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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에서 제사 끊겠다" 할머니의 선언이 가져온 변화

전통과 제도를 넘어 자유로운 명절로

등록 2020.01.22 08:42수정 2020.01.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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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 할머니와 엄마가 직접 차리셨던 제사음식이다. ⓒ 노서영


내가 세 살 때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은 일 년에 네 번씩 제사를 지냈다. 엄마는 맏며느리고 나는 장녀다. 사흘이 주어지는 명절이면, 첫째 날은 할머니와 엄마가 요리하고 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명절 당일에는 아침부터 전날 만든 요리를 데워 제기와 놋그릇에 옮겨 담다가 할아버지가 "이제 다 모여"라고 말씀하시면 제사가 시작됐다.       

제사가 끝나면 바로 이어지는 친척들의 식사에 대비해야 했으므로 할머니와 엄마는 부엌에서 쉽게 나오질 못했고, 나와서도 자리가 없어 식탁 의자 옆에 쭈그려 앉곤 했다. 이틀 동안 차린 제사상이 다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서 앞치마를 황급히 벗으며 절을 할 때 나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랑 엄마는 왜 부엌에서 절을 할까? 조상님의 명복과 자손들의 소원을 비는 게 차례를 지내는 이유라고 하는데, 영정사진을 거의 등지다시피 하고 절을 해도 괜찮은 건가?

당시 나에게는 제사상이 보이는 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손주로서의 특권이 있었지만 할머니와 엄마가 여기 있으니 아빠와 남동생 곁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나만 여자인데 그리로 가는 게 이상하다고도 생각했다. 엄마에게 묻자 원래 그런 거라고 조그맣게 대답해주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뜻깊은 자리라지만, 여자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절을 하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매년 지내온 제사가 참을 수 없이 불편해진 건 2016년, 페미니즘을 접하고부터였다. 명절을 쇠고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의 불평등뿐 아니라 제사, 명절, 결혼과 가족이란 대체 무엇인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 해였다.

집안에서 엄마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이유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아빠보다 엄마의 '말발'이 더 세다는 게 때로는 우스운 이야기처럼 또 때로는 불평처럼 거론되는 것 자체가 차별적인 일이었다. 물론 여성의 교육 수준과 경제력이 이전보다야 높아졌기에 당연하고 실제적인 현상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과연 명절이나 제사 때도 그런가.

제사는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해 존재한다


평소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더 컸지만 제사 때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하나의 의례이자 가족 행사인 제사를 진행하셨고 모두가 숨죽여 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도 비슷했다. 집에서는 아빠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엄마였는데, 명절에 할머니 댁에 가면 종종 아빠에게 존댓말을 썼다.

설거지를 같이 하자거나 도와 달라는 말도 할머니 댁에서는 금지된 말 같았다. 명절에는 많은 식구가 모이기 때문에 설거지 양이 몇 배나 많은데도 말이다. 엄마와 고모들은 각자의 친정에서도 설거지를 했고, 아빠와 고모부들은 어디에서도 하지 않았다. 구조의 문제였다.

이처럼 유독 명절에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유는, 제사가 계승하고 강화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제사를 비판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제사가 가부장제 아래에서만 가능하고, 또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지라 '전통과 제도'의 이름으로 유지되었다고 폭로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더 이상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됐다. 40년 넘게 노씨 가문의 제사를 치러온 할머니가 집 근처 절에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아무리 힘에 부쳐도 제사를 원하신다고 믿었던 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당신 대에서 제사를 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셨고, 우리는 절에 모여 할아버지를 추모한 뒤에 함께 절밥을 먹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제사 음식을 나라에서 다 해서 문 앞에 갖다주는 거 어떻겠냐"던 할머니셨다.

할머니의 추모 방법
 

절에서 제사를 지내며 낭독했던 '금강경'의 일부 ⓒ 노서영

 
가부장적인 분이셨지만 할아버지 없는 할아버지 제사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병실에서 오랜만에 '사랑한다'며 손을 꼭 잡아주셨던 날이 많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제 들리는 것은 할아버지의 제문을 읽는 목소리가 아니라, 불경을 외는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할머니의 추모 방법이었다. 불경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절을 해야 하는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존중하고 싶었다. 적어도 할머니가 주도하는 제사에서는 아무도 그 많은 제사음식을 만들거나 차리거나 먹지 않아도 되었다.

이번 설에도 우리 가족은 절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절밥을 먹을 예정이다. 할머니의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여전히 기쁘다. 하지만 할머니의 목소리가 반영된 명절이 모두에게 평등한 명절은 아니기에, 앞으로 더 많은 가족 구성원들의 의사가 존중되었으면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차별이 없어져야 하겠지만, 당장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이번 설을 보냈으면 좋겠다. 갈 수 없고 가기 싫은 데엔 다채로운 이유가 있으니까.

우린 머지않아 2020년대의 명절 풍경을 새로 쓸 것이다. 정말로 기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일 년에 한 번 그 삶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가 중요한 것이니 좋은 조상님이라면 마음만 받으실 것이다. 혹시 산 사람들이 연휴에도 쉬지 못하고 고생하는데 즐거워할 조상이라면, 그 제사는 접는 게 낫다.

명절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그때, 단지 전통적 제사 문화만이 아닌, 가족의 개념도 바뀌거나 사라져 있을 테다. 가족 안에서 가부장의 권력을 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의례가 아니라, 혼자 또는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그 시기에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
#설날 #페미니즘 #제사 #할머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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