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별세... 또 한 시대의 마감

[디카시로 여는 세상 시즌3 - 고향에 사는 즐거움 48] 천융희 디카시 '편지'

등록 2020.01.23 10:14수정 2020.01.2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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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융희 ⓒ 이상옥

  
일 년 뒤 배송된다는 느린 우체통이 있다
나는 광활한 우주 투입구에 꽂힌
한 통의 빛바랜 편지
삶의 빗장에 기대어 몇 번이고
수신처 확인 중이다
- 천융희 디카시 '편지'
 

신격호 명예회장의 생애는 참으로 드라마틱했던 것처럼 보인다. 신격호는 일제말기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에서 고학생 신분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막일을 했지만 틈틈이 헌책방에서 독서를 하며 가졌던 본래의 꿈은 작가였다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는 밥을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체감하고 와세다고등공업학교 야간부 화공과를 선택함으로써 방향전환을 했다.


1948년 도쿄에서 ㈜롯데를 창업해 종합제과업체로 키워내며 몇 차례 역경도 겪었지만 껌 사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신격호는 한일협정 후에 한국에서 롯데제과 설립을 시발로 90여개 계열사를 가진 2019년 기준 매출 100조원의 재계 서열 5위 기업으로 성장시킨 창업 1세대로서 재계의 거인이 되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짝사랑한 여주인공 샤르로테 부프(Charlotte Buff)의 애칭인 '로테'의 일본식 발음을 따라 사명을 '롯데(Lotte)'로 명명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로서의 꿈을 지녔던 신격호답다 할 것이다. 그는 "롯데라는 이름이 떠올랐을 때 충격과 희열을 느꼈다"고 회고한 바도 있다.

신 명예회장은 말년에 두 형제가 경영권을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고 경영비리 혐의로 징역형과 벌금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그의 별세와 함께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증폭되기도 했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데 있어서 어찌 공과가 없겠는가.

"'거인' 신격호 영면에 들다"라는 타이틀과 함께 명예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홍구 전 총리가 추모사에서 "당신이 일으킨 사업이 지금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는 기사를 보며, 지난해 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신 명예회장마저 별세함으로써 대한민국 재계 창업 1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남으로써 또 한 시대가 마감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인용 디카시에 따르면, 나라 잃은 시대에 타국에서 고학생 신분이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재계 서열 5위의 창업주가 되었던 신격호도 대한민국이라는 수신처에 보내진 한 통의 편지다. 개천에서 용이 더 이상 날 수 없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나라 잃은 시대에서부터 씌어진 신격호라는 편지를 읽으며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덧붙이는 글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디카시 #신격호 #천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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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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