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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이 독립운동 유적지였다는 걸 아세요?

[대구완전학습] 독립운동 유적지 팔공산 동화사, 백안동, 미대동을 찾아서

등록 2020.01.19 11:08수정 2020.01.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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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의병부대인 산남의진의 선봉장 우재룡이 본부를 차려두고 항일 투쟁을 펼쳤던 팔공산 동화사의 대웅전 ⓒ 정만진


팔공산이 독립운동 유적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동화사에는 1908년 3월 이후 산남의진(山南義陣) 선봉장 우재룡이 의병들을 이끌고 주둔했다. 정용기 의병장이 몇 달 전인 1907년 12월 7일 순국한 이래 산남의진은 관동을 거쳐 서울로 북상하는 계획을 포기하고 경상도 일원을 지키기로 결의했었다.

이때 우재룡은 영천 서부 지역 책임을 맡았고, 본부를 동화사에 차렸다. 하지만 우재룡은 8월 일제에 피체되었고, '내란죄'로 종신형 처분을 받아 투옥되었다. 18살이던 1902년에 구한말 한국 군대인 진위대에 자진 입대했던 우재룡이 무기징역의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우리 나이로 25세였다.


대웅전 옆 심검당에서 젊은 승려들, 독립운동 결의

동화사는 1919년 3월 28일에도 독립운동 결의 장소가 되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을 겪은 중앙학림 학생 윤학조(25세)가 고향(달성군 공산면 진인동)에 와서 동화사 학림의 청년 승려들에게 만세 운동 궐기를 촉구했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 젊은 학승들은 심검당(사진)에서 만세운동을 결의한 후 시내 덕산정시장에서 30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 정만진

 
허선일 ‧ 권청학 ‧ 김종만 ‧ 이기윤 ‧ 김문옥 ‧ 김윤섭 ‧ 이보식 ‧ 이성근 ‧ 박창호 등 19~23세 학승들이 동화사 심검당에 모였다. 이들은 사람이 운집하는 부내(시내) 덕산정 시장의 3월 30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 운동 준비는 동화사 포교당이던 보현사(남산동 932-35)에서 했다.

수 천 명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열린 덕산정 시장 만세 시위는 대단한 위세를 떨쳤고, 학승 10명은 모두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10개월씩 실형을 살았다.

백안동 장터에서 거사하려다 사람 많은 시내로 옮겨

학승들이 만세 시위 장소로 처음 생각한 곳은 동화사 아래 백안동 장터였다. 그것이 논의 과정에서 시내 덕산정 시장으로 바뀌었다. 대처 시장에서 거사를 일으켜야 군중들이 크게 운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 탓에 백안동은 독립운동 성지로 기억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백안동은 이미 이종암을 낳은 마을이었다.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은 팔공산을 등지고 있는 백안마을에서 태어났다. ⓒ 정만진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이 태어난 백안동


1896년 백안동에서 태어난 이종암은 여섯 살 때 시내 서상동 성벽 아래로 이사를 왔고, 22세 때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대구은행 직원이던 이종암은 1918년 2월 은행돈 1만500원(현 시세 10억 원 수준)을 들고 만주로 갔다.

이종암은 길림성 밖 화성여관을 세 얻어 김원봉을 비롯한 청년 지사들과 합숙하면서 폭탄 제조술 등을 익혔고, 자신이 가져간 돈을 독립 자금으로 활용하여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 부단장으로서 맹렬한 항일 운동을 펼치던 이종암은 끝내 일제에 피체되었고, 13년형을 언도받고 악랄한 고문에 시달리던 중 35세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만세운동지, 미대동

백안동 삼거리에서 지묘동 쪽으로 내려오면 이내 미대동이 나타난다. 미대동 또한 대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 유적지이다. 이곳에서는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미대동 사람들은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사진은 미대동 독립만세운동의 현장 여봉산이다. ⓒ 정만진

 
1919년 4월 26일 인천 채씨 집성촌인 미대동 채갑원의 집에 문중 선비 채희각, 채봉식, 채학기 등이 모였다. 이들은 마을 동쪽 여봉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했다. 28일에도 채명식, 채송대, 채경식, 권재갑 등이 합세하여 재차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이 만세운동에는 당시 대구농림학교 학생으로서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보여온 채충식도 한몫을 했다. 당시 채충식은 27세, 채갑원과 채희각은 26세, 채경식 25세, 채송대는 24세, 채봉식은 21세, 권재갑은 20세, 채명원과 채학기는 18세였는데, 모두들 일제에 잡혀가 징역 6~8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18세부터 27세 젊은이들

마을 앞 숲에 세워진 ‘미대 여봉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기념비 건립위원회는 위원장 이상호, 사무국장 최주원, 위원 김태락 구경회 이윤구 손재근 송영호 나호준 하중호 구자헌 윤상도로 조직되었고, 학교법인 공산학원 3대 이사장 채철과 이사 나호준이 건립비를 출연했다. ⓒ 정만진


팔공산 동화사와 그 아래 백안동 ‧ 미대동을 둘러보니,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지사들의 나이가 대체로 20세 안팎이다. 가장 적은 나이는 18세이고, 최고령은 27세이다.

16세 때 신민회 최연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20세에 순국하는 대구 무태 사람 구찬회가 생각나고, 18세에 세상을 이별하는 류관순 '누나'가 떠오른다.

여수 소년 주재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겨우 15세에 일제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어디 그뿐인가.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개 학교, 5만4천여 '청소년'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5세, 18세에 순국한 우리 선조들

2020년 4월 국회의원 총선 때 18세 청소년들이 선거권을 행사하게 된 일을 두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다. '어린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학교가 정치에 물든다' 등의 우려들이다.

그렇게 보면, 일제 강점기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독립운동을 한 류관순 등은 '불량' 청소년인 셈이다. 일제는 그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했다. 불령은 곧 불량인 바, 불령선인은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인 조선인이라는 뜻이다.
 
동화사 일원 독립운동 유적 답사 순서

(1) 동화사 대웅전 : 구한말 산남의진 선봉장 우재룡 활동지
(2) 동화사 심검당 : 1919년 4월 30일 덕산정시장 학승 주도 만세운동 계획지
(3) 백안마을 :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출생지
(4) 미대동 여봉산 : 1919년 4월 26일과 28일,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만세운동 장소
(5) '미대 여봉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미대동 도로 건너편 숲
 
#미대동 #우재룡 #이종암 #의열단 #산남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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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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