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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 철병에 관한 논점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46회] 전주성 철병은 동학혁명사의 일대 변곡점이었다

등록 2020.01.26 12:58수정 2020.01.2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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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 이돈삼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철병은 동학혁명사의 일대 변곡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와 동아시아 정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인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전봉준이 꽤 오래 전부터 농민의 대군에 의한 상경(上京)을 기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반정부군이 수도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투적인 전략이지만, 사회개혁의 의사를 가진 전봉준의 상경 작전에는 군사면 이외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그 목적은 민씨정권 타도 정권쟁취가 목적이 아니라 일련의 폐정개혁 요구안을 조선 봉건지배계층에 제시하기 위한 서울에서의 대시위운동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종근(朴宗根) 씨는 명치 28년 3월 6일자 『동경조일신문』에 게재된 전봉준의 법정진술의 "모든 국사를 모두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매우 폐해가 크다는 것을 안다. 몇 사람의 명사가 협동하여 합의법에 의하여 정치를 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라는 부분을 근거로 하여 그가 의회정치 혹은 공화제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었다면, 전봉준의 사회개혁의 구상은 독자의 정권을 수립하고 조국을 적극적으로 개조해 간다는 매우 실천적이고도 구체적인 정치일정으로 되고, 그것은 반권력투쟁의 테두리를 훨씬 넘어선 일대 혁명사업의 과정이었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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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 전주역사박물관

 
그러나 그와 같은 자기 완결적인 혁명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전봉준은 왜 농민군의 슬러건이나 고시문 가운데서, 가령 '민비 하야요구'와 같은 중앙정부에 대한 정치적 주장을 하지 않고 또 전주에서 양군 대치상태의 타개를 위한 문서 교환에 의한 교섭에서 그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로, 결국 민씨 정권의 간악한 정전협정 페이스에 넘어가고 말았던가?  

이런 것과는 역으로 그의 사회개혁 구상에는 막연한 민씨 정권 타도는 있었다 하더라도 그 뒤에 와야 할 신정권 수립이라는 각본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그의 사회개혁의 최종적인 실현을 위해서 필요한 정권문제는 그의 주변에 충분한 혁명적 역량이 축적되어 있지 않는 한, 그 자신의 사상적 차원을 별개로 하고, 현실적으로는 반 민비파 권력과의 일시적 정권이양이라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즉 전봉준의 현실적 정치판단의 테두리 안에서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의 제안(諸案)을 보장하는 최저조건으로서, 가령 이하응 추대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주석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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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전주성의 남문이다. 앞에는 남부시장이 있다 ⓒ 김수종

 
전주성 철병을 두고 다른 견해도 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저하게 패배하여 철병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첫째, 전주성 공방은 관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따라서 전주성 전투에서 마치 농민군이 관군을 제압한 것처럼 기술한 오지영의 기록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관군이 압승을 하고서도 전주성을 즉시 탈환하지 않은 것은 기존의 설명처럼 관군의 포화로 경기전이 훼손될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고종이 성내의 양민의 무고한 희생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설령 대포로 공격을 한다 해도 경기전은 사정거리 밖에 있었다.

둘째, 이토록 완벽하게 승리한 관군이 농민군에게 화약을 요청했을 리 없다. 이와 같이 농민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농민군이 읍폐민막을 휴전의 조건으로 제시할 계제도 아니었다. 또한 홍계훈도 농민군에게 폐정개혁이나 탐관오리의 처벌을 약속한 바도 없다. 그의 목표는 '비도(匪徒)'들의 귀화였을 뿐이다.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화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셋째, 농민군의 전주성 입성은 관군의 예봉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스스로 포위공격을 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차단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농민군의 전략적 실수였다.

넷째, 세칭 전주화약의 실체는 관군의 무력에 압도당한 농민군의 해산이었을 뿐이다. (주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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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등 20 명이 결의사항과 함께 사발 모양으로 둥굴게 서명한 문서 ⓒ 살림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병하는 의도와 그 과정을 일인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보다 먼저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를 점령한 동학군 토벌을 위해 강화병사 1개 대대(大隊)와 대포 2문을 거느리고 4월 3일에 인천을 출발하여 군산에 상륙한 뒤 김제를 거쳐 영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한 부대는 남문(南門)에서 다른 부대는 서문(西門)에서 공격하였다.

양쪽 군대의 승패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 관군은 포환을 쏘아 조경전과 왕가에서 존중하는 궁전을 파괴하였으며 왕가의 신령스러운 장소에서 총을 쏘았다. 동학군은 주력을 남문 쪽으로 배치하여 힘껏 싸워 지켰기 때문에 관군은 뒷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공격에 앞서 화해를 표명하면서 동학군의 해산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초토사와 동학군 사이에는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 이돈삼

 
이 화의가 쉽게 이루어진 이유는,

첫째, 전주성에서 교전한다면 성내가 파괴되고 손실됨은 물론이고 왕조에서 존중하는 궁전 등을 소실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아산 방면에서 청나라의 대병이 이미 와서 주둔하였으며 곧 일본과 교전하기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력하게 관군에 대항한다면 청군으로 막아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동학군은 성 밖으로 물러나 해산하고 천하의 형세를 기다린다는 것 등이었다.

동학군은 이 화의를 받아들여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전봉준은 태인 동곡(東谷)의 고향으로 돌아가 지내기로 하고, 4월 17일 수하의 수십 명을 데리고 곧바로 전주성을 나왔다. (주석 15)


주석
13> 橫川正夫, 「전봉준에 대한 고찰」, 노태구 엮음, 『동학혁명의 연구』, 135~136쪽.
14> 장영민, 「동학농민군의 '전주화약'에 관한 재검토」, 신복룡, 앞의 책, 158쪽, 재인용.
15> 기구찌, 앞의 글, 『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1)』, 18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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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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