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그저 '피해자'였을까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며

등록 2020.01.29 12:02수정 2020.02.0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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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5일 오전 11시 38분]

뿌연 미세먼지마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운치를 더하는 강변의 풍경을 보며 강원도로 향했다. 춘천과 화천을 잇는 배후령 터널을 지나 북으로 길을 따라 굽이굽이 이른 곳은 강원도 화천 오음리. 터널이 뚫린 후 인적이 뜸한 배후령 고갯길에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그곳이 분단선이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여기가 3.8선입니다' 한때는 이북 땅이었던 이곳 화천 땅과 그 일대는 한국 전쟁 시기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자 지금도 휴전선에 인접해 군부대와 군시설이 대거 들어서 있는 곳이다.

2020년 새해 들어 베트남 전쟁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첫 일정으로 오음리를 찾았다. 우리끼리는 모임 이름을 '베공모임'이라 줄여 말하기도 하는데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 관심 갖는 교사, 활동가가 함께하고 있다. 오음리로 가는 편도 2차선 도로로 군트럭과 장갑차 행렬이 끝없이 지나갔다. 군사훈련 중인 장갑차가 넘어와 비좁은 길을 아슬아슬 지나 목적지로 향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며, 그리고 또 다른 전쟁의 기억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는 베트남 전쟁 참전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장소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6개월 동안 32만여 명의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다. 전투부대가 파병된 첫 해를 제외하고, 1966년부터 이곳 오음리는 월남파병 훈련소로 자리 잡게 된다. 지금은 파병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이곳에 2008년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이 조성되고 '월남참전기념관'이 들어섰다.

야외에는 월남파병용사추모비와 당시를 재현해 놓은 취사반 막사, 조악하지만 월남의 집들과 구찌 땅굴 모형도 조성되어 있다. 월남참전기념관은 두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시의 구성과 내용은 용산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에 전시해 놓은 것과 대동소이하다. 박정희 정부 시기 파병 결정과 과정, 그로 인한 한국의 경제 발전, 한국군의 활약과 전쟁무기, 1973년 철군까지 전쟁에 대한 '기념'과 '국가주의' '영웅주의'가 넘쳐난다. 필요한 정보만으로 서사를 만들어 역사를 취사선택하고 있다.

최근 읽은 책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_베트남과 전쟁의 기억>은 이 전쟁에 참전한 한국에 대해 극명하게 엇갈린 타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보트피플로 미국에 건너가 성장한 그는 베트남 전쟁이야말로 한국이 아제국주의(Subimperialism)의 강국으로 떠오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그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미합중국을 비난하기도 한다. 한국이 처해 있던 복잡한 상황을 감안하면서, 한국인들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범죄도 너그럽게 보려 한다. 이러한 서사로 기억을 세탁하면서, 돈이 기억을 지배하고 기억이 돈을 지배하는 지본주의의 세계에서 한국은 새로운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중략) 한국은 스스로를 일본이나 미국 혹은 북한에 대해 피해자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국은 피해자에 머무른 적이 없다. 냉전시대나 그 이후에 한국인들은 측근, 용역 혹은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그들의 주인에게 잘 배웠다. 우수한 학생인 한국은 인간 이하의 자리에서 졸업하여 아제국주의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의 주장은 국가주의로 위장된 우리의 기억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엇으로 포장하든 전쟁은 한낱 전쟁에 불과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한국이 베트남에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그래서 한국은 자본주의와 산업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를 수술하는 외과 의사들이 잔혹성을 제거하고 인간성을 이식한 전쟁 기억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서울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며, '해외파병' 전시실은 베트남, 캄보디아 혹은 방글라데시라는 알쏭달쏭한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메이드 인 코리아임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돌아오는 길, 춘천역 옆에 있는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을 들렀다. 한국전쟁 시기 격전이 벌어졌던 이곳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무공탑과 육이오참전학도병기념탑, 기념 조각이 서 있다. 2017년 10월, 이곳에 월남참전기념탑이 들어섰다. 오음리에서 훈련받고 이곳 춘천역에 집결해 부산항으로 떠나는 출발지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전국 도처에 이런 베트남 전쟁 기념비가 넘쳐난다.

지난 1월 18일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전쟁행위 규탄과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미국 간 긴장이 잦아들면서 한국 정부는 21일, 청해부대의 작전지역을 한시적으로 확대해 호르무즈 해협에서 독자 활동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 7개국도 '호르무즈 호위작전'을 별도로 꾸렸다고 하니 이 일대 군사적 긴장은 갈수록 더해만 간다.

나는 '독자적 활동'이라는 모호함과 그것이 열어갈 전쟁의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국익과 실리적 판단이라는 파병의 명분에 분노한다. 전쟁을 기념하는 공간에서 나는 전쟁의 고통 속에 살아야했던 사람들의 삶을 만나지 못했다. 기념의 공간엔 영웅과 애국만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삶 속에서 만난 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비통함으로 남는다. 어떤 명분으로 포장해도 전쟁은 전쟁이다. 국익을 위한 전쟁이란 없다. 베트남전참전기념탑 옆에 호르무즈참전기념탑이 들어서는 기막힌 장면을 상상해 보았는가.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에 메이드인 코리아 꼬리표를 더 이상 추가하지 말자.
덧붙이는 글 해당 글은 인권연대 웹진 <수요산책>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석미화님은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베트남전쟁 #월남참전 #춘천역 #베트남 #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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