2018년 부통령 지명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로 역대 부통령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개혁적 이미지의 조코위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아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이후 조코위 후보의 개혁적인 면을 지지했던 일부 지지자들은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민은 조코위 후보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할 수 있는 후보이기도 했다. 아민은 이슬람 정당 출신 정치인이자 종교 지도자였다. 아민은 역대 정부에서 국회의원으로, 정부 정책 자문 등으로 이슬람 대표 지도자로써 역할을 했다.

조코위도 아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이유에 대해 그의 풍부한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 경험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시 조코위는 자카르타 주지사시절 부지사였던 아혹 전 주지사가 이슬람에 대한 신성 모독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며 조코위의 이슬람 신앙까지도 의심을 받고 있었다. 조코위는 이러한 의심을 과감한 정면돌파를 선택했고, 그의 과감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2019년 대선에서 조코위-아민 후보는 프라보워-우노(Sandiaga Uno, 아래 우노) 후보에 10% 이상의 격차로 승리했다.

2019년 대선 당시 조코위 후보의 아민 지명만큼은 아니었지만, 프라보워 대통령 후보가 부통령 후보로 우노를 지명한 것도 큰 화제가 되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사위이자 군 출신인 프라보워는 조코위 대통령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즉, 프라보워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부통령 후보를 고려할 때 조코위와는 상반된 고민을 해야했다.

1951년생인 프라보워는 상대 후보인 조코위보다 10살이 많았다. 이에 1969년생으로 상대적으로 젊은 우노, 당시 자카르타 부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우노는 성공한 기업인 출신으로 2015년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진 정치인이자 유망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강려한 자카르타 주지사 후보였으며 선거에서는 부지사 후보로 재선에 도전하는 아혹을 꺾고 당선되었다. 비록 프라보워의 대권 도전은 실패했지만, 부통령 후보 지명을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회로 삼은 점에서 조코위와 같은 전략을 썼다.

이처럼 비록 정·부통령 후보 러닝메이트가 실시된 이후 네 번의 대선이 있었을 뿐이지만 대통령 후보들은 파트너이자 행정부의 2인자인 부통령 지명에 많은 공을 들였다. 부통령 후보 지명을 통해 자신의 강점을 부각시키거나 약점을 보완했고, 무엇보다 다당제 체계에서 부통령 후보가 소속된 정당 및 지지자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부통령 지명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이상으로 인도네시아 정치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정·부통령 조합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정치와 여론을 살펴보았다. 다음 연재에서는 인도네시아 정치의 또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정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도네시아 #신정치 #누산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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