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 원과 맞바꾼 내 스무 살 청춘아, 미안해!

[창간 20주년 공모- 나의 스무살] 영화 '기생충'이 불러낸 나의 청춘

등록 2020.02.25 08:10수정 2020.02.2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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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고독하고 고립되었던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리게 해서 수상 소식 중계방송 내내 울컥하기를 반복했다. '기생충' 같았던 내 젊은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서 아팠다. 현실 속에서는 영화보다 더 아픈 사람들이 많아서, 양극화의 거리는 갈수록 더 먼 것만 같아서, 축하하고 감동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저 반지하 누추한 어느 구석에 앉아서 울고 있던 어린 날의 가난한 소녀가 보여서 자꾸만 울었다.

나는 제인 폰다의 한 문장에서 작품상 수상을 직감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을 했다!" 인식 개선이라는 탁월한 낱말은 영화 '기생충'과 딱 맞아떨어지는 주제였으니.

제인폰다는 사회적 발언에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답게 그가 들고 나온 빨간 드레스와 외투 역시 지난 2014년 칸 영화제에서 입었던 옷이었다. 더는 쇼핑을 하지 않겠다는 소신에 따라 6년 전 옷을 꺼낸 그는 어깨에 걸치고 나온 붉은 코트 역시 지난해 10월 기후변화에 대한 빠른 대응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산 옷이다.

행동하는 영화인이기에 아카데미 작품상 시상자의 한 문장은 매우 의미 심장했다. 나 역시 옷 소비를 멈춘지 2년, 단순하게 검소하게, 조용하게 살며 '고독하되 고립되지는 말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긴다.

가난이라는 괴물에 빼앗긴 내 꿈들아, 미안해!

스무 살 공모 기사가 나던 날부터 내 의식은 44년 전 서울 마포구 창전동 어느 집으로 날아가곤 했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는데 아픈 과거를 끄집어내서 또 울고 싶니? 이제는 아팠던 너를 좀 놓아주면 안 되겠니? 가난하여 학교 못 다닌 게 무슨 자랑이라고, 너만 고생했니? 자식들도 읽고, 그 많은 제자들도 읽을 수 있을 텐데 감성팔이 좀 그만하면 좋겠어.' 내 안의 나는 응모 마지막 날까지 이렇게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글쓰기는 최고의 위로가 아니던가! 내게 닥쳤던 운명에 인내의 신발과 순종의 지팡이를 짚고 눈물을 흘렸던 스무 살의 나를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간절함이 더 커서 쓰지 않고는 고백하지 않으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가정 형편으로 정규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1971년 주경야독으로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도 고등학교 진학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1976년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이런저런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밥벌이에 바빴다. 그러나 세 식구가 먹을 쌀값도 삭월세 방값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든 아내에 절망하여 일손을 놓고 가세마저 기울어 고향집마저 넘긴 채 낯선 고창 바닷가 마을에서 노년을 맞이한 아버지. 우리는 가난이라는 괴물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그 시절에는 기초생활수급 혜택도 없는, 모든 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해서 사회적 약자가 설 자리는 없던 시절이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병든 아버지와 정체 모를 병으로 가산을 탕진한 어머니의 노후는 스무 살도 안 된 내 어깨에 있음을 통절하게 깨달은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서울로 가는 막다른 길뿐이었다.

20개월, 20만원과 맞바꾼 식모살이

어깨를 겨루며 경쟁하던 친구들이 단정한 교복을 입고 여고를 다니는 3년 동안 어린이집 보조보모를 시작으로 통신강의록 외판원 등을 전전했지만 연로하신 아버지와 병든 계모님을 부양하기엔 쌀값도 되지 않은 현실은 나를 서울로 내몰았다.

그때 말로는 식모살이, 요즘 말로는 가사도우미로 떠나던 1974년 5월 8일, 피눈물로 나를 보냈을, 이제는 계시지 않은 부모님의 슬픔을 서술하기엔 내 필력이 모자라니 다시금 눈물로 자판을 훔치는 중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소녀,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어 했고 책을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딸, 공부를 포기하고 낯선 서울로 월급 8000원 짜리 식모살이를 보내는 부모 심정이라니! 떠나는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열여덟살 청춘은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으니, 우리 가족이 굶지 않을 수만 있다면, 도덕적으로 나쁜 길만 아니라면 찬밥 더운 밥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니.

1974년 5월 8일, 애끓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고창군 심원면에서 시골버스를 탔다. 정읍으로 가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타고 도착한 마포구 창전동 진초록 쇠대문집, 시멘트로 포장된 마당, 철제 계단으로 연결된 이층에 빨래를 널던 풍경들. 새벽 5시에 일어나면 밤 11시가 되어서야 끝나던 집안일들. 밤 10시에 퇴근하여 저녁 식사를 하시던 사장님의 얼굴 모습까지 선명한 기억이 놀랍다.

초등학생 시절 경쟁하던 내 친구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꿈을 향해 강의를 듣는 그 시각 손에 물기가 마를 새 없이 집안 살림을 도맡아 날마다 손빨래를 하며 내 젊음은 눈물과 한숨으로 월급 8000원에 사라져갔다. 그리고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때였지만 나는 나를 믿었다. 그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20개월.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는 이유로 나는 가사도우미에 초등학생이던 남매의 가정교사까지 겸했다. 학교 숙제는 물론 받아쓰기까지 도와주어야 했다. 사모님이 도와주셨지만 태어난지 몇 달 안 되는 갓난 아이까지 내 몫이었다.

하루 일정을 소개하면, 새벽 4시에 일어나 검정고시 공부 한 시간, 다섯 시부터 연탄 아궁이 두 군데 연탄을 갈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 집안 청소가 기다렸다. 날마다 나오는 기저귀 빨래부터 가족들이 날마 내놓은 옷을 손빨래를 하고 나면 오전이 훌쩍 지났다. 어깨가 아프고 손목이 시린 고통을 뒤로 하고점심 식사 준비 후 다시 설거지, 오후엔 마당과 장독대 항아리 물청소를 해야 했다. 그것도 거의 날마다.

그러고나면 시장에 가서 반찬 거리를 사다가 음식을 장만하거나 김치를 담갔다. 오후 3시 쯤 되면 초등학생 두 아이가 하교를 한 뒤 학원에 다녀왔다. 그 다음엔 아이들 숙제와 공부를 봐 주며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나면 바로 저녁 식사 시간.

그런데 저녁 식사 준비는 늘 두 번이었다. 사모님과 아이들이 먼저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밤 10시 쯤 퇴근하는 사장님이 그때야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던 사장님은 후덕하셔서 20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내게 꾸지람을 한 적이 없었다.

사모님도 인정이 많아서 고등학교 과정을 500원 짜리 통신강의록으로 공부하는 걸 아시고 책값을 따로 주시며 공부하는 나를 지지해주셨다. 떠나온 6년 뒤에 결혼식을 알렸을 때에도 부부가 함께 오셔서 가장 많은 금액의 축의금을 내주시며 기뻐하셨다.

밤 11시가 되어야 집안 일이 모두 끝나면 비로소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며 촌음을 아껴 썼다. 잠 자기 전 1시간, 새벽에 1시간, 틈만 나면 통신강의록으로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가족들이 주말 나들이를 가는 날은 온전히 내 공부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

20개월 동안 서울 나들이를 해 본 적이 없다. 가족들이 같이 가자고 했지만 공부할 욕심이 따라나서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명절에 고향집에 가지 않았다.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였다. 그럴 때마다 옷이나 이불 선물을 부모님께 보내주시던 사모님의 인정이 그립다.

명절에도 시골집에 가지 않고 집안 살림을 맡아주는 것은 물론 사장님 동생 결혼식으로 초대된 손님 상차림, 김장하는 일, 고추장, 간장 담그는 일에 이르기까지 뭐든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나는 주인 내외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그 20개월 동안 배운 살림 솜씨로 신부 수업 없이도 알뜰 살림으로 평생을 살고 있으니 고생과 함께 인생의 지혜도 덤으로 얻은 셈이다.

스무 살, 하늘이 도운 두 가지 행운

고등학교 검정고시 전 과목 공부를 통신강의록으로 모두 끝내고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자신감이 생긴 1976년 1월,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귀향을 결심했다. 병들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었고 공무원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스무 달 동안 모은 적금이 딱 20만 원이 되어서 고향인 장성에 단칸 전셋방을 얻을 수 있었다. 방 한 칸을 얻고 녹음기 한 대, 벽시계 하나를 사고 나니 20만 원이 동났다.

나는 그해 8월 치러지는 검정고시와 지방공무원(요즘의 9급 행정직) 공부를 위해 장성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 옷을 사는 대신 적금을 부었으니 단 벌 옷으로 여름을 나는 게 힘들었다. 저녁에 빨아서 연탄불 위에 널어 말린 다음 입고 다녔다. 반찬도 없으니 호박 된장국을 질리게 먹어야 했다.

점심밥을 먹지 못하고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공부하는 날도 많았지만 아직도 그때의 열정이 그립다. 운칠기삼이라고 내겐 행운도 따랐다. 고등학교 3년 과정 수학 공부를 혼자 해내는 게 가장 힘들었는데 여름방학 동안 도서관에 다니던 학교 후배 덕분에 수학과목에서 과락을 면하여 합격했기 때문이다.

1976년 8월, 무작정 나만 믿기로 밀어부친 오기학습법으로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와 지방공무원 시험 모두 합격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울었다. 내가 잘해서라기보다 부모님의 생계유지를 위해 하늘이 복을 내려준 것이라고 믿었다(그 무렵 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읽었던 성경의 잠언과 시편은 나를 좌절과 절망으로, 인생의 어두운 터널에 갇힌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검정고시를 합격하고나니 다니던 성당에 소문이 나서 중학생 자녀를 둔 신자들의 과외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1977년 여름, 공무원 발령이 나기 전까지 과외 교사를 하며 공무원 수준의 소득으로 부모님께 안정적인 생활비를 드리게 되었으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Family'의 어원이 "Father And Mother I Love You"라고 하던가. "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내가 지킬 가족이 있다는 것은 살고 싶은, 내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목적이 되어 내 운명을 이끌었다.

나는 내 인생의 프로슈머

어려운 고비마다 쓴물 나던 그 시절이 나를 지키는 힘으로 옹이가 되어 강심장으로 버티게 해준 힘이 되었다. 쌀독이 비어 갈 때의 불안, 이사 갈 방을 구하지 못해 힘들었던 부모님을 보아야 했던 내 슬픈 젊은 날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한 채 내 안에서 차오르곤 한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그 가난 때문에 이루지 못한 성악의 꿈, 피아니스트의 꿈,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아직도 나는 잠 자는 동안에도 음악을 즐겨 듣고 책을 좋아하며 서툰 글쓰기에 매달리며 작은 기쁨을 누리길 좋아한다.

아직도 어제 일처럼 또렷한 스무 살 청춘을 소환하여 가슴 속에 불을 지피고나니, 나머지 인생도 스무 살 그때처럼 슬프도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프고 외롭고 힘겨웠던 스무 살 속에는 삶을 사랑하는 뜨거운 에너지가 있었다.

이제는 숯덩이로 남은 내 젊은 날의 스무 살 청춘을 불러내어 다시 불을 붙이려고 이 글을 응모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더 몇 십년은 족히 타오를 불씨를 저장해두렵니다. 길 없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고립되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나의 스무 살 청춘을 위로합니다.

"스무 살 옥순아, 난 네가 참 고마워! 예순네 살 옥순이가 널 위로해줄게!"

마지막으로 스무 살 나에게 길이 되어 번득이는 지혜로 나를 가르친 문장을 다시 불러내어 봅니다. 눈물로 무지개를 만들고 싶었던 나,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광선이 되고 싶었던 스무 살의 젊음, 서 있는 그 곳에서 반경을 그리며 원을 만들었던 눈물 많던 그 소녀, 가난으로 공부할 기회를 잃었지만 두려움 없이 도전했던 그 용기를다시 소환하여 석양을 향해 가는 인생의 동반자로 삼으려 합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스무 살 청춘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힘내시라고, 그대 자신이 가장 좋은 친구이니 늘 위로하기를!
 
눈에 눈물이 없었다면 무지개가 피지 못했을 것이다. - J. 번즈

광선은 비록 더러운 곳을 통과할지라도 오염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반경을 그을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 소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을 맞는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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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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