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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고심 끝에 철군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45회]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외군의 출병소식이었다

등록 2020.01.25 16:42수정 2020.01.2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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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긴박한 정세와 노선을 둘러싼 논란 끝에 동학군은 마침내 철군을 결정하였다.

앞에서 철군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지만,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외군의 출병소식이었다. 아무리 제폭구민과 광제창생을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 해도 외군의 출병으로 국가안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맞게 되어 전퇴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택한 결정이 철병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ㆍ손화중 등 지휘부는 이때에 생애에서 가장 치열한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포할 때에는 대의와 명분이 분명하였는데, 전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스스로 퇴각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여러운 결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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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고등학교 <한국사>에 수록된 그림. ⓒ 삼화출판사

 
지휘부는 전라관찰사 김학진과 전주성 철수와 관련하여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어렵게 몇 가지 합의가 이루어졌다.

첫째,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다시 관군에게 비워준다.
둘째, 동학농민군은 해산하여 본업으로 돌아간다.
셋째, 관군은 해산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체포하지 않는다.
넷째,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농민들을 행정에 참여시킨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로써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되었다. 정부군과 이른바 '반군' 사이에 화약이 맺어진 경우는 한국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그만큼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이 화약에서 동학농민군이 직접 집강소를 설치하여 행정에 참여하게 된 것 역시 한국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와 유지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성공적인 혁명과정이었고 한국 지방자치의 효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주성을 점령한 지 10일 만인 5월 5일과 6일 이틀 동안 동학농민혁명군은 관군이 포위를 풀자 "북문을 열고 북을 치고 춤추면서 진(陳)을 정돈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주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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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서부원

 
정부측은 5월 8일 홍계훈이 대사령을 내려 농민군에게 명분을 제공하였고, 김문현ㆍ조병갑ㆍ이용태ㆍ조필영 등 탐관들을 귀양보내어 백성들의 원성을 풀어주는듯 했다.

그래서 철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주성의 철병을 결정한 지휘부는 사후의 여러가지 계획과 전략을 세우고 철병을 수용하였다. 우선 철병에 앞서 통문을 발령하여 농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청국군의 수는 3천 명 뿐인데 수만 명이라고 와전되었고, 또 각국의 군대가 도로에 계속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잠시 병력을 퇴진할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청국군이 물러간 뒤에 다시 의기를 들까 하니 각 군의 장졸들은 각별히 유념하여 명령을 기다리기 바란다. (주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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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 황의선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철병을 두고 동학군의 패배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초 거병을 하면서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권력자들을 척결하겠다던 선언에 배치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달 여 뒤에 김학진의 초청으로 전주감영에서 협상을 통해 '전주화약'을 맺고, 「폐정개혁 13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함으로써 결코 일방적인 '패배의 철병'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김개남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전주성 철수와 관련하여 그의 '혁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자들이 있다. 전주성에 오래 지체하지 않고 김개남의 주장대로 한양으로 곧추 쳐들어가서 권귀(權貴)를 물리쳤으면 어땠을까, 전봉준이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혁명이 아닌 민란의 수준이 아니겠는가 하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민씨 정권의 타도를 제기하지 않는 점이나, 사회개혁을 위한 정권획득의 비전 결여 등은 혁명적 역량에 이르지 못했다는 평도 따른다.


주석
11> 황현, 『오하기문』, 100~101쪽.
12> 「초토사전보」, 6월 15일자.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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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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