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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희생자가 묻힌 만성리 '형제묘'를 아시나요?

시신 찾을 길 없어 '형제묘'라고 이름 붙여... 진상규명은 끝나지 않았다

등록 2020.01.22 11:46수정 2020.01.2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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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0일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72년 만에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1부(재판장 김정아)가 20일 순천지원 316호 형사 중법정에서 열린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고 장환봉(당시 29·순천역 철도원)씨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장환봉씨는 1948년 11월10일 전남 순천에서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군경에 체포되어 11월 30일 순천역 부근 이수중 터에서 총살됐다.

김정아 판사는 판결문 말미에 "장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명예로운 철도공무원으로 국가 혼란기에 묵묵하게 근무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를 더 일찍 회복해 드리지 못한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한 뒤 한동안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14 연대의 항명 이유 14연대는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며 항명했다. ⓒ 이명옥

여순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 토벌을 위해 출동 명령을 받은 14연대가 조선인으로 같은 조선인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동족상잔 결사 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외치며 항명한 사건이 민중항쟁으로 확대되자 미군의 허락 하에 국문과 경찰, 우익 세력들이 여수와 순천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여수와 순천 부근에는 곳곳에 민간인 학살 현장과 항쟁 현장이 남아있지만 아직도 역사적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만성리 형제묘 시체를 찾을 수 없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있으라고 '형제묘'라고 이름 붙였다. ⓒ 이명옥

전남 여수 만성리 언덕에는 '형제묘'라고 불리는 여순 사건 희생자 묘가 있다. 여순사건의 부역 혐의자로 몰려 당시 증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123명의 마을 주민이 1949년 1월 3일 재판도 없이 학살됐다. 이들의 시신은 장작불에 태워져, 만성리 계곡에 돌로 덮였다. 유족들이 찾아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희생자 가족들은 시신을 찾을 길이 없자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형제묘는 다른 위령탑이나 비석과 달리 희생자들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부역 혐의는 명확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이 그저 손가락 총으로 누군가를 가리키거나, '좌익 사상을 지닌 누군가와 대화를 하더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손가락 총으로 지적을 받은 사람은 부역자나 빨갱이로 분류되어 정식 재판도 없이 논두렁이나 운동장에서 사살되어 시체로 버려졌다.
 

여순사건 만성리 형제묘 희생지 형제묘에 대한 설명이 여순사건의 비극을 말해준다. ⓒ 이명옥

만성리와 증산초등학교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야만적인 행위는 여수와 순창 지역만이 아니라 대구, 거창, 제주 곳곳에서도 일어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미래의 갈 길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무죄를 선고 받은 여순 관련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수많은 여순 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진실규명과 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형제묘'가 비로소 제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순사건 #만성리 형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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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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