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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께 아룁니다, 손녀가 비건입니다

고기없는 제사상은 가능하다

등록 2020.01.24 17:42수정 2020.01.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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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제사상을 떠올리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번 명절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고기'가 될까.

지난해(2019년)는 '황금돼지의 해'였다. 상징적인 이름과는 달리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돼지들이 살처분을 당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확산된 주된 원인은 돼지가 먹는 사료(잔반)에 감염된 돼지고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돼지에게 돼지를 먹일 수 있다는 생각과,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라면 돼지가 좁은 우리에 갇혀 평생을 살다 도축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인간중심적인 폭력을 뒤집어 생각해보는 것이 비거니즘이다. 2019년은 비건 이슈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논의된 해이기도 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음식뿐만 아니라 옷, 화장품, 생활용품까지 동물을 착취하여 만드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채식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명절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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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로서 채식을 한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폭력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또 한 번의 선언이다. ⓒ 이주영

 
채식은 단순히 고통받는 동물을 구원하고 싶어하는 얕은 실천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살 수 있을지에 관한 관점이다. 비건을 실천하는 것은 기후변화를 늦출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 육식을 줄이면 가축을 먹여 키우고 도살하여 운반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 그리고 가축들이 뿜어내는 가스를 줄일 수 있다.

지난해 아마존 열대우림 대형화재를 기억한다. 축산업자들이 사료에 쓸 대두 경작지를 확보하려고 산에 불을 낸 것이 원인이었다. 5개월 동안 꺼지지 않는 호주 산불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 명백하게 기후변화가 낳은 재앙이다. 겸허하게 성찰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탈육식에 노크를 하고 있다.

"올해부터 채식하려고요."

발랄하게 새해 다짐을 하던 친구들이 명절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고깃국과 고기산적, 계란물에 부친 동태전 앞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까. 간만에 만난 친척들이 "고기를 왜 안 먹냐"며 타박할 때 불편해질 용기를 내지 못해 신념을 삼키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채식인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 굶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공휴일에 가족들과 밥을 먹으면서까지 얼굴을 붉히는 것은 여간 지치는 일이 아니다. 채식을 하는 사람도 늘어야 하지만, 채식을 존중하는 문화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

고기 없는 제사상,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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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유튜버 하리씨가 만든 채식 제사상 ⓒ 유튜버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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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과 고사리로 떡국을 만들고 있다 ⓒ 비건 유튜버 하리

 
고기 없는 제사상은 의지만 있다면 쉽게 차릴 수 있다. 간단하다. 고기를 빼면 된다. 고기 산적 대신 양념에 재운 콩단백 구이를, 계란물에 부친 생선 대신 밀가루물에 부친 채소전을, 해산물 동그랑땡 대신 두부로 빚은 동그랑땡을 준비할 수 있다. SNS에 '#비건떡국'을 검색하면 갖가지 레시피가 쏟아져 나온다. 버섯과 고사리로 맛을 낸 떡국은 일품이다. 채수로도 깊은 맛의 탕국을 끓일 수 있다.

비건 유튜버 하리씨는 지난 추석에 손수 비건 차례상을 차리는 콘텐츠를 업로드하기도 했다(https://youtu.be/OLpF2AMBBL0). 영상 속의 새송이버섯전, 비건새우(모양)전, 애호박전은 강황가루를 푼 밀가루물에 부쳐 더욱 노릇노릇하고 먹음직스럽다. 조금의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공존의 제사상이 가능하다.

제사라는 것이 세상을 일궈놓은 조상님들께 예의를 다하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뢰는 것도 필요한 것 아닌가. 명절이야말로 전통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제사상을 상상할 수 있다면, 매일의 밥상이 더욱 평화로워질 것이라 믿는다. 올해는 채식에 마음을 더 열어보자. 바로 이번 설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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