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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원산은 금지'... 언제부터 이 땅이 일본 것이었나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조선 땅을 밟고 싶었던 미국인

등록 2020.02.27 15:23수정 2020.02.2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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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이전기사] 본국의 명령을 거스른 미 외교관의 의문사 (http://omn.kr/1l8zk)

여태까지 독자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김아무개의 말을 통해 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부터는 조지 포크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면 어떨까? 조지 포크로 하여금 1인칭 화자로서 직접 자신의 조선 체험과 흉중에 서려 있는 회포를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자.

조지 포크가 들려줄 이야기는 아래와 같은 자료들을 융합해 재구성한 것이다.

1. 조지 포크가 직접 작성한 기록물 : 여행기, 보고서, 공문, 개인 편지
2. 조지 포크가 수집한 문물 : 조선의 지도, 촬영한 사진 등
3. 국내외 학자들의 관련 서적 및 논문
4. 유관 참고 서적, 자료 및 정보
5. 합리적인 추론과 약간의 상상


비유해서 말하자면, 폐허에 흩어져 있는 기왓장, 들보와 서까래, 대문짝과 마룻장, 노둣돌 등속을 찾아 모아 허물어진 옛집 한 채를 복원해 보는 것이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1856-1893). ⓒ 위키

포크는 조선에서 부모님 앞으로 보낸 많은 편지에서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을 드러냈다. 앞으로 포크의 육성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내면세계까지 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적 성격의 기록물에는 그런 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때문에 군데군데 필자가 약간의 상상을 가미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지 포크로 하여금 아무런 감정 없이, 공문서 쓰듯이 지난 일을 회상하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미약한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겠다.

이제 교토의 깊은 산 속, 동지사 대학 공동 묘지를 지키고 있는 포크가 한국인에게 들려주는 육성을 직접 들어 보자.

'부산·원산은 가지 말라'

조선인들이여, 한국인들이여, 이게 얼마만이오? 님들은 나를 잊었지만 나는 잊지 못하였소. 여기 이야기는 무덤 속에 고이 잠든 고인의 말이 아니오. 죽었으나 죽지 못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조지 포크의 이야기라오.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해지오. 하지만, 애당초에 내가 조선 사람들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그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나의 기억이 미치지 못하거나 표현이 부족하거나, 일부러 혹은 부득이 지나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눈 밝은 님들이 상상을 피어 올려 마음껏 채워 보라는 것이오. 그럼, 이제 내 말에 귀를 빌려 주시오.

나는 지금으로부터 138년 전인 1882년 6월 3일 해군 동료 2명과 함께 일본 고베 항에서 미쓰비시 증기선을 탔소. 내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던가 보오. 우리가 탄 배는 나가사키, 부산, 원산항을 경유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정기 운항선이었소. 승선을 앞두고 구입한 선표를 살펴보니 뒷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소.

"Passengers other than Japanese not allowed land at Fusan and Gensan in Korea."

여기에서 'Fusan'은 부산, 'Gensan'은 원산의 일본식 표기니까, 이 말은 "일본인 이외의 승객은 부산과 원산에 발을 들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이라는 뜻이 아니겠소? 나는 이참에 꼭 조선땅을 밟아보고 조선인들을 만나보려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이 문구는 언짢은 것이었소.

'조선이 언제부터 일본 것이란 말인가?' 하는 반감을 안고 배에 오르게 됐소. 당시 우리 3명은 4년이 넘는 아시아 함대 복무를 마치고 귀임하는 길이었소. 당연히 우리나라 군함을 타고 귀국해야 할 일이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소. 한 차례 모험 여행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오.

귀임 발령을 같이 받은 우리 3명은 버킹엄(B.H. Buckingham) 중위, 월터 맥클린(Walter McLean) 소위 그리고 나 조지 포크(George C. Foulk)였소. 모험에 굶주린 우리들은 귀임 명령을 받기가 바쁘게 시베리아 횡단을 허락해 달라고 본국에 건의했고, 본국으로부터 한 달 만에 허가를 받게 되었던 것이오.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원정길에 올랐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의 전 여정을 지도로 미리보기(프리뷰, preview)해 보겠소. 붉은 선이 우리가 밟았던 길이오. 

미국인 초유의 여정을 계획하다
  

조지 포크 여행도 1882년 6월 3~9월 8일 귀국시 탐험 여행 ⓒ ,WASHINGTON

 
붉은 선이 모스크바 직전에 끝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미국인 초유의 여정이었고 귀국 후 보고서도 거기까지를 다루었기 때문이오. 물론 이 지도는 귀국 후 보고서에 수록된 것이라오. 참고로 한반도와 그 일대를 자세히 보겠소.
  

조지 포크 여행도 1882년 6월 3~9월 8일 귀국시 탐험 여행 ⓒ ,WASHINGTON


내친 김에 다음 일람표를 봅시다.
  

조지 포크 여행 정보 1882년 6월 3~9월 8일 귀국시 탐험 여행 ⓒ ,WASHINGTON

 
보다시피 이 표는 나가사키에서 뉴욕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놓은 것이오. 주요 경유지에 도착한 날짜, 거리, 머문 시간 등이 기록돼 있음을 알 것이오. 여기 표기된 거리 수치는 일본 고베항으로로부터의 거리라오. 그러니까 나가사키에 표기된 '434마일'은 고베로부터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오.

전체적으로 고베에서 뉴욕까지 122일에 걸쳐 1만4206 마일(2만2862km)을 주파했음을 알 수 있소. 귀국 후 제출한 보고서의 일부인데, 놀랍지 않소? 이뿐이 아니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과 같은 정보를 우리는 죄다 수록하였소.

그건 어쨌든, 보다시피 우리는 부산항과 원산항을 경유하였소. 당시 조선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금단의 땅이었고, 더구나 미국과 조선 사이의 초기 접촉 경험은 알다시피 불행한 것이었소.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그러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가 또한 그러하였소.

한국어를 공부했던 영국 외교관

우리 미 해군들은 조선 왕국을 시대의 낙오자, 미개한 나라, 살아 있는 화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소. 나는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느냐고요? 허허, 그건 말하기 어렵소. 그러나 내가 그 당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있소.

공교롭게도 나는 귀임 발령을 받기 직전에 조선어 학습 교본을 구해서 들여다보고 있었소. 책 이름이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소. < Corean Primer >(한국어 기초)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쓴 것이었소. 영국 외교관들이 벌써 그 책으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당시 일본 주재 영국 외교관들과의 접촉을 통해서였소.

고베에서는 영국 총영사관의 아스턴(Aston) 영사가, 동경에서는 영국 대사관의 사토우(Satow) 서기관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소.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경의 사토우 서기관은 자신을 찾아온 '이동인'이라는 조선 스님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있었다오. 당시 우리 미국인은 아무도 한국어를 몰랐고, 배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었소. 나는 속으로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영국 녀석들을 따라 잡아야겠다'고 결심하였소. 

조선어 공부를 막 시작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귀임 발령이 떨어졌고 시베리아 횡단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나는 한국어(앞으로 '조선' '한국'을 원칙 없이 병용하겠음) 대신 당장 급한 러시아어 회화 공부에 착수했소. 그러나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마음 속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소.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 수교 조약이라니

고베에서 우리를 태운 미쓰비스 증기선이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소. 나가사키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동양의 거점 항구였소. 우리 미국 함선은 늘 거기를 들락거렸고 거기에서 장기간 정박하곤 하였소. 더구나 거기엔 나의 일본 연인이자 나중에 짝이 될 카네(Kane)도 있었소. 하지만 그날 6월 5일은 카네 못지 않게 반가웠던 것이 있었으니 우리의 멋진 군함 스와타라(Swatara) 호였다오. 1900톤급의 무장 함선으로서 8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소.

바로 어제 도착했다는 스와타라 호가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오. 다름 아니라, 두 주 전에 조선의 제물포(오늘날 인천)에서 조선과 수교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 아니겠소? 5월 22일 양국의 대표가 제물포 언덕에 가설된 장막 안에서 6본의 조약문, 즉 영문본 3부, 한문본 3부에 인장을 꽉 찍고 서명하였다는 것이었소. 잉크가 겨우 말랐을까 말았을까 한 조약문을 미국 대표 슈펠트 제독이 지참하고 귀국하는 길에 나가사키항에 정박했던 것이라오.

조선 왕국이 서양국가에 최초로 빗장을 열었다는 면에서 조미수호조약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소. 뿐더러 나 개인으로서는 이로써 조선 착륙의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어서 '아, 이렇게 공교로운 행운이 있나' 하고 쾌재를 불렀던 것이오. 우리가 조선과 수교를 한 마당에 일본인의 허가를 받아야 할 일은 없지 않겠소?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는 15시간이 걸렸소. 깜깜한 밤을 출렁이는 바다에서 보낸 끝에 장엄한 일출을 보았을 때 우리는 이미 조선 해역에 들어와 있었소. 6월 7일이었소. 부드러운 초여름 바다에 어리는 아침 빛 속에 드러난 조선의 정경은 특별히 아름다웠소. 그때의 인상이 좀처럼 잊히지 않소. 그러나 우리의 보고서에는 그런 감정 같은 것은 배제한 채 메마른 정보를 기록하였소.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시속 10 노트의 속도로 15시간 동안 항해한 끝에 날이 밝았다. 40마일 전면에 조선의 가파른 해안이 시야에 들어 왔다. 이내 부산항 입구가 눈 앞에 다가 왔다. 심해에서 곧추 솟아오른 바위 섬들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를 통과하자 항구 초입의 왼켠에 북서-남동 방향으로 가로 놓여 있는 높은 테츠에섬(Tetsuye, 절영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역자)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섬의 절벽에 숲이 우거져 있었고 군데 군데 하얀 물줄기가 내리꽂듯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그것은 폭포수가 아니라 깎아 지른 암벽이었다. 섬의 북단은 나지막한..."

 

조지 포크 여행 보고서 1882년 6월 3~9월 8일 귀국시 탐험 여행 ⓒ ,WASHINGTON

 
녹색 배경과 하얀 옷, 기묘한 대조

이런 식으로 우리는 관찰한 모든 세부 사항을 세밀화처럼 보고서에 담았던 것이오. 그것들을 여기에서 다 늘어 놓을 수는 없지만 한 대목은 인용하지 않을 수 없소.

"(배에서 앞쪽을 바라 보니) 약간 높은 구릉 위에 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길 위에는 행인들이 끝임없이 오가는데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어 녹색 배경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우리 배가 항구에 진입하자 높다란 길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들은 거기 앉아서 유심히 우리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흰옷의 무리를 보며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혔소. 나는 급히 선장을 찾았소. "저기, 해안 마을에 잠깐 다녀오고 싶소. 이제 조선과 미국이 수교하였으니 문제없지 않겠습니까?"라고 그에게 말했소. 선장은 고개를 저었소. 일본 정부로부터 별도 지침이 내려온 게 없다는 것이오.

그러는 새에 배가 부산항에 닻을 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해안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조선 배들이 우리 쪽으로 바삐 다가왔소. 증기선 위로 우르르 몰려 든 그들은 부산 가는 일본인들과 수하물을 맡아 운송하려는 인부들이었소. 조선 사람과 일본인이 어수선하게 섞여서 품삯 흥정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 보았소. 관리처럼 보이는 사람도 섞여 있었소. 아마 조선의 검사관인 듯 싶었소.

뜻밖에도 조선인들 대부분이 일본어를 잘하였소. 우리가 일본어로 말을 걸자 그들은 금세 우리 주위로 몰려 들었소. 눈이 파란 서양 오랑캐들과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조선인들은 몹시 신기했던 모양이오.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하면서 그들은 열정적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소. 그리고 우리가 묻는 말에 아무 꾸밈없이 대답해 주었소.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한 어조로 조선인들에게 물어 보았소. 만일 우리 미국인이 저기 해안 마을을 방문하려고 한다면 당신들은 반대할 거냐고. 관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반대하지 않을 거요, 단지 사전에 일본 당국으로부터 착륙 허가를 받아야 하오" 하였소.

무슨 수가 없을까, 궁리 끝에 우리는 일본 소년 한 명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소. 증기선에 실린 소형 보트를 다루는 이 소년에게 우리는 노를 젓게 하였소. 영문 모르는 소년은 신나게 해안을 향해 노를 저었소. 소년은 그게 허용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오. 우리가 굳이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이 극적인 일을 우리는 보고서에 이렇게 간단히 기록하였소.

"증기선 관리들이 불허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 소년이 젓는 소형 보트를 이용하여 해안에 이르고야 말았다. 뒤쪽에서 증기선 관리들이 돌아오라고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소년은 상황을 알아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이었다."
  

조지 포크 여행 보고서 1882년 6월 3~9월 8일 귀국시 탐험 여행 ⓒ ,WASHINGTON

 
이렇게 조선 상륙 작전에 성공한 우리는 처음 밟은 그 땅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가?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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