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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광장'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배경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15)-호외] 내각책임제 국무총리 장면 ③

등록 2020.02.27 10:45수정 2020.02.2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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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총사퇴 당시 장면 총리(1961. 5.) ⓒ 국가기록원

 
'내각책임제' 장면 정권 

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자 즉시 수리됐다. 그날로 허정 외무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정부가 출발했다. 국회는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했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대통령은 상징적으로 국가원수 지위만 부여 받으며, 민 ·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한다.
 - 행정권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국무원(내각)이 맡는다.
-  입법부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으로 구성한다.
 
이 헌법에 따라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1960년 7월 29일 실시됐다. 이 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233석 중 175석, 참의원 58석 중 31석을 차지해 '민주당 시대'를 열었다.

민주당의 압승은 내각책임제를 원활하게 이끌고 정치 안정을 기하라는 백성의 열망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백성의 기대를 외면했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사사건건 갈등과 대립으로 그 기대를 져버렸다.

민주당 구파는 대통령 윤보선-국무총리 김도연 안을, 신파는 대통령은 윤보선-국무총리 장면 안을 복안으로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구파는 윤보선을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뒤, 대통령·총리를 나눠 가진다는 묵계를 깨트렸다. 윤보선 대통령은 1차로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지명했다. 그러나 김도연은 인준 투표의 벽을 넘지 못하자 윤보선은 하는 수 없이 2차로 장면을 지명했다.

장면은 가까스로 인준의 벽을 넘어 국무총리가 됐다. 1960년 8월 23일 대한민국은 마침내 내각책임제 장면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는 장면 내각 출범 1주일 만에 각료 인선에 불만을 품고, 별도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었다. 이에 장면은 9월 10일 협상을 통해 구파인사 5명을 입각시킨 제2차 내각을 발표했다. 하지만 구파의 불만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신익희 한국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회 지도자들이 장면 주미 대사의 안내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을 만나 미국의 원조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1950. 3. 22. 가운데 애치슨 미 국무장관 그 왼쪽 신익희 국회의장, 오른쪽 장면 주미 대사). ⓒ NARA

 
민주주의 전성시대

장면 정권은 출범 즉시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이에 장면 정권은 10만 감군 안을 기획했다. 하지만 이 안은 군부와 미국의 반발을 불러와 유야무야됐다. 또 하나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확보 방안이었다.

장면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청사진을 마련한 뒤 우선 국토건설단부터 출범시켰다. 이처럼 계획들이 하나하나 궤도 위에 오를 때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4월 혁명 후 우리 사회는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과 시민들은 그동안 잠재된 욕구를 마음껏 뿜어냈다.

자유당 시대는 '반공'으로 날이 새고 '반공'으로 날이 저문 데 견주어, 민주당 시대는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저문다고 할 만큼 각종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데모를 그만하자는 데모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게다가 자유당 독재시절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사건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도 빗발쳤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이러한 데모대와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들을 탄압치 않았다. 당시 장면 총리는 "4.19 학생들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정권을 연장해보겠다고 계엄령을 펴거나 독재적 방법은 쓸 수 없다"는 방침이었다. 

장면은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 오랫동안 자유당 정권 하에 억눌리고 쌓였던 울분을 마음껏 발산시키면 그제야 가라앉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장 총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이었다. 곧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비로소 진실한 자유를 얻는다는 그의 정치 철학이었다.

장면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 원리와 법치를 기반으로 스스로 민주주의를 몸으로 익힐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토록 인내하면서 노력했다.

장 정권은 정치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제를 시·읍·면에 이르기까지 실시했다. 한편 사회주의 정당도 합법화했다. 이와 함께 예술의 표현 자유도 허용하여 문학계에서는 최인훈의 <광장>과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었다.
  

일부 학생들과 혁신계 인사들의 시위 플래카드 ⓒ 자료사진

 
깨끗한 교육자, 근엄한 종교인

이러한 자유의 물결을 틈타 마침내 학생들과 혁신계 일부는 성급한 통일 논의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와 플래카드까지 등장했다. 그러자 장 정권도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를 규제하는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 제정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야당과 일부 혁신계 인사들이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날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든 시위대가 중앙청에서 혜화동까지 누볐다.

다음 날(3월 23일) 청와대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장면, 윤보선, 민의원 의장 곽상훈, 참의원의장 백낙준 등 4인이 참석했다. 윤보선은 이 자리에서 장면에게 "사태를 수습할 거국내각을 만들라"고 압박했다. 장면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느냐"라고 반박했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 세간에는 '3월 위기설' 또는 '4월 위기설'이 파다했다. 장 내각은 이에 대비해 군에 폭동 진압 훈련을 지시했다. 이때 쿠데타를 준비 중이던 박정희는 호시탐탐 폭동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폭동이 일어나면 진압하는 척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폭동은 일어나지 않고 3, 4월 위기설을 넘겼다.

1961년 5월 초, 장면은 매우 구체적인 쿠데타 정보를 입수했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쿠데타 설을 제보하면서 조사해보라고 일렀다. 하지만 장도영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인하면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장면도 미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군의 쿠데타 설은 믿어지지 않아 더 이상 채근치 않았던 실수를 범했다.

그런 가운데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도호텔 809호에 묵고 있던 장면 총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총리 각하, 육군 30사단 장병들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 현재 해병대와 공수부대 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 다리에서 막고 있습니다."
"뭐요?"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장면은 후회막심 했지만 이미 쿠데타는 일어났다. 그는 칼멘 수도원에 잠적해 있다가 이틀 후인 5월 18일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 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비서들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이처럼 당해야만 합니까?"

그러자 장면은 부드럽게 한 마디 했다.

"이 사람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면 뭘 하겠나?"

묘비명

1966년 6월 4일, 장면은 향년 66세로 영원히 잠들었다. 경기도 포천 천보산 가톨릭공원 묘원에 안장됐다. 다음은 장면 묘비명이다.
 
"공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 뜻밖인 5․16 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 … 깨끗한 교육자요, 근엄한 종교인이요, 불굴의 정치가 생애는 천주의 부름을 받아 하늘 높이 흰 구름을 탔던 것이다. …."
 
그 나라 지도자는 백성들의 수준과 같다고 했다. 산골 서생이 보기에 장 총리는 이 나라 백성들보다 한 걸음 앞선, 순결한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일까? 시대가 그를 몰라준 것일까?

(*다음 회부터 박정희 대통령 편이 시작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용원 지음 <제2공화국과 장면> /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국무총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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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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