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자신의 죽음 예고한 대학생,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고 정성희, 부모에게 연락도 못한 채 강제입영 된 후 사망

등록 2020.01.22 08:48수정 2020.02.28 09:17
4
원고료로 응원
최근 한 영국 친구에게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기에 일어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Greenization Project)'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오해가 일어났다. 영국 녹색당원인 그 친구는 '녹화사업'을 군인들을 동원해 산에 나무 심기 작업을 한 것으로 이해했다. 친구는 "그래도 전두환이 그때부터 지구온난화를 예견하고 녹화사업을 시작했으니 선견지명이 있었네!"라며 감탄했다.

'녹화사업'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붉은 사상으로 물든'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푸르게 바꾸고' 프락치(첩자)로 활용하려 한 공작이었던 것을, 그 영국 친구가 알 리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녹화사업' 관련 이 보고서에는 "대학생이념순화 교육활동강화' 방안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1980년대 전두환 정권기 강제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해 생명을 잃은 첫 번째 희생자는 누구일까? 바로 정성희(1962-1982)다. 정성희는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1981년 11월 28일 육군으로 강제징집 되었다. 그는 1982년 7월 22일 오후 7시 50분경 철책근무에 투입되었다.

철책선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그는 자정을 넘긴 7월 23일 0시 10분 초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강제징집 된 지 8개월도 안 된, 불과 20살의,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정성희는 어떻게 해서 강제징집 되었고 군대에서 의문사한 것 일까?
  
정성희는 1981년 3월 연세대 영독불계열에 입학한 후 같은 해 5월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밝은 성격이었던 정성희는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사회과학 세미나와 민주화를 위한 실천 활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동아리 동기들의 활동을 이끌어갔다. 동아리 활동과는 별개로 비밀리에 학내에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던 모임에 가입한 그는 1981년 9월경 '오천여 신입생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다른 동료와 함께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선배가 구속되는 등 흥사단 아카데미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정성희는 방언민속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81년 2학기부터 교내시위가 활발해지자 정성희도 여기에 함께했다. 1981년 9월 30일 탈춤공연 이후 시위와 10월 말경의 문무대 반대시위 등에 앞장서서 참여했다. '문무대'는 대학생들의 안보의식을 높이기 위해 재학 중 머리를 박박 밀고 군대전방에 5~10일간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고 나오는 1980년대의 국가정책이었다.

한편 1981년 11월 정성희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위해 학내 비밀모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1년 11월 25일 친구들이 주도한 시위에 참가했던 정성희는 연행되는 친구들을 구출하려고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경찰서에서 가혹한 조사를 받은 정성희를 포함한 15명의 친구는 연행된 지 3일 만인 1981년 11월 28일 경찰서에서 바로 육군으로 강제징집 되었다.
  
부모에게 연락도 못한 채 강제입영
   

정성희 ⓒ 의문사위 자료사진

 
정성희와 15명의 친구는 입대지원서를 쓰지도 않았고 집에 연락하지도 하지 못한 채 강제입영 되었다. 이 15명 학생 중에는 이미 방위로 판정받은 사람도 있었고 심장판막장애로 입영이 불가능한 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성희 또한 당시 외아들이자 만 19세로 징집연령에 미달했다. 지원이 아니라면 입영될 수 없었음에도 정성희는 그대로 징집되었고 경찰과 군인들은 부모에게 전화 한 통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정성희가 '행방불명' 된 후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대학교와 경찰서 등을 찾아다니며 외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아들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애가 타서 밤잠을 못 자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한 부모는 몇 주 후에 훈련소에서 집으로 보낸 정성희의 사복을 받아보고 나서야 아들이 입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전두환 정권기의 우리나라 인권 수준이었다.

신병교육대에 입소해 신병훈련을 받고, 1982년 1월 14일 자대에 배치된 정성희는 점차 부대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촌극을 보여주거나 농담으로 부대원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부대원들과의 관계도 매우 원만했다. 부대원 대부분은 정성희가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징집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고 훗날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정성희는 대학교 친구와 부모, 여동생 등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다른 병사들에 비해 편지도 많이 받는 편이었다.
   
정성희가 전입하자 부대 지휘계통은 소대장과 분대장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를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당시 보안부대가 정성희를 지속해서 감시 관찰했다. 대대 보안대 선임하사가 직접 분대장에게 정성희가 시위주동자이니 관찰해 보고하라고 지시했으며, 대대 보안대 주재관이 소대장에게 정성희의 동향을 묻기도 했다.

보안대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감시 당한 정성희는 시위와 관련되어 입대하면 장기복무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도 걱정할 만큼 위축되었다. 또 같이 강제징집 당한 친구가 서신검열에 걸려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마저도 마음 놓고 쓰지 못하게 되었다.


또 정성희는 보안부대에 직접 호출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정성희의 소속연대 보안반 서무병은 "정성희가 보안반을 다녀간 뒤 사망해 현재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소대장과 중대장도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휴가 전후에 보안대로부터 호출을 받고 정성희를 대대로 보내 보안대 면담을 받도록 한 기억이 있다"고 진술했다.
  
휴가를 나온 정성희는 친구들에게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았으니 중요한 내용은 자신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동아리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보안대에서 조사받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그의 친구들은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이렇게 정성희는 입대 이후 보안부대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고, 보안대로 소환되어 학생운동과 관련한 가혹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보안대의 조사과정에서 그는 주로 동아리 활동과 관련해 선배나 동료들에 대한 진술을 강요 당했을 것이며, 이런 가혹한 조사를 매우 힘들어 했을 것이라고 의문사위는 추정했다.

"계속 감시 당하고 있고 부대에 복귀하면 조사 받을 것"
 
 
정성희의 첫 휴가는 1982년 6월 9일에서 6월 21일까지였다. 휴가기간 고교친구들을 하루 정도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쭉 연세대 흥사단 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보냈다. 정성희는 휴가기간 친구들에게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공간에서 열심히 생활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자신이 계속 감시 당하고 있고 부대에 복귀하면 조사를 받을 것이므로 '학교상황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부대 복귀 전날 정성희는 후배 양아무개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써오던 일기를 읽게 했고, 그날 저녁 동아리 사람들과 술을 마신 후 연대 근처 친구 자취방에서 자고 다음 날 부대에 복귀했다. 그런데 막상 부대로 복귀하는 날, 정성희는 동아리 친구 이아무개에게 전화해 '정말로 부대에 돌아가기 싫다'고 심각하게 호소했다.
  
군대로 복귀한 정성희는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사고가 나기 3~4일 전쯤에 정성희는 주위의 동료들에게 자신이 3일 후에 죽을 것이라든지, 72시간이 남았다 라든지, 휴가를 가게 되면 학교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주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또 사고 나기 2~3일 전부터는 자신의 전투화와 라이터 등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급기야 1982년 7월 22일 낮에 정성희는 우물에서 물긷는 작업을 하면서 함께 일하던 전우들에게 "오늘 밤 12시에 죽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휴식시간에 유서를 작성해 임아무개에게 보여주었다. 또 이날 저녁 근무에 투입되기 직전 여자친구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기도 했다.

정성희는 7월 22일 오후 7시경 전방실습을 나왔던 대학생 임아무개와 함께 초소 경계 근무에 투입되었다. 이때 실탄은 정성희에게만 지급되었고 실습대학생들은 총기만을 휴대했다. 처음 27초소에서 근무하던 정성희와 대학생은 오후 10시경 26초소로 이동했다. 정성희는 임아무개를 기다리게 한 다음 혼자 내무반으로 들어가 고참병인 한아무개로부터 담배를 2차례나 얻어 피우는 등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했다. 정성희는 전방실습 중이던 대학생에게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으며, 자정 직전에는 대학생에게 몇 시쯤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자정이 되자 대대에 있던 종이 울렸고, 그 직후 연발의 총성이 들렸다. 다른 초소 근무자와 순찰자들은 예광탄 수발이 발사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총소리가 나자 각 초소는 모두 보안등을 켰으나 정성희가 근무하던 26초소의 보안등은 켜지지 않았다. 옆 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분대장이 급히 달려와 26초소로 뛰어가 머리 위쪽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정성희를 발견했다.

정성희는 휴가 후 군에 복귀해 보안부대에 불려가 '동아리와 학교의 최근동향'에 대해 진술할 것을 지속해서 강요받았다. 당시 정성희는 보안부대의 요구에 대해 영향이 없는 부분만 진술을 했다. 보안부대에서 요구하는 대로 동아리와 학교의 최근 동향을 진술할 경우,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삶을 살게 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안부대로부터 계속해 '동아리와 학교의 최근동향'에 대해 핵심적인 진술을 하라는 강요를 더는 거부하기 어렵게 되자 정성희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의문사위는 추정했다.
  
의문사한 외아들의 시신을 즉시 화장한 군대

정성희의 부모와 외삼촌은 사망 사실을 통고받고 부대로 찾아와 사망 현장 방문을 요구했다. 그러나 헌병들은 현장이 민간인 통제구역임을 이유로 부모의 요구를 거부했다. 부모들은 헌병대 수사관에게서 '정성희가 비관 자살했다'는 설명을 듣고 난 다음 보급대에 설치된 장례식장에서 사체를 확인했다.

당시 정성희의 사체는 이미 입관된 상태로 관이 작아 목이 꺾여 보였다고 훗날 부모는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전두환 정권기의 군대는 죽은 군인에게조차 크기가 맞는 관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한편 군은 정성희 부모에게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 사인에 대해 법적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정성희의 시신을 즉시 화장했다.
  
외아들인 정성희가 사망 후 그 가족이 받은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정성희의 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입었고 그 후 지병을 얻었다. 정성희의 모친은 외아들의 의문사 후 화병을 얻고 심장판막치환수술을 받았으며 그 후 여생을 인공판막에 의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의문사위는 정성희의 짧은 삶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정성희는 시위에 참가하다가 서울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어 정상적인 입영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강제징집 되었고, 입대 후 학생운동 전력으로 관할보안부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 내지 관찰을 받았으며, 나아가 정성희는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동아리 활동 등 학생운동 관련 활동에 대한 진술을 강요받아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자살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정성희의 자살은 당시 권위주의 통치하에 보안사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항거한 것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인 '민주화운동'으로 판단된다. (중략) 또한 정성희는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인정된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정성희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정성희 

갓 입학한 연세대 1학년 정성희
그해 초겨울
백양로 시위중 연행
그길로 강제징집되었다
집에 알리지도 못한 채
휴전선 철책 보초 몇개월
한 장의 글발도 없이
1982년 여름 자살이라 했다
자살 아니야

한 장의 글발도 없이
목 아래
전신은 비닐로 포장되었다
자살 아니야

휴전선의 밤 M16 네 발을 쏘아 자살이라 했다
자살 아니야
#정성희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