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1 08:12최종 업데이트 20.02.2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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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00년 사건, 그후'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아래 퀴어축제)가 만 스무살이 됐다. 1회 때만 해도 70명에 불과했던 행진은 20회를 기점으로 약 15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로 발돋움했다.

지난 1월 30일 서울 마포구 비온뒤무지개재단 사무실에서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부기획단장을 만났다. 퀴어축제의 변화와 과제를 주제로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사에서 충분히 사료적 가치를 지닐 증언과 조언을 아낌없이 꺼내놓았다. 본 기사와는 별개로 인터뷰 일문일답을 최대한 살려 싣는다.

[관련 기사] '기사 0건' 굴욕적 축제, 지금은 이렇게나 변했습니다 (http://omn.kr/1mhb5)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 권우성


- 한국의 첫 퀴어축제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2000년에 열린 제2회 서울 국제퀴어영화제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기금을 받았어요. 성소수자와 관련된 단체 중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자금이 생긴 영화제 쪽에서 성소수자 인권단체들한테 제안했어요. 받은 기금의 일부 내어놓을 테니 영화제 기간에 축제 형식처럼 행사를 열면 좋겠다고요. 그 제안을 받아들인 단체끼리 모여서 축제 조직위원회를 꾸렸어요. 영화제가 열린 게 9월 1일부터 10일까지였고 축제는 그중 이틀간 연세대에서 했죠."

-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퀴어 퍼레이드는 그해 8월 26일 대학로에서 진행됐어요. 축제 기간에 열린 게 아니네요?
"처음엔 퍼레이드 계획은 없었어요. 하고는 싶어 했죠. 오래 전부터 단체들은 '우리도 외국처럼 퍼레이드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퍼레이드를 하려면 훨씬 더 많은 능력이 있어야 해요. 도로도 빌려야 하고... 쉬운 일이 아니니 전혀 시도를 못 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에 독립예술제(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전신)가 그해 8월 말 대학로에서 열렸어요. 마침 주말에 대학로가 차없는 거리로 지정되면서 예술제 쪽에서 퍼레이드를 기획했어요(당시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이 연극의 날로 지정돼 대학로에 차없는 거리가 조성됐으며 예술인들의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 기자말).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예술제 쪽에서 같이 하자는 제안이 왔고, 조직위 회의에서 '먼저 한번 경험을 쌓아보자'며 참가하기로 결정했대요. 대학로에 처음 나갈 때만 해도 다른 데들과 다 같이 행진한다고 알고 간 거죠."
 

잡지 '버디'에 실린 1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사진(당시 '버디' 편집장이었던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퍼레이드 부기획단장이 촬영). ⓒ 한채윤

 
- 처음부터 단독 퀴어 퍼레이드는 아니었군요.
"그날 비가 왔어요. 다른 단체들은 다 안 나왔어요. 아무도. 저희만 일찍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비가 와도 저희는 할 거라고 했고(웃음). 예술제에서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너희끼리라도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단독으로 한국의 첫 퀴어 퍼레이드를 하게 됐죠. 예술제에서 섭외한 1.5톤 트럭 한 대도 그냥 쓰라고 해서 차량 무대 위에 저희만 올라갔어요. 트럭이랑 함께 대학로를 두 바퀴 도는 공식 행진이 끝난 뒤에 차량은 빠졌고, 저희끼리 그냥 한 바퀴 더 돌았어요(웃음). 너무 신이 나가지고.

만약에 다른 데와 함께 퍼레이드를 했으면 의미가 좀 달랐을 텐데, 단독 행진을 하게 되면서 제1회 축제 때 퍼레이드도 하고 파티, 토론회, 전시회도 열게 된 거죠. 그야말로 종합적인 문화축제가 된 셈이에요. 또한 1회의 그런 배경 때문에 한국에서 열리는 퀴어축제가 다른 나라와는 다른 독특함을 가지게 됐어요."

- 어떤 독특함이요?
"저희가 아는 외국의 퀴어축제는 사실 다 퍼레이드예요. 토론토 퍼레이드(Tronto Pride Parade), 뉴욕 퍼레이드(Pride March), 상파울로 퍼레이드(Sao Paulo LGBT Pride Parade), 시드니 마디그라(Sydney Gay and Lesbian Mardi Gras).

보통 프라이드 위크(pride week)나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로 정해서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 앞뒤로 여러 행사가 붙긴 붙죠. 퍼레이드 할 때 사람이 모이니까 온 김에 영화도 보고 전시도 구경하라고 하지만 이런 행사들은 퍼레이드와는 별도예요. 완전 다른 행사죠. 외국은 조직 자체가 전부 독립체예요. 영화제 따로, 퍼레이드 따로.

한국은 퍼레이드가 아니고 그야말로 퀴어 페스티벌, 축제죠. 하나의 축제 안에 퍼레이드와 부스 행사가 있고 영화제와 전시회, 토론회도 있어요. 그리고 하나의 조직위원회가 그것들을 전부 관리해요."

누가 뭐래도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마음

- 퀴어 퍼레이드는 개방된 곳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진인데요. 다들 처음이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진 않았나요?
"그래서 처음에 모였던 사람 수가 많지 않았고, 당초 독립예술제 퍼레이드에 섞여 들어가기로 돼 있던 거니까 약간은 위장막이 되긴 했죠. 물론 단독 행진을 했지만요. 결과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첫 퍼레이드를 했다고 보시면 돼요."

- 1회 때 퍼레이드 사진을 보면 지금 행진보다는 좀 어설픈 것 같아요. 다들 처음이라 어색해했나요?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여기 보시면... (그가 당시 만들고 있던 잡지 <버디> 18호를 펼쳐 '한국 최초의 자긍심 행렬 - 벽장을 나와 거리로 뛰어나온 동성애자들' 기사를 보여줬다.)
 

잡지 '버디' 18호에 실린 2000년 퀴어 퍼레이드 취재기 ⓒ 한채윤

 
이때만 해도 드랙(Drag, 성별과 상관없이 의상과 화장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 문화가 지금처럼 발달했을 때가 아닌데 드랙 하고 오신 분들이 두세 분 정도 계셨어요. 그분들이 차량 무대에 올라가서 구경하는 시민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그랬어요."

- 원래 두 바퀴만 돌기로 했는데 기분이 좋아서 한 번 더 돌았다고 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기분이었나요?
"퍼레이드를 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느낌이었어요. 짐작했던 감정을 훨씬 더 초월했죠."

- 일종의 해방감인가요?
"해방감일 수도 있고, 뭐랄까... 묘한 느낌인데요. 내가 동성애자인 걸 사람들이 알아도 괜찮아, 나는 떳떳해, 얼굴을 가리지 않을 거야, 볼 테면 보라지 하는 마음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막상 거리에 선 나를 사람들이 볼 거라고 생각하면 또 달라져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며 '누구지?' 하는 거랑 '뭐야, 쟤 게이야? 쟤 레즈비언이야?' 하는 건 다르잖아요. 그렇게 나를 볼 거라고, (성소수자로서) 그런 시선을 해석할 수 있는 경험은 없었으니까요.

'지금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어. 게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그 시선을 견디고 있어.' 이런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그런 불안을 견디고 나온 게 자랑스럽기도 해요. 또 다들 별 신경 안 쓰고 함께 걷는 것 같거든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어. 나도 그럴 수 있을 거야.' 복잡한 감정들이 점점 가슴 벅참으로 바뀌죠. 사람들이 돌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네, 괜찮은 건가,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이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한번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의 차이는 엄청 커요."

사라질 뻔한 축제의 재탄생
 

- 1회부터 20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퀴어축제에 참여한 거로 알고 있어요.
"1회 때는 조직위 소속이 아니고 잡지 <버디>의 취재 기자로서 갔어요. 조직위에 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서 첫 번째 회의는 참석했는데, 결국 참여는 안 했어요. 그땐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나는 취재하면 되지 싶었어요. 어쨌든 <버디>가 있어서 퀴어축제의 첫 번째 기록이 남은 셈이에요. 첫 해에는 주요 언론사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지 않았으니까요."

- 2회부터 조직위에 합류한 거군요. 계기가 있나요?
"첫 퀴어축제가 끝난 뒤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2001년에 호주 마디그라 퍼레이드를 취재하러 갔어요. 돌아와서 기사를 작성해 <한겨레21>에도 송고하고 현장에서 촬영해온 영상으로 상영회도 열어 외국 사례를 나름 전달했죠. 하지만 2회 퀴어축제를 이어서 열자는 생각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 권우성


 - 상황이 안 좋았나요?
"첫 축제를 마치고 조직위가 완전히 해산해버렸어요. 아무래도 대학생이 주축이다 보니 다들 졸업하거나 유학을 가는 식으로 일신상의 변동이 생겨 조직위를 유지하긴 힘들었어요. 게다가 첫 퀴어축제를 제안했던 서울 퀴어영화제도 2회 행사를 마치고 수천만 원 적자가 나서 조직위가 해산돼요.

1회 축제를 꾸린 팀을 도저히 다시 모을 순 없는 상태였는데 게이 인권운동 단체인 '친구사이' 박철민 대표가 '1회만 하고 끝내기엔 좀 아쉽다, 조직위를 새로 꾸려서 2회 축제를 열어보지 않겠냐'고 해서 참여했죠. 저를 포함한 몇 명이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에게 제안서를 돌렸고, 다 같이 모여서 본격적으로 축제 기획 회의를 시작했어요. 1회와 조직은 다르지만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해서 2회로 가기로 한 거고요. 마디그라도 보고 왔다는 이유로 제가 조직위원장을 맡았고요(웃음)."

-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조직위에 참여하신 거네요?
"그렇죠. 2회랑 3회, 6회부터 9회까지는 조직위원장을 맡았어요. 최근 10년간은 퍼레이드 기획단장으로 참여했고요."

- 본격적으로 퀴어축제를 이어가기로 결정한 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돈이죠. 축제는 돈 없이 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잖아요. 인건비는 자원 활동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어요. 그만큼 퀴어축제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1회는 그렇게 했다 쳐도 2회는 어떡할 거냐. 한번 다시 해보자 마음먹었는데, 당장 돈을 대체 어떻게 마련할 거냐. 인권단체들은 서로 다 가난하고 후원금을 턱 하고 내줄 개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 그래서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나요?
"여러 궁리를 했죠. '게이 바나 레즈비언 바 같은 업소에서 후원금을 조금 받아보자.' '기금 신청을 해보자.' 그렇게 모은 2회 예산이 600만 원이었어요. 그 돈 가지고 퍼레이드도 하고, 영화제가 없어져버렸으니 영화 상영회도 열기로 했죠. 또 밤에 파티도 하고 전시회도 꾸리고 토론회도 마련해서 갖출 건 다 갖췄어요.

다만 퍼레이드는 저희 힘으로만 하기 힘들어서 2회까지는 독립예술제를 따라가기로 했어요. 예술제가 당시에는 홍대에서 열려서 저희도 홍대 운동장에서 개막식을 치렀죠. 행진 코스는 예술제 사무국에서 빌리기로 했는데 경찰이 안 빌려주려 하더라고요. 마지막까지 경찰에 항의 전화 엄청 걸었어요. '안 빌려주시는 건 편견 때문입니까?' 경찰이 할 수 없이 빌려줬어요(웃음)."

- 홍대 운동장 돌고 나서 정문 앞으로 조금 나오는 코스였죠?
"정문 앞에서 400미터인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코스를 엄청 힘들게 따냈죠. 처음엔 예술제의 도움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따낸 건 저희의 힘이 있기도 한 거예요. 다음부터는 우리의 힘으로 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예술제에도 민폐고 언제 어디서 할 건지도 예술제 따라서 정해야 하니까... 3회부터는 완전히 별개의 행사로 갔어요. 단독으로 일정과 장소를 잡았죠."

함께 가는 열 걸음

- 축제 참가자를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나요?
"어렵고 안 어렵고의 문제는 전혀 아니었어요. 물론 사람들이 안 올까봐 걱정은 했죠. 3회부터는 이름도 '무지개 영화제'라고 붙이고 상영 작품 수를 조금씩 늘리면서 영화제 꼴을 갖춰 갔거든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기금을 받아 진행했지만 극장도 빌려야 하고 작품도 가져와야 하니 돈이 막 들어갔어요. 유료 관객 수가 곧 수익이고 그걸로 대관료를 메워야 하니까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보러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홍보도 많이 했고요.

하지만 퍼레이드는 참가자 규모를 인위적으로 늘리려고 할 수는 없어요. 여기에 나오는 참가자들은 자기가 노출되거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들이 있는 상태예요. 그럼에도 불안을 살짝 누르며 뭔가 해보겠다고 나오는 거잖아요. 1000명, 2000명, 이런 식으로 목표를 세워서 한다? 안 돼요".

- 참가자의 자발적인 의지와 의사가 중요하단 뜻이군요.
"앞서 말한 퍼레이드의 그 감정과 감각을 한국의 많은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들이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참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인원을 늘릴까를 생각할 순 없는 거예요.

한편으로 고민되는 지점이 있죠. 참가자 안전이 중요하니까 언론 취재에 완전히 협조적일 순 없어요.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할 순 있지만 영상은 찍히면 얼굴을 가리기 어렵잖아요. 방송 취재는 웬만하면 거부하든가 믿을만한 기자에게만 촬영을 허가해야만 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참가자 안전이 지켜지긴 하는데 언론사들이 취재하기 힘들다면서 안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취재 해달라 해도 오네 마네 할 판에(웃음). 행사가 6회, 7회로 나아갈 무렵의 딜레마였죠.

저희끼리만 숨어서 행진을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논의도 있었어요. 취재 협조를 안 하면 참가자 보호는 되지만 언론에 노출이 안 되니 축제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알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LGBT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을 목표로 삼을 순 없었어요. 아직까지 한국 사회는 거기까지 가지 않았잖아요."
 

2005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적소수자들의 거리 행진에 많은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시민들과 악수하는 홍석천씨. ⓒ 오마이뉴스

 
- 딜레마 사이에서 찾은 답은 무엇인가요?
"함께 가는 열 걸음?(웃음) 온갖 방법을 시도해봤죠. 처음엔 얼굴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은 빨간 띠를 두르게 했어요. 그런데 머리에 두르니까 이게 빨간 띠인지 머리띠인지 알 수가 없고, 왼쪽 팔에 띠를 매면 오른쪽에서는 안 보이고, 커밍아웃하려는 사람들이 엉뚱하게 모자이크 처리 돼 있고... 완벽하게 식별이 안 됐어요. 보호랍시고 하는데 전혀 보호되지 않고. 그 다음에는 얼굴에 스티커를 붙이게 했는데 이게 또 땀에 떨어지는 거예요. 스티커 제도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죠."

- 지금은 어떻게 식별하나요?
"2010년 무렵부터는 기자들에게 프레스 카드를 발급하며 안내해요. 초상권 침해 일어나면 해당 언론의 책임, 참가자의 얼굴을 내보낼 때는 기자가 직접 본인에게 확인할 것. 어쨌든 조금씩 더 나아가려고 하는 거니 너무 겁을 먹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필요했어요. 안전과 과보호는 다르니까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자 했죠. 만약 참가자 본인이 겁난다면 자기 방식대로 알아서 가리는 게 나아요."

차별금지법 제정 실패, '동성애 혐오' 세력의 등장
 

- 퍼레이드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도 궁금해요. 축제 초기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있나요?
"처음에는 적대적이었는데 점점 나아졌어, 이런 건 아니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처음 대학로에서 행진할 때부터도 시민 반응이 그렇게 부정적이진 않았어요. '신기한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였죠.

저희가 무대 설치하고 공연하면 그 앞에서 보고 즐기는 건 잘하세요. 풍물패가 악기를 연주하면 지나가다가 '뭔가 하고 있네? 같이 놀아도 되나' 하면서 오는 분들도 있어요. 반면에 퍼레이드 문화는 낯설어서 그런지 지나갈 때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지를 어려워하신 것 같아요. 저기 사람들이 지나가네, 대중가요 틀고 춤추는 걸 보면 시위대는 아닌 것 같고... 라는 식이었죠."

- 행사의 틀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서 2007년부터는 축제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간 듯해요. 법과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구호도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어요.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성적 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시도했어요. 2007년 10월에서 12월, 그때 인권 단체들이 벌였던 싸움이 가져온 변화가 크죠. 법 제정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장서연 변호사가 커밍아웃을 하자 법조인들이 운동에 붙게 되고, 대학생들이 LGBT 모임을 재조직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청소년 청소수자들이 본격적으로 운동에 합류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2007년이에요. 당시 제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였는데, 저희가 주말마다 신촌 공원에 나가서 이동 상담소를 차리고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만났어요. 토요일, 일요일이면 신촌에 레즈비언 청소년들이 200명 정도 모여 있었어요. 그들과 같이 놀고 이야기하고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조직하게 됐죠.

그때 '이반 검열'이라고 해서 학교에서 동성애자 검열하는 문제로 성소수자 단체들이 청소년 인권 활동을 펼치는 시점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청소년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붙었고, 퀴어축제에도 참여하면서 2009년 10회 때는 부스 행사도 열었죠.
 

2018년 7월 14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모습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 그렇게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단결과 결속을 이루면서 본격적으로 법적·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건가요?
"음... 사실 훨씬 전부터 있던 흐름이었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청소년보호법시행령 제7조 다항에 있는 청소년 유해매체 심의기준에 동성애가 포함돼 있었어요. 수간, 근친상간, 동성애 등. 인권단체들이 '동성애만 다루면 무조건 유해하냐'며 항의했고, 이 싸움의 결과 2004년 4월 30일자로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매체에서 제외하는 성과를 이뤄내요. 그 전인 2001년에는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이 통과됐고요. 자연스럽게 차별금지법 논의도 2003년 무렵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이런 식으로 성소수자 권리 보장을 위한 법적·제도적 관심과 변화와 이어져왔는데 갑자기 2007년을 기점으로 꺾여요. 그해 10월 정부가 차별금지 대상에 '성적 지향'을 포함한 법안을 내놓으니까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거세게 반대했어요. 우리도 법안이 그렇게 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다 결국 차별금지법을 못 만들게 됐어요.

정말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안 만들어질 수 있지? 정부와도 별 갈등이 없었는데. 인권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가야 한다는 것도 사회 전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는데. 그 뒤로 13년째 법이 안 만들어질 줄이야. 2008년 이명박 정부, 2013년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흐름이 완전히 끊긴 상태예요. 노무현 정부 때 차별금지법이 제정 안 된 건 그래서 지금도 참 아쉬워요. 오히려 점점 강력해지는 성소수자 혐오를 보면 안타깝죠."

- 성소수자 혐오를 드러내는 보수 기독교 단체가 등장한 시점도 그때인가요?
"맞아요. 현재 그들의 뿌리는 차별금지법 반대예요. 노무현 정부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거예요. 성적 지향을 빼라고 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법과 제도로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2000년 초반에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면, 2007년 이후부터는 뭐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거예요(웃음)."

위기를 기회로
 

퀴어퍼레이드 반대 기습시위 지난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때도, '동성애는 죄'가 적힌 한 사람이 행렬을 가로막고 기습시위를 벌였다. ⓒ 권우성

 
- 2010년 이후부터 보수 기독교 안에서 이른바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집단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서울학생인권조례와 차별금지법 제정 등 성소수자 현안에 반대해오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2014년부터는 작정하고 축제를 방해했습니다. 처음 그들을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보수 기독교 단체가 2011년 학생인권조례 반대할 때만 해도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요. 몇십 명 모이는 정도였죠. 세력 동원 자체보다는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여러 자본을 활용했어요. 신문에 광고를 내버린다거나 지역구 의원들에게 전화 걸어서 항의하거나 대형교회에서 전단지를 뿌려버린다든가, 신도들에게 서명지를 받는다든가 했죠. 퀴어축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들의 시선이 퀴어축제를 향하기 시작한 게 바로 2013년부터예요. 종로와 청계천에서 축제를 해오다가 그해에는 홍대에서 열었는데 굉장히 잘됐어요. 퍼레이드에 5000명 정도 참여했고, 옆에서 행진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어요. 하리수씨가 나와서 언론에도 많이 보도됐죠.

그런데 축제 행사장 주변에 대형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그곳 목사님이 '아니 지금 우리 교회 옆에서 이런 행사를 했단 말인가' 했다는 거예요. 마포구가 그야말로 뒤집어졌어요. 교인들이 마포구청장한테 전화 걸어 항의하고... 저희는 홍대 행사가 너무 잘돼서 다음해에도 거기서 하고 싶었는데 마포구가 허가해주지 않았어요."

- 2014년에는 신촌에서 개최한 게 그런 까닭이었군요.
"할 수 없이 13회 축제 장소는 지역 상인회와 상의해서 신촌으로 잡았고 서대문구청의 허가도 받았죠. 마침 신촌이 토요일마다 차없는 거리로 지정돼서 조건도 아주 좋았어요. 언론에도 보도됐는데, 그걸 보고 신촌에 있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보수 기독교 단체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신촌 퍼레이드 때 그분들이 행렬 앞에 드러누워서 도로에서 4시간 반 동안 대치하다가 결국 예정된 코스대로 돌았어요. 그 뒤로 2015년, 2016년, 2017년 계속 쭉..."

- 그 뒤로는 장소 섭외 단계부터 저지하려 했죠?
"2015년이 굉장히 악랄했죠."

- 그해에 보수 기독교 단체의 방해로 장소를 못 구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처음으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었습니다. 그때부터 축제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어요. 지금은 참가자가 몇만 명 단위고 참가 부스도 70곳이 넘죠.
"그래서 저희끼리는 '그분들이 키워주신 축제'라고...(웃음)"

퀴어 축제의 르네상스... 여전한 숙제
 

14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015년 6월 28일 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이희훈

 
- 지금이 "퀴어문화축제의 르네상스"라는 평가도 있어요. 소감이 궁금해요.
"참가자가 늘어서 감격스러워할 수많은 없는 상황이에요. 여전히 어떻게든 훼방놓으려는 사람들이 옆에 있잖아요. 행사장으로 들어오는 길에 혐오 발언을 들어야 하니 참가자들이 받을 상처도, 스태프와 자원활동가들의 안전도 걱정되죠. 퍼레이드만 해도 지난 20회 때는 중복을 포함하면 약 15만 명 정도 와주셨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크게 사고가 난 적이 없는데 앞으로는 이만큼의 숫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 때문에 부담감이 훨씬 더 커요."

- 현재를 만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네요.
"저희가 이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에요(웃음). 축제가 굉장히 커보여서 돈이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아니에요. 축제는 적자예요(웃음)."

- 기업체들의 참여가 늘어서 자금 문제가 좀 해소되지 않았나요?
"기업체의 후원 비중이 크지 않은 건 여전해요. 아직까지 참가자 개인 후원이 훨씬 더 많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필요 예산이 그만큼 같이 증가해요. 아시겠지만 축제는 사람들이 현장에 와서 굿즈(기획 상품)를 사시고,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셔야 수익이 나는 구조잖아요. 행사를 마친 다음에는 다음 행사를 준비하기 전까지의 돈이 남아야 해요. 사전에 쓸 수 있는 돈이 없으면 어려움이 있어요. 지출보다 수입이 많아야지 돈이 남아서 그 다음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데, 지출은 정해져 있는 반면에 수입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늘 불안해요. 갑자기 비가 온다, 태풍이 온다, 이런 것들? 날씨라는 변수가 너무 크게 작용해요. 2016년, 2017년은 거의 태풍이 몰아치듯이 비가 왔고 2018년은 기온이 33도까지 올라서 엄청 더웠는데 2019년은 날씨가 좋았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더우나 비가 오나 몇만 명은 오셔요. 그런데 날이 좋으면 훨씬 더 많이 오신다는 걸 지난해 알았어요(웃음). 그것뿐만 아니라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더 많아서 감개무량하다는 감정은 별로 느낄 틈이 없긴 해요."

- 어떤 숙제들이 있죠?
"2000년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비가 와서 행사 참가자 수가 늘지 않은 적은 있어도 규모가 줄어든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렇게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싶었죠. 70명 오면 그 다음에는 200명 오고, 400명 오고. 저희가 놀란 건, 2014년 신촌 축제가 15000명이었는데 다음 해 서울광장에 3만 명 가까이 오셨다는 점이에요. 100명에서 200명, 1000명에서 2000명으로 느는 거랑 만 명에서 2만 명 느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잖아요. 이렇게 갑자기 큰 폭으로 성장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저희는 행사 전문가들이 모여 축제를 기획하는 게 아니에요. 사무국 두세 명 빼고는 월급을 안 받고 일해요. 다들 자기의 일을 하면서 축제 준비에 참여한다는 뜻이에요. 즉 비전문가들인데 퍼레이드만 전문가가 되어 있는 형태이기도 하죠. 규모가 커지면 퍼레이드 전문가여야할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모이는 행사의 안전과 질서를 위한 전문가가 되어야 해요. 그런 전문 능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조직위의 과제죠.

다행히 저를 포함해 10년 이상 퀴어축제를 기획해오신 분들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괜찮아요. 앞으로가 걱정이죠. 저희가 계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 조직위의 지속성 또한 과제군요.
"행사의 매뉴얼을 정교하게 잡아가고 행사를 만드는 과정과 방식을 잘 조직화하는 것. 내부에서 체계적으로 재교육을 하고 전문성을 쌓는 것. 원래 가고자 했던 목표와 얻고자 한 가치를 잃지 않는 것. 이것들이 앞으로 몇 년 간의 숙제예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사단법인이 되려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지금은 그냥 단체예요. 정식으로 사단법인이 돼서 조직의 틀을 탄탄하고 안정적으로 갖추려는데 서울시는 주무부서가 없다는 이유로 허가를 안 해주고 있죠. 공무원들이 겁먹어서 그렇지, 설립 허가하기 전에는 공격하는데 허가하고 나면 공격 안 해요. 법무부도 비온뒤무지개재단 허가를 3년이나 끌었잖아요. 지금은 공격 안 해요. 아무도 모를 때 허가해주면 될 텐데(웃음)."
 
퀴어 축제를 대하는 경찰의 변화

 

퀴어문화축제와 맞불집회 2019년 6월 1일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맞은편에서 일부 개신교 단체들이 반대 집회를 열자 경찰이 광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 권우성

 
- 1회와 20회를 비교했을 때 축제 규모나 참가 인원을 제외하고 무엇이 가장 크게 변했을까요?
"글쎄요... 경찰의 협조?(웃음) 2007년부터 6년간 청계천에서 행진하는 동안에는 경찰이 집회신고를 아예 안 받아줬어요. 토요일마다 청계천이 차없는 거리니까 그냥 거기서 문화행사로 하라고 했죠. 퍼레이드를 하면 정보과 형사가 그냥 한번 와서 둘러보는 정도였어요. 참가자들 안전은 저희가 지켜야 했어요.

2013년 홍대로 가면서부터 집회신고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처음 경험한 게 경찰이 저희를 보호하러 나왔다는 사실이었어요. 지금은 경찰이 '서로 잘 협조해서 이 행사를 안전하게 끝내는 게 모두에게 좋다'며 협상을 해요. 저희가 '오후 4시 반에 퍼레이드가 출발해야 한다' 요구하면 경찰은 '5시가 더 안전한데'라는 식으로. 이런 부분들이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달라진 점으로 느끼죠. 경찰도 여러 번 하니까 익숙해졌는지 2019년 퍼레이드는 혐오 세력 차단이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어요(웃음).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경찰이 움직인다는 것이 사실 보통의 집회에서는 경험 못하는 일에요. 집회에서는 경찰이 참가자를 채증하고 어떻게든 빨리 해산시키려 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잡아가려고 하잖아요. 퍼레이드는 그렇진 않아요."

- 보통의 시민으로서 보호하는 걸까요?
"그래서 낯설어요(웃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고민이 돼요. 똑같은 경찰이 다른 집회 가서는 탄압하고 저희는 보호해주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퀴어축제는 문화 축제지만 함께하고 있는 건 인권시민단체이기 때문에... 양면적인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다만 인천 퀴어 퍼레이드라든지 다른 지역 축제를 보면 정말 경찰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안전의 정도가 확 달라져요."

- 1회 인천 퀴어문화축제 때는 경찰이 보수 기독교 단체의 폭력적 행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죠.
"서울 퀴어축제의 경우에는 경찰이 저희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다 친 다음에 입구를 딱 하나만 열어놓고 참가자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혐오 세력이 들어오는 걸 막아요. 저희도 매번 협상할 때는 바리게이트를 치지 않는 거로 협상하는데 당일에 가까이 갈수록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 안에서 훨씬 강력한 메시지 나와요. 엎어버린다, 칼 들고 간다, 온갖 얘기들이 다 나오기 때문에..."

- 섬뜩하네요.
"마지막에는 결국 바리게이트를 치되 그 면적을 최소화하는 협상을 하죠. 이런 식으로 경찰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참가자 안전에 꽤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에요. 혐오 세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저희가 경찰과의 협상을 현명하게 끌고 가야죠."

갈등 아니고 괴롭힘입니다
 

"동성결혼 정책은 국민말살 정책" 북치고 춤추고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 열리자 이를 반대하는 집회참가자들이 북을 치며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 이희훈

 
- 올해에도 21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릴 텐데요. 당장 보수 기독교 단체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될 듯해요.
"근본적으로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 문제예요. 왜 나와서 남의 축제를 방해하냐고 자꾸 말해야 해요. 누군가를 괴롭히는 혐오를 드러내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 계속 들어가면 보수 개신교도 욕먹고 싶지 않아서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 결국 여론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언론에서는 자꾸 두 집단의 갈등으로 다뤄요. 자꾸 동성애자와 개신교 신자의 충돌이라고 비교하니까 그들도 혐오가 아니고 의견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성소수자는 악마의 세력이기 때문에 나는 구국의 심정으로 반대하는 거다, 그렇게 얘기해요. 아니 그러면 뭐 저희는 자기 일신의 안위만 중요해서 '저 동성애자예요!' 하며 나온 사람인가요?(웃음)

갈등이 아니고 저희가 괴롭힘당하는 중이에요. '지금 종교가 성소수자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가'라는 시선으로 언론들이 현장을 다뤄주셨으면 좋겠어요."

- 지금까지 축제를 진행해오면서 '하길 잘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 때는 언제인가요?
"저희끼리는 '퀴퍼뽕'이라고 하거든요(웃음). 이 말처럼 퀴어축제에 와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어요. '나 굉장히 인생 잘 살았어' '성소수자인 게 부끄럽지 않아'라고 느껴지고... 그런 자긍심을 강력하게 줄 수 있는 축제예요.

퀴어 퍼레이드에 나온 사람들은 울분을 터트리며 '다 때려 부수자'는 게 아니에요. '다 됐고, 오늘은 즐거울 거야' '이 배지 한번 달아볼래? 내가 굉장히 정성스럽게 디자인했어' 하며 굿즈가 돌죠. 단순히 상업적인 거랑 달라요. 막 찍어내서 만드는 게 아니라 디자인 하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어떻게 담아볼까 하나하나 고민해서 나오는 것들이에요.

누구든 축제에 와서 꼭 한번 보시면 좋겠어요. 퀴어축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축제와도 비교되지 않는 독특함이 있어요. 그런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건 제게 큰 자긍심이죠."

퀴어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나
 

- 세계적인 축제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퀴어축제는 잘 되고 있는 편인가요?
"전세계적으로 볼 때는 규모 자체는 서울이 큰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서울의 퀴어축제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 상업화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외국의 퀴어 퍼레이드에는 상업 부스가 너무 많대요. 시민단체 쪽 부스는 몇 개 안 되고요. 서울은 80~90%가 인권 시민단체예요. 비영리 민간단체의 비중이 그 정도인 건 거의 뭐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죠."

- 세계 최초로 퀴어 퍼레이드를 시작한 미국 프라이드 행진만 해도 상업화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죠.
"LGBT를 대상으로 뭔가 팔고자하는 기업들이 '이날 대목이다' 하며 들어오거나, 스폰서인 회사가 '트랜스젠더를 좀 배제하면 좋겠어'라고 요구하는 식의 일들은 일어나면 안 되죠. 스폰서는 행사를 지원하는 역할이니까요. 스폰서가 돈 주니까 말 들을래, 이렇게 하지 않는 걸 저희는 상업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기업 돈을 받으면 다 상업화라고 생각하는 시선도 있는 것 같아요. 예산에서 기업의 돈이 몇 퍼센트인지, 돈을 받는 형식 어떤지 살펴봐야 하는데 말이죠. 구글, 러쉬, HP 등 유명 기업들이 참여하니까 자금이 많을 거라 추측하시지만 이들이 내는 돈은 전체 예산의 극히 일부분이에요. 퀴어축제는 아직 그런 비판을 받을 만큼 상업화의 ㅅ자도 되지 않은 상태예요(웃음).

한편으로 기업체의 참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사실에 위로를 받는 분들이 있거든요. '기업들이 온다는 건 한국 사회가 많이 변하고 있다는 의미야.' 그렇게 기업의 이름이 느는 데 위안을 얻는 분들도 계세요."
 

성소수자 기습시위 벌인 문재인 회견장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6일 오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열린 ‘천군만마(千軍萬馬) 국방안보 1000인 지지선언’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마친 직후 성소수자 단체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레인보우 깃발을 들고 문 후보를 향해 기습시위를 벌인 이들은 전날 TV토론에서 "동성애 반대 뜻을 밝힌 것에 대해 문 후보의 사과를 촉구했다. ⓒ 남소연

 
- 축제가 대대적으로 발전한 20년 동안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인식과 태도 또한 달라졌다고들 합니다. 축제의 성장과 비교했을 때 퀴어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나요?
"축제가 성장한 만큼 사회가 안 따라왔다고 느끼고요. 안 따라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드러내놓고 성소수자를 아주 노골적으로 혐오하는 세력이 있는 반면에, 여기에 함께 대응하려는 사람들 또한 늘어나면서 축제 규모가 커지는 측면이 있어요. 저쪽보다 퀴어축제에 더 많이 모여야 혐오가 사회 전반적인 의견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사회가 '혐오하는 사람보다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이 더 많네'라고 받아들이며 변화해야 하는데, 전혀 안 움직이고 있어요. 사회를 바꾸는 권력과 권한을 가진 정치가 그만큼 안 따라오고 있잖아요.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세요. '광장에 성소수자 몇만 명이 모인다고? 옛날에는 꿈도 못 꾸는 일이지.' 한국 사회가 변해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에요.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힘이 모이고 있다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모인 힘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정치권이 직시하고 인정했으면 해요."

- 퀴어축제의 성장과 사회 변화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가 정치권에 있는 셈이네요.
"2019년 축제 때 순천향대학병원 의료진이 나와서 의료 부스를 운영해주셨어요. 그곳에서 의사로 일하는 분이 병원에 동의를 구하고 간호사와 함께 광장에 나와 하루종일 자리를 지켜주셨어요. 앰뷸런스도 왔어요. 순천향대에 항의 전화도 오고 그랬대요. 그럼에도 못 나갈 이유가 없다며 와주신 이분들의 결정은 정말 멋진 일이에요. 아름다운 일인데, 이걸 한국 사회의 변화로 퉁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분들은 엄청나게 노력하신 거예요. 이런 식의 변화를 사회가 어떻게 따라갈 거냐를 이야기해야 해요."

우리에게는 환대가 필요하다
 

- 앞으로의 퀴어축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시나요?
"시드니 마디그라는 행진을 하면 양쪽 옆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요. 좋은 자리 잡으려고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와요. 호주는 길 옆에 바리게이트를 쫙 치거든요. 그 바로 앞 자리를 맡으려고 하는 거예요. 가까이서 구경하려고. 참가자들은 퍼레이드 내내 시민들의 뜨거운 환호와 환대를 받으며 행진해요. 2001년에 호주에 갔을 때 제가 보고 온 건 바로 그 광경이에요. 한국의 LGBT도 그런 자긍심과 환대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축제를 해온 것 같아요.

지금 서울 퍼레이드도 규모는 굉장히 늘어났죠. 거리에 선 시민들의 반응도 나쁘진 않아요. '와, 그래도 돌을 던지진 않아' 정도? 그렇지만 제가 호주에서 봤던 환대를 아직 한국에서는 못 느껴봤어요."

- 저부터도 시민으로서 퀴어 퍼레이드 행렬을 어떻게 환대할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용기를 내 나온 사람들이에요. 이들을 보며 '내 주변에 성소수자가 이렇게 많았구나' '준비하고 나오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반가워요' 하고 손을 흔들어주는 소통요. 이게 안 돼요. 신기하다며 사진 찍고 SNS에 '동성애자들인 것 같음, 팬티만 입었음' 하고 올리시니까(웃음)."
 

무지개 깃발 휘날리는 퀴어퍼레이드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된 1일 오후 주요 행사가 열린 서울광장을 출발해 광화문광장을 돌아오는 구간에서 대규모 서울퀴어퍼레이드가 펼처진 가운데, 참가자들이 광화문광장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들고 있다. ⓒ 권우성


- 퀴어축제를 낯설어하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집회는 모여서 동시에 목소리 내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정부가 꿈쩍도 안 하니까, 흩어진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 내는 경험을 해야 각자의 현장에서 계속 투쟁할 수 있으니까 결의를 다지기 위해 모이는 거잖아요. 퀴어 퍼레이드도 마찬가지예요."

- 어떤 점에서요?
"약간 이상해서 사회활동 못하는 애들, 내 주변에는 없는 사람들, 이게 성소수자를 향한 강한 편견이란 말이죠. 그건 부끄러운 짓이다, 어떻게 동성끼리 사랑하냐,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라고 말할 수 있냐, 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냐, 이런 방식으로 사회에서 혐오와 멸시를 받는 존재잖아요. 아이가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면 '절대 이웃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며 애를 숨겨요. 트랜스젠더가 집에서 커밍아웃하면 가장 많이 당하는 게 감금이에요. 성소수자는 가둬지고 부정당하고, 드러나지 않게 존재가 감춰져요.

딱 이 부분을 바로 건드리는 게 성소수자의 자긍심 행진, 프라이드 퍼레이드예요. 나는 여기 있고, 전혀 부끄럽지 않고, 자신을 긍정하고 있는 나를 당신이 봤으면 좋겠다,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 사회에 말을 걸고 있는 거군요.
"실제로 퍼레이드를 보고 생각이 바뀌는 분들도 계세요. 회사 동료 중에서도 있었네? 나는 누군가에게 왜 그 따위냐는 말만 들어도 금세 의기소침해지는데. 사회의 비하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나올 수 있는 저 당당함은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데.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니 너무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이렇게 의식이 바뀌어요.

1987년 민주화 운동 할 때 시민들이 백골단에 쫓기는 대학생 숨겨주고 시위대 지나갈 때 택시들이 경적 울려서 동조하고 그랬잖아요. 사회를 바꾸자는 목소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움직임에 시민들이 동참한 역사가 미담처럼 남아 있죠.

성소수자들과도 그렇게 뜨거운 환대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퀴어축제가 더 변화하고 성장할, 새로운 퀴어 퍼레이드 문화를 만들어낼 여지는 아직 남아 있는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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