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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북접, 농민혁명에 참여키로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57회] 최시형은 각포 두령들에게 9월 18일 보은의 청산(靑山)으로 모이라는 동원령을 내렸다

등록 2020.02.06 17:58수정 2020.02.0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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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박용규

남접의 동학농민혁명군이 재봉기냐 사태관망이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즈음 동학교단의 본부격인 북접에서도 심각한 논란 끝에 무장봉기에 참여하기로 중대 결정을 내렸다. 동학농민군이 호남일대를 휩쓸고 있을 때에도 북접 교단은 지원은 커녕 관군과 합세하여 동학군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은 「고절문」을 지어 각 포에 돌리고, 교단에서는 '벌남기(伐南旗)' 즉 남쪽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자는 깃발까지 만들어 농민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같은 동학교단 내부의 분열상을 우려하는 여론이 일고, 정부가 청국군을 불러오고 뒤따라 일본군이 들어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면서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기포지 기념비 주 서부발전의 태안화력본부 안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북접 기포지임을 증거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15년 5월 22일 제막식을 가졌다. ⓒ 지요하

 
북접은 최시형의 상황판단과 오지영의 거중조정 그리고 북접의 실세로 떠오른 손병희의 결단으로 남접의 동학농민봉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동학혁명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북접이 중심이 된 동학교단은 마침내 남접 중심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최시형은 각포 두령들에게 9월 18일 보은의 청산(靑山)으로 모이라는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초유문(招諭文)」을 발령했다.
 

SBS들라마 '녹두꽃' 한 장면 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 추준우

 
초유문

주역에 이르기를 대재(大哉)라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자시(資始)하고 지재(至哉)라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자생이라 하니 사람이 그 사이에 만물의 영이 된지라. 부모는 낳고 스승은 가르치고 임금은 기르나니 그 은혜를 갚는데 있어 생삼사일(生三四日)의 도(道)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찌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선사(先師)께서 지나간 경신년(庚申年) 천명(天命)을 받아 도를 창명하여 이미 퇴폐한 강상(綱常)을 밝히고 장차 도탄에 빠진 생령(生靈)을 구하고자 하더니 도리어 위학(僞學)이라는 지목을 받아 조난순도(遭難殉道) 하였으니 아직도 원통함을 씻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31년이라. 다행히도 한울이 이 도를 망(亡)케 하지 아니하여 서로 심법(心法)을 전하여 전국을 통한 교도가 몇 10만인지 알 수 없으되 사은(四恩)을 갚을 생각은 없고 오로지 육적(六賊)의 욕을 일삼으며 척화를 빙자하여 도리어 창궐을 일으키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돌아보건데 이 노물(老物)이 나이가 70에 가까운지라 기식(氣息)이 엄엄하되 전발(傳鉢)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옷깃에 차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도다. 이에 또 통문을 발하노니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 노부의 마음을 양찰하고 기필코 회집하여 비성을 다하여 천위주광(天威黈纊)의 아래 크게 부르짖어 선사의 숙원을 쾌히 펴고 종국(宗國)의 급난에 동부할 것을 천만 바라노라.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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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포지 영토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충청도 북접 농민군 최초 기포지였던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태안화력본부> 울안에서 올해 처음 기념 제례 행사가 있었다. 10월 31일-11월 1일, 이틀 동안 태안에서 거행된 '동학혁명 제114주년 전국기념대회'의 한가지 행사였다. ⓒ 지요하

 
최시형은 이 자리에서 하늘의 뜻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면서 북접이 남접과 합세하여 무력항쟁에 나설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써 동학혁명은 남북접이 함께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혁명의 참여를 결정한 최시형은 신속하게 진영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전경주의 포를 선봉, 정규석 포를 후군, 이종훈 포를 좌익, 이용구 포를 우익, 손병희를 종군통령으로 임명하여 각 포를 총지휘도록 하였다. 손병희가 북접군 총사령이 되었다.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의 지역과 주도인물은 다음과 같다. (주석 6)

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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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 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 ⓒ 김삼웅

 

기회를 기다리던 북접 소속의 동학도들은 9월 18일 각포 두령들의 지휘 아래 청산으로 속속 모였다.

9월 18일에 신사(神師) - 교도참살의 보(報)를 듣고 각포 두령을 소집하여 청산에 모이게 하니, 이때에 장석(丈席)에 모인 자 수 만인이었다. 이때까지 북접 각 포에서는 아직 신사의 명교(命敎)를 기다리고 동(動)치 아니하였더니 이때에 손병희ㆍ손천민 등이 장석에 거의(擧義)하기를 청한대 신사 가로되 "인심이 곧 천심이라 차는 곧 천운 소치(所致)니 군 등이 도중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고 사원(師寃)을 신(伸)하며 오도의 대원을 실현하라" 하시고 손병희에게 통령기(統領旗)를 주어 일제히 전선에 서게 하였다. (주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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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 정운현

 
손병희가 북접 소속의 통령이 되어 10만 명에 이른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는 위치가 되었다.

해월은 손병희를 중군통령으로 삼고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진군을 시작하여 돈론촌(敦論村)에서 보은 수비병과 일전하여 크게 이기고 다음 날에는 전군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영동ㆍ옥천에서 논산에 이르러 전봉준과 합세하고, 2대는 회덕 지명시(芝明市)에 이르러 청주 관군과 싸워 이들을 물리치고 논산에 이르러 남접 산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다. (주석 8)


주석
5> 『천도교백년약사』(上), 250쪽, 천도교중앙총본부, 1981.
6> 오지영, 앞의 책, 243~245쪽, 『동학혁명백주년기념논총』(상), 동학혁명 100주년기념사업회, 549쪽.
7>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2편, 65쪽,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8> 앞의 책, 6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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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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