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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만의 재심, 이례적인 검찰 "무죄 구형합니다"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 연루됐다 다른 혐의로 '유죄' 이재영씨, 결국 재심 '무죄'

등록 2020.01.17 07:55수정 2020.01.17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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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로 불이 난 부산 미 문화원 건물을 소방차가 출동해서 진화하는 모습. ‘부미방’을 계획한 이들은 1980년 12월 광주 미 문화원 방화 때보다 더 큰 화재로 이슈를 일으키려 했다. 다량의 휘발유에 불 붙을 때 인화력을 예측하지 못하면서 부산 미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생이 숨지고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로 이어졌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미문화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문부식 등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은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묵인하는 미국을 규탄하며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사건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곧바로 합동수사본부를 꾸렸고,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연행, 조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부산으로 내려와 입대 준비를 했던 이재영 역시 방화사건의 한 멤버로 사법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재영은 3월 25일 군에 입대하고 만다.
 
원고(이재영)는 1982. 3. 25. 입대하여 4일째 되던 날  39사 보안부대로 연행되었고, 그날 오후 부산지역 보안부대(501보안대)인 삼일공사로 넘겨져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혐의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이재영씨가 작성한) 서울고법 답변서
 
군에 입대한 이씨는 입대 4일 만인 1982년 3월 29일 501보안대에 연행되었다. 연행된 후 영장 없이 20일 이상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았다. 이 곳에서 조사를 받은 것은 이재영만이 아니었다. 친구였던 강OO도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강씨는 재심 재판부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982. 4. 8. 15:00경 근무하고 있던 동사무소로 일명 삼일공사라고 불리던 501보안부대 전화가 왔습니다. 동대장이 어디 가지 말고 대기하라는 겁니다. 오후 4시경 국방색 지프차가 와서는 나를 태우고 삼일공사로 출발했습니다. (조사받는 동안) 잠시 휴식을 하는 동안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변을 보고 있던 중,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이재영이 소변을 보러 오던 중이었습니다. 얼굴을 마주치자 이재영은 저를 보고 '형' 하고 불렀지만, 저는 순간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쉿' 하고 말았습니다.
- 재심 재판부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혐의는 풀렸지만... 다시 시작된 고문

그렇게 501보안부대에서 일주일 정도 조사를 받던 중, 부산미문화원 사건의 주범 문부식이 자수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재영씨의 혐의는 모두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이재영씨는 훈련소로 복귀하지 못했다.
 
혐의가 풀린 다음부터는 훈련소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당시 야간대학에 다니던 제 담당 수사관 리포트를 작성해 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나더니 상부의 지시라면서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서 제가 일주일 정도 조사받을 때 고문을 너무 심하게 받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거든요. 특히나 제가 보안사로 연행될 때 저의 집에서 압수한 여러 가지 책자가 상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소위 불온문서이기 때문에 구속을 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담당 수사관이 바뀌면서 질문내용도 바뀌었습니다. 북한방송을 얼마나 들었느냐, 김일성을 얼마나 찬양했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해대었습니다.
- 재심 재판부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이씨는 그런 일들을 한 적이 없다며 완강히 부인했지만, 수사관들은 이미 정해진 답을 진술할 때까지 이씨를 끊임없이 고문하며 괴롭혔다.
 
큰 철제 의자에 전신을 묶어 놓고 머리를 뒤로 제치고 큰 주전자 몇 개에 물을 받아와 기절할 때까지 붓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위 '방첩대 몽둥이'라는 큰 몽둥이로 무릎과 허리를 마구 때립니다. 물고문 하다가 정신을 잃을 만하면 전선을 양쪽 엄지손가락에 감고는 기절할 때까지 전압을 올립니다. 며칠이 흘렀는지 모르는 가운데 매일 같이 고문은 계속되었고 한참을 지나 북한 관련 조사를 합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또다시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 재심 재판부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1982년 군사재판 기록 ⓒ 변상철

 
열흘쯤 지나 이씨는 자백하고 싶어도 몰라서 자백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수사관에게 원하는 대로 진술해 줄테니 제발 불러라도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때 자신을 비웃듯 씨익 웃던 수사관의 미소는 지금도 떠올리기 싫다고 했다.
 
사회주의를 사모하고 김일성을 찬양한다는 내용을 진술조서나 피의자 신문조서로 다 작성해 주었는데도 다음날이 되면 수사관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들어와서는 내용이 전부 내 생각밖에 없고, 다른 증거가 없어서 상사에게 욕을 들었다며 화풀이로 다시 고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고등학교 서클 동기생들을 '삼일공사'로 불러 협박을 하면서 제가 동기들에게 사회주의 사상교육을 시켰다는 진술서를 확보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 재심 재판부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그가 읽었다는 불온서적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자본론>, <정치경제학>, <국제경제 강좌> 등 경제서적이다. 이러한 책을 '탐독'하는 활동이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하고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검거 후 두 달여인 5월 중순까지 조사받던 이재영씨는 결국 자신을 조사했던 보안대 수사관이 참여한 상태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다. 결과는 징역 10개월에 자격정지 10개월.

그는 그렇게 범죄자가 됐다.

용기 내에 시작한 재심에서 검찰의 무죄 구형

실형을 살고 나서도 그는 보안 처분으로 인해 7년간이나 또다시 묶인 몸이 되었다. 그의 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늦게나마 다른 이들의 재심 무죄선고 소식에 용기를 얻어 '지금여기에' 단체의 도움으로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다.

재심신청 후 한 번의 공판이 열리고 재심 신청 이유, 증거의 동의 여부, 새로운 신규 증거 제출여부를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결심 날짜가 잡혔다.

그런데 결심공판에서 검사의 구형은 뜻밖이었다. 재심의 이유가 명백하다는 취지의 진술과 함께 검사가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이날 검사의 무죄 구형은 판사의 무죄판결보다 더 기뻤다고 이재영씨는 말한다. 검찰로부터 사과를 받은 듯 했다고 한다.

1월 16일 오후 2시. 선고가 열리던 서울고등법원 312호로 판사가 입장하고 이재영씨의 인적사항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판결.

"1982년도 군법재판을 받은 사건에 대해 재심을 신청했고 재심 개시가 결정된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양형부당을 이유로 다퉜지만 당 심에서는 검사가 공소장을 변경하였고 재심 개시 결정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당시 피고인이 소지한 책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는 자백 증거가 장기간의 불법구금과 고문, 폭력 등으로 인해 임의성이 없다고 보일 뿐만 아니라 기타 증거를 살펴보아도 이것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목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소사실은 증명이 없어 유죄로 보기 어렵습니다.

주문 원심을 파기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38년 만의 진실규명은 이렇게 단출하게 끝이 났다. 재판정에 자리한 친인척들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리둥절해 했고 법정을 나오고 나서야 무죄를 실감했다.

"그때 그 사람들, 미안하다 한마디 하면 원이 없겠다"
 

무죄선고 후 사진 찍는 이재영씨 ⓒ 변상철

  


법원을 나와 걸으며 이재영씨에게 소감을 물으니 "좀 허무하네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38년의 시간동안 그를 옥죄었던 족쇄가 풀린 순간 그의 감정은 복잡해보였다.

다른 사건 조사로 뒤늦게 도착한 심재섭 변호사는 "다른 재심 재판에서는 판사가 대신 사과한다는 식의 서면을 적었는데 오늘 선고에서는 그런 말이 없었느냐"라며 아쉬워했다. 그렇게 무죄를 축하하는 현수막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이재영씨를 위해 자필 진술서를 써준 이모님은 아쉬운 마음에 이야기를 전했다.

"재영이 어머니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게 안타깝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뒤따라오던 이재영씨는 마지막 바람을 이야기했다.

"당시 나를 재판했던 탁재업이나 한호형, 황수길은 어디서 잘 살고 있나 모르겠어요. 내가 이렇게 무죄를 받고 났으니 어디서 내 소식 듣겠죠? 나한테 미안하다 한마디만 하면 소원이 없겠네요."
 

무죄 선고 후 법원 앞에서 가족, 친척,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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