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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서른 넘어 읽는 고전]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등록 2020.02.04 11:42수정 2020.02.0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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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읽는 고전'은 30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 독서인이 뒤늦게 문학 고전을 접하며 느낀 재미와 사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사람들… 만나다 보면 다 이상하지. 알다가도 모르겠고, 좋다가도 어느 순간 정이 확 떨어지고. 그래도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어. 어딘가에 나와 꼭 맞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 같거든. 그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야."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만, 관계 속에서 여전히 상처를 주고받으며 힘들 때가 많다는 언니는 그럼에도 사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언젠가는 서로 온전히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을 꼭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도 했다. 마치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연극의 주인공처럼.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대체 이게 뭔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경 설명도 딱 한 줄,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가 전부이고, 등장인물도 주인공 둘,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 그리고 소년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다. 게다가 무슨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대화에 맥락도 없다. 그저 '고도'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민음사(2000) ⓒ 민음사

 
'고도'의 해답을 찾아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1906년 아일랜드 더블린 근교의 폭스로크에서 태어났다. 1923년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전공했으며, 1937년부터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오랫동안 이중언어를 사용했던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진하곤 했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오증자)의 해석에 따르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비점령 지역인 남프랑스 보클루즈의 농가에 피신해 숨어 살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작가 자신의 상황을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보편적인 기다림으로 작품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참혹한 2차대전을 겪으며, 전쟁이 없는 세계를 기다렸을까? 아니면 이 비참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뒤로한 채 죽음을 기다렸던 것일까? <고도를 기다리며>가 미국에서 초연됐을 때, 연극을 본 관객들과 언론들은 그 해답을 찾으려고 열을 올렸고, 고도가 누구냐는 연출자의 질문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 걱정할 거 없지.
에스트라공 -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60쪽)

블라디미르 - (격언조로) 인간은 저마다 작은 십자가를 지도다. (한숨짓는다) 잠깐 사는 동안에 잠깐 동안에, 그리고 그 뒤로도 잠깐.
에스트라공  - 그래, 그동안 우리 흥분하지 말고 얘기나 해보자꾸나. 어차피 침묵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
블라디미르 - 맞아.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거야.
에스트라공  - 그래야 생각을 안 하지.
블라디미르 - 지껄일 구실이야 늘 있는 거니까. (104쪽)

사뮈엘 베케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1969년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에도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폐쇄적인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베케트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신 평생 글쓰기와 언어에 골몰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인물은 짐승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포조의 노예 럭키이다. 럭키는 누군가가 모자를 씌워주고 "생각해!"라고 명령을 해야, 마치 묘기를 부리듯 아무 의미도 없는 생각들을 기계처럼 읊조린다.
 
말들을 소진시키는 것, 그러나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그 말들을 계속 말하는 것. 1949년에 그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계속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하리라, 말들이 있는 한, 그것들을 말해야 하리라, 그것들이 나를 발견할 때까지, 그것들이 나를 말할 때까지, 계속 말해야만 하리라, 이상스런 고통이여, 기이한 오류여, 계속해야만 하리라……".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중에서)
그저 곁에서 말하는 것뿐

살아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밤 같은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말하고 쓰는 것, 그 외에 다른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고도를 기다리며>를 번역한 역자(오증자)의 말대로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수다스러운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인상 깊게 봤던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제게 말해요. 말 많다고,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만. 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보단 낫지 않나요? 살다 보면 말이 없어져요. 한 사람과 오래될수록 더 그렇죠.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굳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부터 오해가 생겨요. 사람 속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말을 시키세요. 말하기 힘들 땐 믹서기를 돌리는 거예요. 청소기도 괜찮고 세탁기도 괜찮아요. 그냥 내 주변 공간을 침묵이 잡아먹게 두지 마세요.

살아있는 집에선 어떻게든 소리가 나요. 에너지라고 하죠. 침묵에 길들여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중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내밀한 생각을 나눌 소울메이트, 지금보다 더 안정된 미래, 그리고 더 이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곁에 있는 사람과 말하고 또 말하는 것뿐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잡담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끝내 내가 기다리던 '고도'가 오지 않는다 해도 그게 뭐 대수겠는가. '말은 동작을 유발하고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말하고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에스트라공 - 우리가 이렇게 같이 붙어 있은 지가 얼마나 될까?
블라디미르 - 모르겠다. 한 오십 년?
에스트라공 - 내가 뒤랑스 강에 뛰어들던 날, 너 생각나니?
블라디미르 - 그래 포도를 거둬들이고 있었지.
에스트라공 - 네가 나를 건져주었지
블라디미르 - 다 지나간 얘기다.
에스트라공 - 내 옷이 햇볕에 말랐었지.
블라디미르 - 그 따위 생각은 이제 하지도 말아. 자, 가자. (90쪽)

에스트라공 - 디디,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그런대로 뭐든지 해결해 나가는 거지, 안 그래?
블라디미르 - 암, 그렇고말고. 자, 우선 왼쪽부터 신어봐라.
에스트라공 - 디디, 우린 늘 이렇게 뭔가를 찾아내는 거야.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구나. (116쪽)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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