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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이후 바뀐 종로 판세... 이번엔?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종로 선거구의 정치사적 의미

등록 2020.02.10 19:01수정 2020.02.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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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 서울 종로에 출마를 선언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무산되는가 싶었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험지 출마'가 서울 종로구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 7일 오후 그는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저 황교안, 종로 지역구 출마를 선언합니다"라며 "저는 지금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의 '빅매치'가 이로써 성사됐다.

2020년 1월 3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외 집회에 참석한 황교안은 "올해 총선에서 수도권 험지에 출마하겠습니다"라고 천명했다. 종로구 출마를 시사할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종로구에 '반드시' 출마하겠다는 발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종로구 출마로 몰고 갔다. 험지 출마를 선언한 그 지역에서 결국 그는 험지 출마를 하게 됐다.

긴급기자회견 이전만 해도, 그는 종로 출마에 부정적이었다. 이틀 전인 지난 5일엔 국회에서 기자들에게 "이리 와라 하면 이리 가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라며 자신을 진짜 험지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런 기류는 긴급기자회견 때도 어느 정도 드러나 보인다. 그는 "종로 출마가 이 정권이 만들어놓은 나쁜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라며 "그들이 쳐놓은 함정이든 그밖에 무슨 어려움이든 모든 것 뛰어넘어 반드시 총선에서 승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종로 출마를 탐탁치 않아 하는 정서도 엿볼 수 있다.

2020년판 '자의반 타의반'

5.16 쿠데타로부터 2년도 안 된 1963년 2월 25일, 정치적 곤경에 빠져 한국을 떠나게 된 김종필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은 공항 출발 전 중앙청에서 "왜 외유를 떠나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에 따르면 그는 그렇게 답변했지만, 훗날 국회의장이 될 이만섭 <동아일보> 기자가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도함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고 말았다. 황교안의 종로구 출마도 어느 정도는 '자의반 타의반'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의 경우에는 '타의'가 '반'이 아니라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본인이 꺼낸 말 때문에 겪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은 정치 신인인 황교안 대표에게 종로구 출마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유력 대권후보인 이낙연 전 총리와의 대결해서 패하면 '2022년 대선도 보나마나'라는 중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심정으로" 정치 생명을 걸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정치 1번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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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 wiki commons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1948년 5월 10일 제1대 총선 당시, 준정당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 이승만은 종로구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의 집인 이화장은 종로구 이화동에 있었음에도 옆동네인 동대문갑구에 출마했다.

서울 중구와 더불어 종로구는 1948년 당시엔 지금보다 더한 정치적 비중이 있었다. 이승만 같은 거물이 종로구나 중구에서 낙선하면 이미지의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동대문갑구 출마는 그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종로구는 '정치 1번지'로 불렸다. 유신체제 하의 제9대 총선을 12일 앞두고 발행된 1973년 2월 15일 치 <경향신문> 기사 '2.27 이색 대결 지대'는 "전국 제1선거구인 종로·중구는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정치 1번지"라고 설명했다.

대체로 정치 의식이 높은 곳은 노동운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는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적 본질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 수준이 비교적 높다. 하지만 제1대 총선 이후로 우리 사회는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시대의 중앙행정관청들이 위치한 곳이라는 인상 때문에 종로의 정치 의식수준을 높게 평가해 왔다.

'종로는 정치의식이 높을 것'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종로의 위상을 높여준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한양 4대문 내에 있다는 점이다.

종로구니 중구니 하는 구(區) 제도가 서울에 도입된 것은 해방 2년 전인 1943년이다. 조선총독부령 제163호가 법적 근거가 됐다. 이때 경성부는 조선왕조 시절의 한성부와 더불어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이곳에 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를 설치했다. 이 7개 구 중에서 중구와 종로구는 4대문 내부를 관할하게 됐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조선시대 한성부의 북부는 종로구, 남부는 중구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내의 청계천 이남이 '남촌'으로 불렸다. 지금의 중구가 그런 속칭으로 불렸던 것이다. 1943년에 총독부가 이곳을 중구로 명명하게 된 것은 위 7개 구 중에서 이곳이 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상징성으로 본다면 종로구가 중구가 돼야 했지만, 7개 구 중에서 종로구가 가장 북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곤란했을 법하다.

중국이란 칭호가 갖는 권위에 익숙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청계천 이남은 중구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총독부가 부여한 중(中)이란 글자의 힘은 종로구와 중구의 관계를 다소 모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조선시대 관청과 국립대학이 있었던 종로구가 상대적으로 위상이 더 높은데도, 중심과 중앙의 의미가 담긴 중구가 형식상 앞자리를 차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1958년 제4대 총선 때 종로갑구와 종로을구가 각각 서울 제1선거구·제2선거구로 지정되기 전까지, 중구는 서울 제1선거구의 위상을 유지했다. 중구가 제1선거구가 된 것은 상당부분 중(中)이라는 언어의 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중구 역시 4대문 내에 있기 때문에 종로구에 필적할 만한 위상을 가지기 쉬웠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종로구에서 벌어진 이승만의 정치타협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 눈빛출판사

 
전통적인 정치의 중심지이지만 중(中) 타이틀을 빼앗긴 종로구의 위상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하나 있다. 이승만 정권과 이북 출신들의 정치적 타협이 바로 그것이다.

해방정국 하의 좌우 대결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을 지지한 이북 출신들은 1948년 총선 전에 '특별선거구'를 요구했다. 남한에서 지역 기반이 취약한 자신들이 국회에 진출하려면 일반 지역구와는 다른 특별한 선거구가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다. 이들은 국회 의석 3분의 1을 자신들에게 배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유엔이 남한 단독선거 방침을 결정한 상태에서, 이들이 형식적으로나마 한반도 전체 선거를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요구는 유엔에 의해 거절됐다. 그래서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자 친미보수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그들을 달래고자 제시한 카드가, 종로갑구를 북한에 있는 조만식의 측근인 전 조선민주당 부당수 이윤영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김일성과 대립하는 조만식 쪽에 종로갑구를 내줌으로써 한국민주당이 이북 출신들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종로갑에 출마하려 했던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가 이윤영을 위해 용단을 내린 결과였다.

만약 이때 종로구가 종로구가 아닌 중구로 불렸다면, 이북 출신에게 지역구를 내주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북민들의 협조가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가장 중요한 지역구를 내주게 되면 남한 토착세력이 반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중구가 형식상 제1위의 위상을 갖고 있었기에, 종로구를 내주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좀 더 줄어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민주당의 양보로 종로구를 받은 이윤영은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가 내세운 박순천을 가볍게 따돌리고 당선했다. 이윤영은 56.1%, 박순천은 15.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여세를 몰아 이윤영은 초대 국무총리 서리에 올랐다. 훗날 박정희 정권 때는 '국민의 당'에서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윤영의 종로구 출마는 그를 매개로 한 조만식 계열과 한국민주당의 정치적 동맹을 상징했다. 이런 상징적 이벤트가 벌어질 정도로 당시의 종로구는 지금의 종로구 이상으로 중요했다. 그래서 거물급 후보들이 이곳을 즐겨 찾고, 또 여기서 당선된 인물들이 거물급으로 성장하는 일이 많았다.

종로구를 거친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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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 21일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도렴동 선거사무실에서의 부인 권양숙 여사 및 운동원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윤영에게 패한 박순천은 2대 총선 때 종로갑에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그 뒤 야당 지도자로 성장하면서, 여러 선거구에서 5선 경력을 쌓았다. 이윤영이 갑구에 출마할 때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장면은 1951년에 총리가 되고 1956년에 부통령이 됐다가 1960년 4.19 혁명 뒤 내각제 총리가 됐다.

장면이 총리일 때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1954년 3대 총선 때 종로갑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이곳에서 3선을 했다. 한편, 3대 때 종로을구에서는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당선했다.

갑구·을구가 하나의 종로구가 통합된 뒤인 1967년 7대 총선에서는 유진오라는 거물이 당선되고, 1977년 보궐선거에서는 33세의 정치신인 정대철이 영광을 안았다. 정대철은 1978년 10대 총선 때 다시 한번 이곳에서 당선됐다.

그 뒤로는 이종찬의 시대가 이어졌다. 훗날 김대중 정권 국가정보원장이 된 그는 1981년 제11대 총선 때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14대 때까지 이곳에서 선수를 쌓았다. 하지만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긴 뒤 이곳을 빼앗겼다. 1996년 제15대 총선 때 이명박에게 패한 것.

이명박이 사퇴한 뒤인 1998년 보궐선거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다. 제15대 때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이명박·이종찬에 밀려 3위로 낙선한 새정치국민회의 노무현이 이 선거에서 당선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한 뒤로 선거 때마다 연거푸 고배를 마셨던 노무현은 이 승리를 발판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2000년 부산북구·강서을구 험지 출마에 도전하게 됐다. 2000년에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노사모의 지원을 받아 2002년 대선에 승리하게 됐다.

이종찬의 4연속 당선 뒤 무주공산 같았던 종로구는 2002년 재선거에 당선된 박진이 17대·18대 총선에서 연달아 당선되면서 다시 1인 독주 체제를 보이게 됐다. 박진의 독주 체제는 19대와 20대에서 연거푸 당선된 민주당 정세균의 독주 체제로 바뀌었다. 정세균의 독주 체제가 어느 정도 견고해진 상태에서 황교안 대표가 이번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 것이다.

40년 가까이 보수우세, 정세균 이후 바뀐 판도... 이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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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공동 상임선대위원장직 수락과 함께 종로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낙원빌딩을 찾아 낙원아파트 주민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남소연

 
거물급들이 출마하거나 배출된 곳이라는 점과 함께, 종로구 선거에서 나타나는 흐름이 있다. 1948년 선거에서는 보수파 이윤영이 당선됐지만, 그 뒤 오랫동안 이곳은 민주 정당의 텃밭이 됐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 정당은 해방 직후에 등장한 한국민주당류의 정당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그런 민주 정당이 기를 펴고, 이승만의 자유당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랬던 이곳이 1973년 제9대부터는 보수정당의 강세 지역으로 변모해 갔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의 당선자를 내는 중선거구제가 시행된 그때부터 보수정당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이종찬이라는 인물이 강자로 등장했다. 노무현의 보궐선거 당선을 제외하면 18대까지 이곳에서는 보수정당이 대체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이 정세균에 의해 뒤바뀐 상황에서 황교안이 나서게 된 것이다.

1973년 이전에는 민주 정당이 강세를 보이고 그 후로는 보수정당이 강세를 보이다가 2012년 19대 총선 때부터 민주 정당이 강세를 보이게 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종로구는 정치 1번지라고는 하지만 한국 정치의 지형 변화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상징성이 크고 거물급들의 대결장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정치의 지형 변화와는 무관한 선거 판세가 전개돼 왔다. 종로구 나름의 정치 원리가 보다 더 크게 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국적인 정치 1번지로 불리면서도 자기만의 논리로 작동하는 이곳에서 이낙연·황교안 두 후보가 어떤 결과를 거둘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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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젊음의 거리' 상가 일대를 돌아보고 있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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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신라왕실의 비밀,왕의 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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