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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캐나다 1년 살기, 딱 하나 아쉬운 점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한번쯤은 나를 위해 낭비할 용기

등록 2020.02.15 14:31수정 2020.02.1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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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기자말]
'낭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쓰다"이다. 그래서 "낭비한다"는 말의 뉘앙스는 다소 부정적이다. 시간이나 인생을 낭비한다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30대일 때는 자기계발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던 때라 "목적의식이 분명하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류의 글이 잠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이 아니어도 모범적 생활 태도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이었던 만큼, 학창 시절에는 결석은커녕 지각을 한 기억도 없고, 회사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투루 지내지 않았으나 가장 큰 단점은 생활계획표 같은 일상이다 보니 그것을 벗어날 계기가 그다지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 벗어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아니,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선을 넘지 않는 성실함의 목표는 '남들처럼 사는 것'이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서 때가 되면 결혼할 줄 알았고, 취직할 줄 알았고, 승진할 줄 알았고, 아이를 낳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계획대로, 뜻대로 된 게 거의 없었다. 남들 사는 대로 대세의 흐름대로 살려 했지만 어느 한구석은 일탈해 있었다.

게다가 모범생처럼 성실하게 달려오기만 한 삶이 어느 지점에 이르자 삐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 출근, 오후 10시까지 야근하는 날이 한 달에 절반 정도.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망가져 있었다. 내가 자초한 고장이었다.

마음속에선 공허함이, 육체에서는 그만 쉬라는 아우성이 폭발한 다음에야 모든 걸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내가 용쓰지 않으면 '아무나'가 될까 봐 혹은 '대세'의 흐름에서 누락될까 봐 낼 수 없었던 용기 말이다.

퇴사 후 캐나다 빅토리아로

사표를 내기로 하면서 무엇을 할지 생각해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있었다. 바로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기. 내가 외국 유학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당시만 해도 해외연수가 활발하던 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우리 집 형편에 어학연수라도 떠날 수는 없었던 터라 그저 아득한 장래 희망으로만 여기던 꿈이었다.

누군가는 허영심이라고 따가운 충고를 하기도 하고, 그런 인생 낭비를 왜 하냐고도 하고, 생산성 없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하기도 했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은 '갔다 와서 뭐 하려고 하냐'는 걱정이었다.

평소 팔랑귀임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저 내가 벌어놓은 돈으로 한번쯤은 나를 위해 탕진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 명품백이나 옷 등 신상품 같은 것과 무관하게 살아왔고, 시계추처럼 딴 길로 새지 않고 열심히 산 대가로 한번쯤은 나에게 진탕 써보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난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었다. 결혼하면 더 못 갈 테고, 재취업하면 더 못 갈 테니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났다. 무책임하거나 나쁜 일만 아니라면 한번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낭비를 해보는 것도 괜찮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셈이다.

그해 겨울, 나는 캐나다 빅토리아로 떠났다. 별 준비도 없이 그저 어학연수로 홈스테이만 정하고 떠났다. 빅토리아로 정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캐나다에서 제일 따뜻한 곳, 그리고 노인들이 많은 휴양지 같은 곳이라는 말에 더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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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나는 캐나다 빅토리아로 떠났다. ⓒ unsplash

 
그때의 나는 도시의 세련됨이나 속도보다는 느린 편안함이 본능적으로 더 이끌렸다. 가서 보니 실제로도 그랬다. 어느 곳에서든 사람(특히 노약자)을 우선으로 기다려주는 느긋함,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뒷사람을 배려해 주는 에티켓, 팔순의 할아버지가 버스에 오르기 전 "레이디 퍼스트"라며 나에게 먼저 타라며 양보해 주는 매너 등. 

아무도 떠밀지 않는 그곳의 기분 좋은 한가함과 몸에 밴 배려, 사람이 먼저인 친절한 사회 시스템에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속도에 치어 살았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내 속에 독이 차 있었는지 울면서 깨달았다.

나를 위해 또 한번 거하게 낭비할 날을 기대하며

한쪽 청력을 잃을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백수로 온전히 1년을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웃었고, 자연을 보며 많이 걸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곳에선 내가 과장님도 팀장님도 아닌, 그저 나였다. 한국에 있을 땐 명함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을 잃어버리면 내 존재가 무너질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산다는 게 얼마나 자유롭고 가벼운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덕분에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탕진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낭비였고, 한 점 후회 없는 낭비다.

그저 의미 없이 아무것도 남는 거 없는 '돈지랄'한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유형의 것만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남는 것일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지금도 종종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갖고 갈 행복한 기억일 것이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꼽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돈만큼이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 기억이 지금도 나를 행복하게 하고, 죽을 때에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므로.

또 하나, 빅토리아에서 만난 인연들은 지금까지 내 삶의 큰 복이다. 어학원에서 만난 일본 친구와도 가끔씩 안부를 나누고 있고, 한인교회 동생들과는 서울에 와서도 꾸준히 만나며 속내를 나누는 인생 친구가 됐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평생 재산을 얻은 셈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1년간의 낭비는 30대를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을 위해 낭비하는 시간은 하루든 일 년이든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요즘은 'OOO에서 한 달 살아보기' 같은 것이 유행이던데, 그때는 그런 개념조차 나오기 전이었다. 그때 만약 <캐나다에서 1년 살아보기> 같은 걸 나름 잘 정리해서 다녀온 뒤에 글을 썼다면 그 분야의 개척자가 됐을 텐데. 나중에 '한 달 살기' 콘텐츠들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그러고 보면, 내가 생각했던 걸 누군가 하고 있고, 내가 쓰려고 했던 걸 누군가 이미 쓰고 있다. 그래서 '먼저 하는 사람이 임자'라고 하던가.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고 있는 것. 이제는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해보려 한다. 10년 뒤 지금을 생각하며 '아, 그때 그거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조금은 줄이기 위해. 나이기 때문에, 지금의 내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 말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제는 사회에서 용도 폐기될 위기에 처한 50대의 프리랜서 작가. 나같이 사회에서 작고 미미한 존재가 만들 수 있는 작은 리그는 어떤 것일까. 오래 일하고 싶은 내가 뛸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계속 답을 찾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다. 또 한번 거하게 나를 위해 낭비할 날을 기대하면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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